오늘도 파이팅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by 뉴로그림



이젤을 샀다.

초중등 시절 사생대회를 나가면 휴대용 이젤을 펼쳐서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이젤을 펴고 그림을 그리면 뭔가 정말 제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미술 선생님 왈, 알루미늄 이젤이 가격이 싸면서도 십 년도 거뜬히 쓸 만큼 튼튼하다고 하였고, 디자인보다는 실용성에 좀 더 무게를 두는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커다란 알루미늄 이젤을 샀다. 집 안 한 구석을 꽤 너른 면적으로 자리 잡은 이젤 덕에 다섯 살 둘째는 나의 크로키 북에 온갖 낙서를 해놓는다. 하트도 그리고, 토끼 머리띠를 한 엄마, 아빠, 언니, 본인을 그리고, 회오리바람이라며 마구 동그라미를 갈겨 놓기도 한다. 아 나의 이젤이여. 아 나의 크로키 북이여.


이제부터 본격 그림이 아니라, 둘째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지도 벌써 수개월에 이른다. 이쯤 되면 뭔가 작품이 나와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주 1-2회 점심시간 짬짬이 50분 그리는 것을 감안하면 천천히 가는 게 당연하다 싶다. 뭔가 깊이 있게 진득이 그려보고 많이 그려야 실력이 쑥쑥 늘 텐데 50분은 생각보다 정말 짧은 시간이다. 요즘 배우는 아크릴 물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크릴 물감 꺼내고 물 떠 오고 세팅하고 나서 이제 슬 색 좀 입혀 볼까 하면 어느새 정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짧은 시간적 제약 때문에 치우는 것은 선생님이 해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진득하게 그림을 그려 보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집에서도 따로 시간을 내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둘째의 놀이터로 이용되겠지.

프로 혼밥러

미술학원에 가는 점심시간이면, 혼자 밥을 먹으러 후닥닥 나간다. 병원 점심시간에 맞추면 50분마저도 시간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최소한 한 시간 반은 되면 좋으련만. 매년 재계약하는 계약직 주제에 원하는 것만 자꾸 는다. 가는 길 사이렌 오더로 주문해둔 스타벅스의 베이컨 치즈 토스트를 허겁지겁 먹거나, 혼밥 하기 좋은 단골 작은 식당에 가서 가장 빨리 나오는 메뉴를 시켜 먹곤 한다. 그러기를 벌써 석 달째. 혼밥 하는 것이 신경 쓰이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 들어서는 주변 시선도 개의치 않고 마음도 아주 편안해서 바닥 보일 때까지 열심히 다 먹고 나온다. 항상 줄이 길던 맛집에 어느 날 줄이 없으면 쏙 들어가서 혼자 맛을 보러 들어갈 정도의 내공도 생겼다.


당직 날에는, 점심시간에 짬 내어하는 여가 활동이라 할지라도 다시 불려 들어가거나, 혹은 일이 바빠 아예 나가지 못하는 상황도 종종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바깥바람을 쐬고, 꽃 한 송이라도 그리러 나간다. 그러면 그것이 나름의 힐링이 되고 위로가 되어준다. 매일 굴러가는 일상 속에서 찾는 소소한 활력이랄까.


그렇게 활력을 찾아가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도, 어떤 날은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다.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고 나만의 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고 싶은 그런 날. 혼자이길 원하지만, 딸 1이 찾고, 딸 2가 찾고, 남편이 찾고, 관리해야 할 집안일이 있고, 사람들이 있고, 케어할 환자들이 있고, 챙겨야 하는 엄마, 아빠, 시부모님, 사람들, 기타 등등등. 도저히 혼자일 수가 없다. 조금 쉬어볼까 하면 카톡으로 연신 울려대는 병동 노티, 응급실 전화, 각종 단톡방 알림 등등. 모두 무음처리를 해놓아도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다.


매일같이 쳇바퀴를 굴린다.

월요병을 이겨내며 주말 동안 쌓인 일 마무리하느라 분주한 월, 화가 지나고 나면 수요일에는 진료실에 있는 화분들에게 물을 듬뿍 부어주고, 목요일에는 도서관에 간다. 월수 점심시간엔 미술학원에 간다. 금요일에는 아이 방과 후 스케이트를 위해 픽업을 해야 하며, 주말 하루는 집에 있는 화단에 물 주기, 그리고 거북이 수조 물 갈기의 요일별 루틴이 있다. 체크리스트를 수행하고 나면 매일 해야 할 수행 과제들을 한다. 매일 크로키 하나씩 짬짬이 그리고, 책도 좀 읽고, 브런치 글도 조금씩 채워둔다. 퇴근 후 집에 오면 아이들의 체크리스트를 점검하고 함께 책을 읽고 재운 뒤 미처 다 하지 못한 과제들을 하고 집을 관리하고 넷플릭스 등을 보며 쉬기도 한다. 그렇게 오늘도 성실히 하루를 살아낸다.


오늘도 파이팅.

파이팅은 운동 경기에서 선수들끼리 잘 싸우자는 의미이지만, 힘내라, 아자, 정도의 뉘앙스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신경과 의사로 살아가면서 겪었던 갖가지 싸움(戰) 중에서도, 매일을 파이팅 하며 살아온 나 자신과의 싸움이 단연 으뜸이지 않을까. 오늘도 파이팅하는 나와 당신을 응원한다.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매일 살아내며, 다 때려치우고 싶은 찰나의 위기를 이겨낸 여러분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별별 신경전(戰)을 무사히 넘겨낸 나를 진심으로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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