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밖 이야기
생소한 이름을 가진 질환이 있다. 길랑 바레 증후군 (Guillain-Barre Syndrome). 1916년 프랑스의 신경학자 Georges Guillain와 Jean Alexandre Barre의 이름에서 따온 증후군이다. 생각보다 아주 드문 질환은 아니기 때문에 신경과 전공의 일 년 차가 되면 몇 케이스를 접하게 되고, 또 그중 일부는 호흡 부전까지 진행해 중환자실을 들락날락하게 된다. 최근에는 코로나 백신 접종의 의무화 이후 백신 부작용으로 종종 언급되던 질환명 이기도 하다.
길랭 바레 증후군이란, 말초 신경에 발생한 급성 염증 탈수초 질환으로, 급성 염증 탈수초 다발 신경병 (Acute inflammatory demyelinating polyneuropathy, AIDP)이다. 연간 인구 10만 명 당 1명의 빈도로 발병하고, 남녀의 차이는 없다. 상기도 감염이나 장염 등의 선행 질환 발생 수주 후에 시작하여 비교적 빠르게 진행하는 대칭성의 상행 운동 마비(ascending motor paralysis)와 심부건반사의 저하 혹은 소실이 특징이다. 발병 초기에 하지의 원위부부터 힘이 빠지는 증상으로 시작되어, 수일에 걸쳐 근위부로 마비가 진행한다. 대부분 하지가 심하고, 1~3주에 걸쳐 운동 마비가 진행하지만, 급격하게 진행하는 경우에는 수일 만에 정점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1/3은 호흡곤란이 나타나고 1/2은 혈압 변동이 심한 자율신경 증상이 있다.
환자 중에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가, 본인이 길랑 바레인 것 같다면서 응급실을 찾는 경우가 있다. 장염이 있었고, 양 발이 저리면서 힘이 없다고 한다. 얼핏 병력만 들으면 어? 정말인가 싶다.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실제 걸어보면 발끝으로 걷기 등 다 잘 되고 근력의 저하는 없다. 심부건반사도 팡팡 잘 튄다. 길랑 바레를 의심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는 상태다. 환자는 걱정이 앞서 길랑 바레인 것 같다면서 울상을 짓고 오지만, 실제로는 그냥 장염 앓고 수분이 빠지면서 생긴 전신 위약감일 뿐인 경우도 많다. 루게릭 병도 비슷하게 많이 찾아온다. 스스로 루게릭 같다고 찾아온 사람 중에 정말 루게릭인 사람을 사실 나는 본 적이 없다. 초기 증상은 걱정이 많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증상 같기 마련이지만 걱정을 걷고 보면 참으로 다르다. 염려가 짙은 환자일수록 뭔가 증상에 대해 인터넷을 뒤져보지 마시라고 권한다. 당뇨나 고혈압 같은 만성 질환들은 스스로 많이 찾아보고, 좋다는 행동 양식을 따르고, 식단을 알아보고 스스로 관리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생소하고 드물고 걸리지 말았으면 하는 병들의 증상을 부러 찾아보며 지레 걱정하는 것은 가능한 피했으면 좋겠다.
실제로 발끝부터 서서히 상행하는 양상의 근력 저하가 있고, 심부건반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하게 되는 검사는, 신경생리 검사 중 신경전도 검사 (NCS, Nerve Conduction Study)와 뇌척수액 검사(Spinal Tapping, CSF study)이다. 뇌척수액에서 염증 세포수는 증가하지 않고 단백질만 증가되는 알부민 세포 해리 반응 (albumino-cytologic dissociation)이 있을 수 있다. 발병 1주일 후에는 단백질 수치가 대부분 상승한다. 신경생리검사가 질병의 초기에는 정상이거나 경한 이상이 있으며 특히 아주 초기에는 F파의 지연만이 나타난다. 임상 증상이 호전되고 나서도 오랜 기간 남아 있을 수 있다.
하게 되는 치료는 호흡보조와 대증치료이며, 고용량의 면역글로불린 정맥주사 혹은 혈장분리 교환술을 시도해볼 수 있다. 진단 후 지체 없이 치료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심평원의 보험 기준에 따라, 증상이 경미한 경우에는 보험이 되질 않는데, 그러면 약값이 정말 비싸다. 5일 쓰는데 몇 백씩 든다. 길랑 바레 증후군에서 보험 되는 기준은 딱 2가지인데, 쉽게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못 걷는다. 2. 숨 못 쉬거나 못 삼킨다. 치료라는 것이 1과 2의 상태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거늘, 약값이 없어 저 지경이 되고 나서야 치료를 시작하면, 너무 늦는 것이 아니냐 이 말이다. 의사는 교과서대로 치료하고 싶은데 심평원에서 보험 기준을 저리 잡아 놓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병원 손해를 나 몰라라 한채 교과서대로만 할 수도 없고, 결국 비싼 약값을 지불해야 하는 환자도, 보험을 해주지 못하는 의사도 답답한 경우가 왕왕 생긴다. 약값 지원을 위해 잘 걷는 사람을 못 걷는다고 거짓 차팅을 하자니 양심에 위배가 되고, 정직하게 비용을 청구하려니 뭔가 환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대학병원 수련을 마치고 강호로 나와 제일 먼저 외는 일이 바로 보험기준이 아닌가 한다. 의학 지식의 업데이트보다 빠른 게 보험 기준 업데이트일 지경이다. 나와 보니 배워본 적도 없는 심평원과 진단서와의 전쟁이다.
길랑-바레 증후군에는 다양한 아형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밀러 피셔 증후군 (Miller Fisher Syndrome)이다. 밀러 피셔는 캐나다 신경학자이며 1956년에 이 증후군을 발견하고 자기 이름을 붙였다. 정상압 수두증에서 하는 검사인 Fischer test도 이 사람이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 (대..대단해!) 밀러 피셔 증후군은 길랑 바레 증후군 중에서도 5% 비율을 차지하는데, 세 가지 특징이 있다. 1. 안구운동마비 2. 운동실조 3. 심부건반사의 소실. 셋다 모두 해당하는 전형적인 경우도 있지만, 실상 아닌 경우도 많다. 치료는 결국 길랑 바레와 같은데, 아까 말했듯이 이 아형의 경우에는 상하지 운동 마비는 없어서 보험이 아예 안 된다. 매우 희귀한 질환에 걸렸는데, 치료도 보험이 안 되는 이 상황이 나는 참 이해가 안 되지만, 현실이 그러하다. 겪는 환자는 얼마나 더 이해가 안 될지.
계속 투덜댔는데, 마지막은 희망적으로 끝내보자. 신경과에는 참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점점 진행하는 것만 바라보며 증상의 완화를 기대하는 정도의 약만 쓰는 병들이 많다. 치료가 되는, 결국에는 대부분 좋아지는 경과를 밟는 질환의 종류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길랑 바레 증후군이다. 급격한 진행 속도를 느끼면 두렵다가도 (아 오늘 밤에는 콜이 많겠구나, 환자가 결국 호흡이 안 되면 기관 삽관, 중환자실 코스로 가겠구나) 그래도 최소한의 후유만 남기고 좋아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으니 아주 희망적이다. 바닥을 칠만큼 치고 결국엔 올라와주는 것이 이 병이다. 그래서 나는 이 질환을 싫어하지만 좋아한다. (하지만 의심되면 대학병원을 권고하는 것은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