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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로그림 노운 Mar 02. 2022

그림 그리는 신경과 의사

나는 낙서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나는 성격이 매우 급해서 뭐든 빨리 완성되는 것이 좋다. 사실 원래 성격이 급한 것은 아니었다. 실상은 아주 느긋하고, 좋아하는 동물이 "나무늘보"라며 널브러져 있길 즐겨하던 나이다. 하지만 신경과 의사를 하면서 점점 성격이 더 급해졌다. 밥 먹을 때도 가장 늦게 먹어 친구들의 지루한 눈초리를 받아가면서도 꿋꿋하게 이것저것 관찰하고 구경하며 느긋하게 먹던 나였는데, 수련 기간 응급 환자를 봐야 하는 상황들이 나를 더욱 급하게 만들었다. 밥을 먹다가도 응급실 전화가 울려댔고 "코드 브레인"(응급한 시술 등을 요하는 혈관성 질환 의심 시 붙는 용어로, 병원마다 용어는 조금씩 다르다.) 환자입니다! 63세 남환으로 30분 전 밥 먹고 있는데 갑자기 말이 안 나오고 오른쪽 편마비가 있어 내원하였습니다. CT 상 뇌출혈 소견 없습니다. 심전도상 심방세동 관찰됩니다."


... ( 숨 막혀 오는 소리)


탁 수저를 놓고 뛰어간다. 환자 몇 킬로예요, 기저질환 뭐가 있어요, 혈당은요, 지금 혈압은 얼마예요, 이것저것 환자의 정보를 수집하며 배고픔은 잊고 서둘러야 했다. 시간 안에 혈전 용해제를 써야 하고, 저 정도 증상이면 시술까지 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왜 난 성격에도 맞지 않는 신경과를 택한 걸까 후회한 적이 있다. 성격에 맞지 않는 건 애초에 의사였던 것이 아닐까 싶은 순간도 많았다.



물론 나중에는 CT 찍고 환자 피검사 결과 기다리는 동안 김밥 욱여넣을 여유까지 생겼지만, (나름 철저히 분 단위로 계산된 시간이었지만 당시 전임의한테 호되게 혼나긴 했다. 코드 브레인 소식을 듣고도 네가 지금 밥을 먹고 있다는 게 말이 되냐!) 당직 날이면 항상 마음이 급했고, 전화기를 놓을 수가 없었으며, 응급실 전화 소리만 다른 음원으로 설정해놓은 것을 이내 후회하곤 했다.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해두어도 결국엔 매번 그 음악이 싫어져 버렸으니.


아무튼 난 신경과 전문의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성격이 변했고 좀 더 급해졌으며, 좀 더 빠른 결과의 도출을 바라게 되었다. CT 실을 쪼으고, 검사실에 세네 번 전화해댔으며, 응급실 간호사들의 마음을 태웠다. 증상 생기고 3시간 이내에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평소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던 나의 삶과는 괴리가 있는 삶으로 변화시켰다.




어릴 때부터 낙서를 좋아했던 나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야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낙서를 하고 깨작깨작 네 컷 만화를 즐겨 그리며 어린 시절을 자유롭게 보내던 추억을 떠올리며, 어느 날 문득 병원 근처의 화실을 찾아 나섰다. 나의 점심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우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이끌었다.



크로키는 급한 내 성격에 딱 맞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1분 3분 5분 만에 그림 완성이라니! 이 세상에는 미완성이지만 완성되는 그림도 존재한다. 짧은 시간 내에 형태를 잡고 선을 맛깔나게 살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 처음에는 손에 익지 않으니 형태도 엉망, 선도 너저분했지만 점점 하면 할수록 나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게 인내와 끈기 아니겠나. 꾸준히 해내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다.



매일, 조금씩, 조금씩 연습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사람들 이야기도 전해 듣고 조언을 해주기도 하는 이 시간이 좋았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캐리커쳐 인물화 수채화 등 미술 전반을 배우고 진료 짬짬이 3-5분 정도 온라인 미션 크로키를 그렸다. 그림이든 환자든, 잘 풀리지 않아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면 가끔 인생 전반을 위로받는 느낌까지 들었다. 긍정의 힘은 대단하다. 서로에게 전파되고 좋은 기운을 퍼트린다.


이상하다.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이 안정되고 잡생각이 정리가 된다. 한 대상에 완연히 집중하는 과정에서 그 대상에 애정을 가지게 되고, 좀 더 정확히 표현해 보고픈 욕구가 생기면서 다른 생각들은 홀홀히 사라지고 내면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계속 연마해서 좀 더 잘 그려내고 싶어졌다. 오늘도 미션을 클릭하고, 4B연필을 들고, 크로키 연습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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