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이야기

2022.01.06. 作

by 느루 작가

요즘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런지 계속 생각에 빠진다. 작년 한 해는 1월 첫 날부터 '일을 왕창 벌여서 잡생각이 들어오지 못 하게 만들어버리자!'고 다짐했다. 생각에 빠질 때마다 찾아오는 공허함과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사람이라 그런가? 그렇게 쉴틈 없이 일하고 나니 혼자 외로워하던 그 시간이 그리워졌다. 너무 고생을 해서 휴식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결국 새해를 맞아 큰 결심을 내렸다. 휴학! 휴식도 휴식이지만 가장 큰 목적은 스스로 무언갈 이루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요즘에도 생각에 깊이는 빠지지 못 하게 사소한 일들을 계획해서 틈틈히 하고 있다. 정확히는 집에서 나가지 않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 내가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고, 부엌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할아버지와 대화하는 시간이 정말 많아졌다. 할아버지는 내가 7살 때부터 같이 사셨다. 하지만 아빠가 할아버지랑 경제적 이유로 몇 번 큰 다툼을 하신 후로 서로 좀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사실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와는 소통이 힘들어서 온 가족이 반기지 않는다. 대화를 시작하면 할아버지 어린 시절의 이야기, 방앗간을 하시던 이야기, 상경해서 다닌 직장의 이야기 등 대부분의 대화가 할아버지 중심으로 흘러간다. 문제는 할아버지의 일방적인 대화가 장장 1시간에서 길게는 3~4시간까지 이어진다.


자식인 우리 아빠와 작은 삼촌은 같은 얘기를 몇 년을 들었는지 모른다며 손사레를 치고 할아버지와 마주 앉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신다. 앉아서 듣다보면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긴 한다. 그럼에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이유가 있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음 한 쪽에 안타까움이 자라난다. 전쟁도 겪고 그 어려운 시절 힘들게 일하고 몸 써가면서 가족을 지켜낸 이야기, 남들은 절대 안 믿는다고 내 평생에 내 머릿속에는 가족들밖에 없었다는 말씀. 그런데 남아있는 가족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당신도 그걸 아시는지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 중에 머쓱하게 허허 웃고 뒤돌아 들어가시던 모습이 참 가슴을 저리게 했다.


할아버지는 넷째로 태어나셨는데, 집안에서는 큰아들만 공부시킨다고 할아버지는 농삿일, 방앗간 일만 배우셨다고 했다. 그리고 아빠와 삼촌 학교보낸다고 서울로 올라와서 공장일을 하셨는데 잘못 돼서 귀 한쪽과 눈 한쪽이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래도 아파트 경비일까지 하면서 열심히 돈 모아다가 대학에 대학원까지 보냈다고, 두 놈 다 그래도 머리 좋아서 다행이었고, 그렇게 장하다고 자랑을 하시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말씀만 들어보면 참 그렇게까지 가족을 위할 수가 없는데, 가족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느꼈던 걸까 쑥스러워 고맙단 말 한 마디 하지 못 했던 걸까?


매달 노인 연금이 나오는 날 아침 일찍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오시고는 나와 언니, 동생 그리고 삼촌네 자식 셋까지 꼭 용돈을 쥐어주셨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만원을 쥐어주시면서, "아이고 야야, 내 돈 많으면 더 줄 텐데 이것밖에 못 줘서 미안타."라고 하셨다. 난 "할아버지 이제는 제가 벌어서 드려야죠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그냥 웃으면서 답했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순간 멈칫하시더니 뒤돌아서 눈물을 닦으시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만이라도 고맙다. 진짜 고맙데이."하시고 방에 들어가셨다. 할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잘 본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까지 마음이 여리신가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정말 외로워보였다.


할머니와 사별한지 20년이 지난데다 자식 손주들은 맨날 바깥 나간다고 거의 혼자서만 지내셨으니, 게다가 모르는 사람과 말 섞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니 앉을 때마다 비슷한 얘길 하는 게 당연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할아버지의 모든 걸 알 수 없고, 할아버지의 모든 생각과 말씀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는 없지만, 그토록 소중히 생각하시는 가족으로서 편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삶에 따뜻한 빛이 더 가득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