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앨범을 펼치면 곱슬곱슬한 파마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있다. 분명 엄마가 아침에 예쁘게 묶어줬을텐데, 이마를 따라 천방지축으로 뻗어나간 머리는 바글바글 존재감을 뿜어냈다.
"어머,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파마하고 나왔네."
내가 엄마 뱃속에서 나왔을 때 간호사선생님들이 했던 말이다. 엄마는 순간 "씨도둑은 못한다더니..."생각하며 아기를 안다가 웃음이 터졌댔다. 발갛게 상기되어 우는 얼굴위로 자잘한 웨이브머리를 말고 나온 갓난아기라니.
장발이 한창 유행이던 1970년대. 아빠는 꽤 고집스러웠을 곱슬머리들을 제법 손질한 채로 그 당시 최신 헤어스타일이었을 장발머리를 거뜬히 소화하고 있었다. 그 때는 드라이기도 없었을텐데 아빠는 그 머리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앨범속에는 20살을 갓 넘긴 앳된 얼굴의 두 남녀가 산에서 바다에서 데이트하는 모습도 있었다. 엄마는 적당한 곱슬기가 있는 도도한 긴 생머리였고, 아빠는 자유분방한 단발머리로 나름의 멋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말대로라면 아빠의 머리로 말할 것 같으면 베토벤아저씨 저리가라였다고 한다.
역시, 그 아빠의 그 딸이었다. 나는 안타깝게도 엄마의 생머리를 물려받지 못했다. 왜 삼신할머니는 이리 불공평하지? 엄마의 큰 눈과 작은 얼굴 대신 엄마의 새치머리를 닮게 하셨고, 아빠의 매끈한 다리와 길찾기 능력 대신 지독한 곱슬머리를 주셨다. 남동생은 그 둘 중 어느것 하나도 받지 않았다. 심지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는 곱슬기가 펴져서 생머리가 되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기적이 생기지 않았다.
이제는 흰머리가 더 어울릴 나이로 기울고 있지만, 지난 20년간 새치와 곱슬머리가 공생중인 내 머리카락은 지금도 여전히 그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둘 사이에서 매일 갈팡질팡한다.
내 노년의 모습은 아직 잘 그려지지 않지만 하나 소망한다면, 검은머리가 20프로만 남아있는 풍성한 그레이헤어의 소유자로 늙는 것이다. 당연히 빠글한 파마도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러려면 지금의 머리숯이 유지가 되어야겠지. 아직 그래도 머리숯은 봐줄만 하니까. 그럼 언제부터 염색을 멈출것인가.
요즘 나의 고민은 머리 염색이다. 20대 중반부터 진해진 새치머리는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해서, 엄마가 염색할 때 옆에서 조금씩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30대 초 중반부터는 정수리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그 이후부터는 걷잡을 수 없었다. 30대 초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소위 '염색방'은 당시 나의 큰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미용실보다 싸기도 하고 부담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미용실은 그러질 못했다. 가까이 있어도 먼 당신과 같은 존재였다. 1년에 한번 정도 갔을까? 왜냐하면 항상 기대치에 못 미치는 머리스타일 때문이었다. 단골 원장님도 내 머리는 어떻게 해도 한계가 있다고 했다. 부스스하게 날리는 곱슬머리에 염색까지 하니 왠만큼 관리해서는 탱글한 머리가 될 수 없었다. 미용실 거울앞에 앉으면 그렇게 부스스해보일 수 없었다. 왜 미용실 거울앞에만 서면 작아지는가? 그렇게 나는 20대 한창일 때도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가는 곳이 미용실이었다.
엄마가 가끔 그랬다. "왜 하나만 닮아도 되는 걸 양쪽 안 좋은 건 다 닮았냐.."라고 하며 자신을 탓했다. 그런가 하면 아빠는 옆에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내게 "파마값 안들어서 좋지 뭐~나중에 아빠한테 고맙다고 할 날이 올꺼다." 라고 나를 들쑤셨다. 아빠가 진심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그게 궁금하다. 아빠가 여자였다면 내 마음을 조금은 공감했을텐데, 아빠의 위로 아닌 위로에 되려 엄마가 나 대신 화를 내주었다. 지독한 곱슬머리가 핸디캡인 딸에게 그건 '특별함'이라고 억지로 구겨넣어주는 아빠의 사랑은 위로로 닿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것도 아닌 걸 뭘 더 어찌하랴. 속으로 삭히는 수 밖에.
뱃속에서 파마하고 나온 어린 여자아이는 이제 나이 마흔이 넘은 중년의 여성이 되었다. 여전히 곱슬머리와 새치머리는 극복하지 못한 채로. 이제는 흰머리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염색을 하고 보름만 지나면 어김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흰머리를 보면 우아한 중년을 꿈꾸는게 과연 가능한걸까 싶다. 그래도 지금껏 울고 웃으며 동고동락한 나의 곱슬언니들과 흰머리 동생들에게 이제는 미운정이 다 들었다.
우아한 그레이를 가진 할머니가 되려면 지난 20년간 나의 머리로 살아온 애증의 곱슬과 새치들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다. 정말 아빠가 나에게 해주었던 그 말 그대로 "특별함"이 될 그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친해지고 싶지만 친해지지 않던 미용실같은 내 애증의 형제들과 사이좋게 살아 갈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