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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곱슬머리앤 Nov 11. 2023

그래도 곱슬머리가 누렸던 특권

곱슬언니와 새치동생을 사랑할 수 있다면

 

 곱슬과 새치가 공생하는 41년생 머리칼의 히스토리를 떠올리다 보니 안 좋았던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다. 곱슬이라서 '그때는' 좋았던 게 있었으니, 바로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외모에 관심이 극에 달하던 시기, 더불어 이마에 여드름과 함께 나의 곱슬끼도 풍년이었던 17살, 동그란 금테안경에 소극적인 성격을 가졌던 나는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머리가 있었지만 선뜻해볼 수 없었던 스타일이 있었다. 앞머리를 잘라서 이마를 가리고 싶었다. 지금 보면 일명 '뱅헤어'였다. 아니면 가리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앞머리를 잘라서 드라이를 하고 싶었다. 그게 멋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렇게 거울 앞에 더 오래 앉아 예뻐지고 싶은 욕망을 채우고 싶었던 거 같다. 그때는 그런 게 왜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 하지만 이 지글지글한 곱슬머리로 그런 머리를 소화하려다가는 체하는 법이었다. 예민한 사춘기 소녀의 간절한 희망사항에 한번 해보라며 권유할 법도 한데 어떤 원장님들도 나의 곱슬머리 앞에서 선뜻 권유하지 않으셨었으니까. 후한이 두려웠을까.

 "학생은 앞머리가 많이 곱슬이라 감당이 안될걸?"

혹은 어떤 원장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학생은 이마도 넓지 않은데 왜 가려?? 드러내는 게 훨~씬 이뻐."

라며 내 좁은 이마까지 들춰냈다.

 소심했던 나는 전문가들의 조언에 더 이상 뱅헤어는 워너비 헤어로 가질 수 없었다. 그런 말을 듣고 올 때면 방 거울 앞에 앉아 양 옆 앞머리를 반으로 접는 시늉을 하며 이마에 갖다 대고 가위를 들어 자를까 말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곱슬언니들은 '뱅헤어는 너에게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접어낸 머리칼 안에서도 유독 더 잘잘거려 이내 다시 풀러 주곤 했다. 그래, 네 멋대로 살아라.


  그 무렵 곱슬머리로 고통받는 이에게 단비 같은 미용기술이 있었으니 바로 소위 '매직펌'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스트레이트펌이라고 해서 긴 롯트로 말아서 약으로만 펴는 게 최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집게 같은 기계로 한 올 한 올 펴준다나? 16년 곱슬 인생에 돈 5만 원이 문제랴. 나도 이제 찰랑이는 생머리를 휘날리며 당시 나의 최애였던 HOT 오빠들을 만나러 갈 수 있겠다며 동네에서 매직시술을 가장 잘한다는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것일까? 가는 곳마다 만족도가 높지 않았다. 심지어 머리가 타서 다음날 또 간 적도 있었다. 그때 시술했던 원장이 죄 없는 내 곱슬머리를 쫙쫙 잡아당기며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난다.

"와, 나 이렇게 심한 곱슬은 처음 봤네."

아마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꽤 상처로 남았던 거 같다. 당신의 부족한 기술 탓을 하지 않고 애먼 곱슬머리 탓만 하다니. 

 나름대로 매직기술에 힘입어 굽슬거리는 머리컬들을 잠재우며 중학교를 마쳤다. 하지만 고등학교 3년이 또 남아있었다. 그 학교는 어깨에 닿지 않는 두발기장이 복장규정이었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랬던 거 같다. 요즘 중고등학생들 복장을 봤을 때는 그랬던 때가 정말 있었냐고 되묻고 싶을 정도로 그때는 그랬다. 소위 '선도부'가 담당 선도선생님과 교문 앞에서 치마길이부터 해서, 머리 길이, 화장 및 펌 여부 등의 복장 등을 엄격히 규제하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게 중요했었나 싶을 정도로 그랬다.

 그 학교 입학을 앞두고 이마에 성행 중이었던 미운 여드름보다도 나는 머리로 인한 고민이 더 컸던 거 같다. 그래도 학교 교복이 참 예뻤었기 때문에 찰랑한 머리로 앞머리를 예쁘게 말고 다니는 친구들이 그저 부럽기만 하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만약 그 머리에 새치까지 출현했었다면 매일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중고등학교 때는 긴 머리가 왜 그렇게 하고 싶었을까? 못하게 하니까 더 그랬던 걸까? 여자아이들은 너도나도 어떻게 하면 선도부에게 들키지 않고 머리를 조금이라도 더 길렀다가 자를 수 있을지 매일 교실 뒤편 거울에 모여 궁리를 하곤 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학교 이후 직장인을 지나 연애, 결혼, 출산 이후 지금까지 어깨를 넘겨 등까지 오는 긴 머리였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나는 단발머리를 더 많이 하고 다녔던 거 같다. 지금은 오히려 짧은 숏컷 단발을 유지한 지 2년째인데 말이다. 

 하지만 18살, 긴 머리에 대한 로망은 현실로 이뤄지고야 만다. 나에게도 '특권'이 주어졌던 것이다. 곱슬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특권, 긴 머리 허가증을 갖게 된 것이었다. 


 '타고난 곱슬기로 인하여 오히려 모발이 단정치 못 할 소지가 있을 경우는 모발을 길러 묶고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사실은 특권이라기보다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복장규정의 예외사항 중에 하나가 더 추가된 것뿐이었다. 무용이나  체육 등의 특기생의 경우 허용되었던 두발 자유는 특권이 맞았다. 하지만 '지독한 곱슬은 단정치 못 하니 그냥 묶고 다녀라'의 의미가 더 컸기에 실상 특권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근데 뭐, 아무렴은 어떤가? 세상에나, 머리를 기를 수 있다니! 그 길로 나는 교무실로 갔다. 마음 한편으로는 거절당할 수도 있겠다 혹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주변에 긴 머리허가증을 가진 아이들은 정말 정말 심한 곱슬머리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곱슬머리이긴 한데 그 정도면 깔끔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도 아주 조금은 있었다. 긴 머리허가증을 받는 순간 '너 곱슬 심하니 묶고 다녀라.' 즉 심한 곱슬임을 반증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애당초 필요 없던 것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긴 머리 허가증을 너무나도 쉽게 내어 주셨다. 나는 '지독한' 곱슬이었던 것이다.

 예외가 아니길 바라기도 했던 마음을 주섬주섬 짚어 넣고 돌아온 교실,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이 '긴 머리 허가증'에 관심을 보였다. 그 이후 곱슬머리로 힘들어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내 허가사례는 판례가 되었다. 덕분에 예외조항의 경계에 있던 몇몇 친구들도 면접을 보러 갔대나 뭐래나?? 그렇게 나는 그날로부터 졸업 때까지 예외자의 특권을 누렸다. 여전히 이마에는 빨간 여드름과 함께 그 곁에서 양 옆으로 자꾸만 뿔머리를 틀려고 하는 잔머리들을 실핀으로 진정시키느라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곤 했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 20여 년이 흘렀다. 그렇게 진저리 쳤던 곱슬머리가 쓸모 있을 때가 있긴 했구나 싶다. 가끔 그 시절 앨범을 본다. 지금은 안경을 안 쓰는데도 앳된 얼굴의 나를 알아보는 아들이 신기하긴 하다. 얼굴은 변했지만 부스스한 머리는 여전하다. 곱슬에도 나이가 들까? 아니 70살이 먹어도 징글거리는 곱슬은 여전히 곱슬거릴까? 조금은 힘이 빠져서 차분해질까? 그때 되면 여전히 Magic의 꿈을 꿀까? 아니면 아빠 말대로 파마값 안 들어 좋다며 피식 웃곤 할까?


 아직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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