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대한 거부, 폰 보기
어딘가로 이동할 때 휴대폰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준다. 우리는 휴대폰으로 딱히 용건이 없더라도 휴대폰을 한 번 들여다보고 캣옥, 인타넷, 인서타 순으로 한 바퀴 알람 유람을 하는 경험을 한다. 대부분 공감하는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되풀이하는 이러한 행위가 현실에 대한 무의식작 '거부'의 표시라는 점은 사뭇 놀라운 사실일 것이다. 대체 이 사소한 행위가 왜 거부의 표시인지 알아보자.
우리는 지각하도록 태어났다. 아이를 보자. 지하철에 타면 아이는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바깥이 휙휙 지나가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안내방송에 귀 기울이며 어디로 향하는지 생각해보기도 하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지금 주변 풍경이 새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이는 현재를 오롯이 느끼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양상이 변한다. 풍경들은 되풀이된다. 새로울 것이 없다. 그뿐인가? 어른들에게 쿠사리를 먹기도 한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냐고. 심지어 두리번거리다가 눈이 마주친 어느 불량해 보이는 친구에게 위협을 당하는 경험도 겪을 수 있다. 이런 경험들은 우리를 위축되게 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 주변에 펼쳐지는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휴대폰에 빠지게 된다. 거기서는 그런 불필요한 불편함들을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꾸지람을 겪거나 누구와 불편한 마찰을 겪을 때 느껴지는 그 불편한 감정, 슬픔, 내가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감정들을 길을 가는 순간에도 느끼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그런 경험들을 거부하고 휴대폰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사실은 그러한 경험이 우리가 겪을 필요가 있는 경험이었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어느 순간 다른 곳에서 그 일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무의식이 보이지 않게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그 경험으로, 감정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길을 가는 도중에 그 감정을 거부했다고 해서 그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상치 못했을 때 그런 경험과 그런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렇기에 이왕이면, 느낄 필요가 있는 감정은 우리가 여유로운 길 가는 때 느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경험과 감정에 대한 온전한 받아들임이다. 내 주변에서 펼쳐지는 일들이 나의 무의식의 발로임을 온전히 인정하는 행위이다. 휴대폰을 펼쳐 들고 거부하는 태도와는 정 반대의 태도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지하철 안에서도 뚝섬의 단풍과 롯데 타워, 한강의 전경이 펼쳐지지만 사람들은 그걸 보지 못한다. 이 또한 완벽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거부의 열매는 내가 겪을 것을 미루기에 달콤하지만 반대급부가 있어야 이런 풍경을 보는 호사도 경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