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닥터 온실

그날, 퇴근길 가을 하늘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노을빛이 비쳐 분홍색으로 물든 구름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저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급하게 뛰어왔다.
“저기! 기현, 잠깐만요…!”
직장 사람인가? 이제 직장에 다닌 지 꽤 된 터라 모르는 직원은 몇 없는 나였다. 그런데 저렇게 적극적으로 아는 척을 하는 모르는 직원이라니?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한 눈에도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누군데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나를 어떻게 아는 거지?
그녀는 숨을 고르다가 다소 당황한 나의 표정을 보더니 자기소개를 했다.
“미안, 아니 죄송해요. 저… 저는 이서연인데요…”
처음 보는 사람 치고는 다소 무례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자기소개였는데 어쨌건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도, 직장도, 연결점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때마침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어서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올 때 발동되는 나의 방어기제가 작동했고,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대게 그러면 몇 번 말을 더 걸다가 다른 타깃을 찾아 돌아서는 사람들을 몇 번 마주쳤던 경험이 있기에…. 그런 사람들 치곤 상당히 젊고 멀쩡하게 생긴 여자이긴 했지만 이미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저기 잠깐만….”
“…”
“잠깐만 저랑 얘기 좀 해요!”
신호등을 다 건너고 수십 발자국을 넘게 떼는 나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그녀. 무시에 익숙한 길거리 사이비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가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인가? 무심코 바라본 그녀의 생김새가, 묘한 익숙함이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가기 시작한다.
“저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음… 거기에 대해 얘기를 해 보고 싶은데….
“시간 없으니까 얼른 말해봐요.”
“저, 정말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얼마 뒤에 애인이 될 사람이거든… 요. 기현 씨하고….”
“...?!”
정말 들을 값어치가 없는 소리였다. 요즘에는 이런 새로운 수법까지…? 잰걸음으로 바뀐 나의 걸음 뒤에 그녀는 가만히 서 있는다. 더 이상은 따라오지 않네? 이 정도로 무시했으면 이제 떨어져 나간 거겠지. 허나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1…1월 15일! 핸드폰 번호는 26477402…! 동생은 김정현!”
나에 대해서 뒷조사라도 한 것인가?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이비가 아니라 스토커였잖아? 어디서 본 것 같은 것은 그동안 내 주위를 맴돌면서 스쳐 지나가서 그런가 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 여자를 그냥 돌려보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좋… 좋아하는 티비프로그램은 심슨. 어릴 때부터 일기를 계속 썼고 등 뒤에는 화상 자국이 있어!”
뭐지? 뒤이어 나오는 나에 대한 세부사항들은 놀랍게도 정확했다. 스토커라도 그 정도까지 알기는 힘들었을 텐데? 그녀에 대해 의심이 들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잠깐 시간을 내주세요.”
“알겠어. 근데 지금 한 말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그녀를 따라 들어간 근처 카페에서 그녀는 말한다.
“앞으로 8개월 뒤에 우리는 사귀게 돼요.”
“그걸 대체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아까 말한 걸로 부족한 모양이네요. 어디 보자… 나한테 이야기해 줬던 일화들을 들려줄게요.”
그녀가 들려준 나에 대한 과거는 소름 끼치도록 정확했다. 이건 스토커라고 해도 몇십 년 동안 나를 따라다니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이야기들까지 있었다. 어렸을 때 다쳐서 흉터가 났던 일이며 부모님에 대한 얘기, 집안 사정들… 정말 친밀한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던 나의 과거들을 그녀는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래. 좋아. 음. 아니 그래요. 그렇다고 치고, 그럼 왜 8개월이 아닌 지금 내 앞에 있게 된 거죠?”
“과거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요.”
“왜죠?”
“그건… 제가 과거로 돌아온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다른 것 보다 당신을 먼저 찾았어요. 그만큼 당신은 나한테 소중한 존재니까요.”
“일부러 시간을 돌린 건 아니군요.”
“네 맞아요. 저도 어떻게 이런 일이 저에게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저는 간절히 바랬고, 이 순간으로 오게 되었네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간절히 바랬다고 했다. 왜 시간을 돌리길 간절히 바랬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당장 나의 생각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진짜 나의 미래의 애인이 맞다면, 지금 애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이 되었다. 아니,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있는 문제인가? 과거로 돌아온다니…. 하지만 한낱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나의 애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다. 잠시 생각을 비우고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까도 느꼈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익숙하다.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좀….”
“네 그래요. 미안해요. 혼란스러울 텐데….”
“일단 지금 당장 뭔가 해야 하는 건 아니죠?”
“네 맞아요. 하지만 저는 기현 씨와 함께하기를 원해요.”

“… 생각이 정리되고 나면 연락드리죠.”
“네. 그럼 기다릴게요.”
그녀는 연락처를 주고 멀리서부터 왔다고 하며 차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우습게도, 아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핸드폰에는 이미 내 연락처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연락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혼란스럽다. 그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요?”
“그건… 저도 몰라요. 다만 제가 있던 때에서는 기현 씨와 사귀고 있었고… 그러니까 우리는 사귀어야 한다는 거죠!”
그녀와 레스토랑에서 두 번째 만남. 반신반의하는 나에게 그녀는 더 자세한 나의 하나하나까지 낱낱 하게 파 해쳐주었고 이제 나는 그녀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의문점들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그녀가 나의 미래의 애인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왜 나를 예정보다 일찍 만나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그녀에게 넌지시 떠 보지만 그녀는 이내 내가 흥미로워할 다른 주제로 질문의 답을 흐린다. 결국 그녀와의 대화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확실히 미래의 내 애인은 맞고, 그 뒤의 일은 그녀도 잘 모른다는 것뿐… 그녀의 확고한 태도 때문에 그녀의 말이 거짓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그녀는 나와 사귀기를 원하고 있었다.
첫 번째 만남에서와 달리 한껏 차려입은 그녀를 보고 새로운 감정을 느낀다. 익숙함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묘한 감정. 나는 갈등했다. 그럼 지금 잘 사귀고 있는 수진이는 어떻게 하고? 나는 이 갈등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서연이 나의 미래의 연인이 맞다고 해도 당장 아닌 것은 아닌 것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새로움이 없는 권태의 순간에 나타난 익숙하지만 또 새로운 자극은 나에게 버틸 수 없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알겠어요. 그럼 우리 만나보죠.”
“고마워요… 내 말을 믿어주는군요.”
“당신을 다 믿기는 힘들어요. 무엇보다, 당신은 나를 너무 잘 아는 것 같은데 전 아직 당신을 잘 몰라요. 우리 천천히 만나면서 서로를 알아가요. 아니 내가 당신을 알아야겠어요.”
“그럴게요….”
결국 나는 시나브로 서연과 만남의 횟수를 늘리게 된다.



서연과의 만남이 깊어질수록 수진에 대한 죄책감은 커져만 갔다. 또한 아무리 서로의 존재를 비밀에 부친다고 해도 결국에는 탄로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결국 사귀고 있던 수진과의 관계를 매듭짓기로 한다.

"우리 앞으로 그만하자."

"요즘 연락이 뜸하다 싶더니 이런 거였어?"

"미안. 혼자서 많이 생각해 봤어. 아무래도 나는 이렇게는 더 이상 만나기 힘들 것 같아."

"다른 여자 생겼니?"

"아니야. 그냥…. 힘들어. 요즘 너무 바쁜 거 너도 잘 알잖아. 연애 같은 거 할 여력이 없어."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수진과의 연애를 할 여력이 없었지. 이미 그 시간은 새로 들어온 서연의 차지가 되었으니까.

"…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쨌건 너는 내가 더 이상 좋지 않은 거잖아. 그럼 나도 더 이상 할 이유가 없네."

"…"

수진은 생각보다 담담하게 우리의 끝을 받아들였다. 서연의 말이 맞다면 예정보다 6개월은 일찍 헤어지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예정된 끝인 것처럼 수진과의 관계는 생각보다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며 서연과의 관계가 깊어져 갈 무렵 우리 집 문고리에 수진과 자주 가던 카페의 쿠키가 걸려있었다. 수진은 아직 나를 잊지 못했던 것이다. 서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지웠다가 다시 설치한 수진과의 데이트 어플에는 수진의 독백이 가득했다.

‘기현이 보고 싶다.’
‘네가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너의 이름을 되뇐다.’
나에게 연락할 용기가 없어서 혹시라도 내가 지우지 않았다면 볼 수 있는 어플에 적은 독백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깊어진 서연과의 관계에 수진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나는 새로운 관계로 수진을 잊어갔다.
서연과 연애를 하면서 그녀는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굉장히 궁금해했지만 그럴 때마다 서연은 과거에서 가져온 사건보다는 정보들로 대신 대답해 주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100일 기념일 때 무슨 일을 했는지 난 궁금했지만 그녀는 내가 어느 가게의 소고기 스테이크를 좋아했다던지 혹은 어떤 가수의 새 앨범을 좋아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쨌건 그 정보는 모두 맞는 정보였고 나 역시 그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함께 써 나가게 되었고, 2년간의 연애 끝에 그녀가 과거에 경험한 적 없었던 결혼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신혼여행을 온 첫날밤 호텔에서 와인을 마시며 그녀가 말했다.
“우리 이렇게 결혼하니까 꿈만 같아.”
“그래?”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그러게... 우리 인연이 이어지게 된 건 다 서연 너 덕분이야.”
“흑….”
갑자기 우는 그녀. 나는 그녀의 감정이 복받쳤음을 느낀다.
“즐거운 날 왜 울고 그래.”
“아니야… 너는 모를 거야.”
“…?”
“사실 나 말할 게 있어….”
“뭔데…?”
“내가 너에게 간 그날… 기억나?”
“어떻게 잊겠어. 신호등으로 뛰어오던 너의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 선한걸?”
“과거에서 사실… 우리는 헤어졌었어.”
“뭐라고?”
“…그래서 내가 과거로 온 것 같다. 나는 너와 다시 이어지길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랬는걸.”
“그게… 무슨 소리야? 헤어지다니?”
“너 나 만나기 전에 만나던 여자 있었지….”
“그걸 어떻게…?”
“그 여자한테 다시 돌아간다고 했었거든….”
“…”
서연을 처음 만났을 때 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그럼 나의 원래 인연은… 아니 원래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이것도 결국 나의 선택이 아닌가? 이 선택의 끝에는 결국 서연이 있는 것 아닌가? 나는 결국 울고 있는 서연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번에는 서연이 나의 연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