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소나기가 내렸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에 무더위도 한풀 꺾이는 한 여름의 오후, 그의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알람 소리에 낮잠에서 깬 그는 핸드폰을 확인한다.
<잘 지내?>
그녀였다. 헤어진 지 1년 만에 연락이 왔다. 흔한 성격차이, 권태. 그런 핑계로 그들은 헤어졌다. 그 뒤 6개월이 지난 시점에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지금 쯤이면 막 신혼이 지났겠지... 그런데 왜?’
일말의 궁금증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보다 남성적인 본능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유부녀에 대한 성적 본능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어떠한 힘에 이끌려 그녀에게 답장을 한다.
<잘 지내지. 어쩐 일이야?>
30분쯤 후일까. 답장이 왔다.
<할 말이 있어. 얼굴 좀 볼까?>
고민은 3초를 넘기지 않았다.
‘전 여자 친구가 가장 좋은 파트너라고 하던데...'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모를 문구가 그의 머릿속을 맴돈다. 그녀의 신분이 유부녀인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도덕성은 본능에 의해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저 안부를 묻기 위한 만남 일지 모른다는 일말의 외침만을 남겨둔 채...
‘내가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일까?’
시간이 흐르고 그는 다시 이성을 찾기 시작한다. 약속 시간과 장소를 잡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 속으로 녹아든다.
...
그와 그녀는 헤어진 지 1년 만에 다시 마주했다. 그녀는 이제 유부녀가 되었고, 그에게도 여자 친구가 생긴 때였다. 안부를 묻는 대화가 끝나고 커피가 절반 정도 남았을 때 그녀가 본론을 꺼냈다.
“너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어투는 부드러웠지만 태도는 확고했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에 휩싸인다. 그가 예상했던 하룻밤의 유희와 지금의 상황은 사뭇 달랐던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보다 더 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묻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는 약간 떨린다. 그녀는 재차 말한다.
“너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도대체 왜?’
그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유는 복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전부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의 조건을 이유로 내세운다. 실제로 그것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는 잘생겼고, 키도 훤칠했으며 고학력에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성격차이와 반복되는 권태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와 헤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때문에 그녀는 그와 헤어진 후 결혼을 서둘렀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남자는 많았다. 그녀는 남자들 중 하나를 골라 결혼했다. 그 남자로 그를 잊으려 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그는 그녀의 안에 있었고, 그녀는 그를 떨쳐낼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다시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부담을 줄 순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마침내 그녀는 결심했다. 그를 가질 수 없다면 그의 아이를 가지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직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 그는 부담을 느끼리라. 그녀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정을 빼고 그에게 말했다. 그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그의 두뇌가 냉철하게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 그래 왔듯이 그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의 끝에서 그는 긍정적인 답안을 도출해냈다.
단, 몇 가지 조건이 붙었다.
<첫째, 아이의 정체를 그녀의 배우자에게 밝히지 말 것>
아이와 그의 안전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둘째, 아이에게도 그의 정체를 밝히지 말 것>
아이가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마지막 조건이 그에게 중요했다.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1년에 한 번씩 아이 생일 때 아이의 사진을 보낼 것, 그리고 아이가 성인이 되는 해 우연을 가장해 아이와 한 번 만나게 할 것>
그의 욕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자신의 혈육을 힘들이지 않고 키우면서 노력의 결실을 확인하려는 그의 확고한 의지가 반영된 마지막 조항.
그는 단순히 자신의 혈육을 퍼뜨리기만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자손이 잘 자라고, 성인이 되었을 때 그가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과히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그 조건들을 수락했고 그날 밤 그 둘은 하나가 되었다.
...
10개월 뒤, 그는 그녀에게 사진을 받는다. 그 뒤로도 꼬박꼬박 사진이 왔다. 매월 5월은 그에게 의미 있는 날이었다. 매년 5월이면 그의 사진첩에 아이의 사진이 하나씩 채워졌다. 사진이 20개가 채워졌을 때, 그는 중년이 되었고 사진 속 아이는 스무 살의 꽃나운 처녀가 되어 있었다.
그 해 가을, 그녀는 그의 작품 전시회에 아이를 데리고 갔다. 그는 거기서 아이를 보았다. 아이,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성숙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모습. 아이는 그를 알지 못했지만 그는 아이를 알았다. 그녀가 잠시 아이 곁을 떠났을 때,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아이에게 그가 말을 걸었다.
아이는 그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작품에는 그의 무의식 속에 있는 아이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첫 만남에서 그는 아이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미리 준비한 다른 전시회 티켓을 건네며 아이를 다시 만날 기회를 만들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는 오지 않았다. 이제 아이가 그와 함께 할 따름이었다.
그의 지식은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고, 아이는 왠지 모를 익숙함에 그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전시회가 끝나고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그에게 다음 약속을 제안한다.
그날 밤, 아이는 새로운 형태의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
그와 아이가 세 번째 만났을 때, 그도 아이의 마음을 알아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당신을 향한 아이의 마음이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방치할 수 없었다. 이전의 그녀에게는 본능이 압승했지만 이번에는 냉철한 이성이 본능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아이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다음에 또 보고 싶어요>
세 번째 만남이 끝난 후에도 아이의 연락은 계속되었고, 그는 결단을 내린다.
<그래>
그와 그녀가 재회했을 때처럼 소나기가 내리던 날, 그와 아이가 네 번째 만남을 갖는다. 그는 아이에게 진실을 말한다.
다음날, 그녀에게서 연락이 온다.
<아이가 쪽지 한 장을 남기고 남기고 사라졌어>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제 사랑이란 걸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