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슨한 빌리지 Jan 06. 2018

4. 당연한 것과 시스템 밖의 이방인들

배명훈, <첫숨>

*느빌의 책방에서는 "전쟁"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시스템-개인"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첫숨>은 앞으로 이어질 "시스템-개인" 3부작 중 첫 텍스트입니다.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책을 읽지 않으신 분은 꼭 뒤로 가기를!





결국 세계 전체를 객관적으로 볼 순 없다.
리얼리즘을 추구한다고 해도 현실은 결국 추출되는 것이다.
- 배명훈



첫숨(2015)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시작은 지난 책부터


누구에게나 군번줄은 하나만 부여된다. 사병도, 장교도, 여자도, 남자도.


지난 오프라인 모임에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이하 전쟁은 여자의~)>를 읽었다. 전쟁에 참전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전쟁은 여자의~>을 보면서, 여태껏 남성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던 전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남성들과 전우로 참전한 여성들은 세상에서 지워졌다. 전 후에 참전 용사라는 명예는 남성들이 가져간 반면에 여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다시 '여자'로 살아가도록 강요받는 현실이었다.



전장으로 여성들(혹은 자원입대한 어린 남성들)을 이끈 동기는 개개인의 이야기마다 다르다. 그렇지만 꽤 많은 인터뷰에서 조국을 위해서, 나의 땅, 나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입대했다는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이 동기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터뷰이들이 참전하던 그때의 소련에서는 전체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바치는 것이 맞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십 년 후 다른 나라에서 쓰여 번역된 책을 읽는 우리의 감각으로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결과론적으로는 그들이 지킨 조국이 그들에게 돌려준 것은 전쟁의 상흔과 주입된 여성으로의 젠더였으니 말이다. 자신의 참전 동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말 끝에 덧붙이는 한 마디.


그땐 다 그랬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했지.



라고 말하는 것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 그땐 다 그런 것, 당연한 것은 누가 만드나



지난 발제 <제5도살장>, <그을린 사랑>을 거치면서 우리는 전쟁에 대한 많은 논의를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 가운데서 전쟁의 기록은 보편적이거나 일률적일 수 없다. 대신에 파편적이고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한 예로 <제5도살장>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전쟁이 어떤 이유로 발발했고 어떤 양상으로 흘러가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하나의 전쟁 상해자로서 그저 생존의 서사를 그린다는 코멘트가 있었다. 전쟁 속의 개인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경험할 뿐, 이념 대립이나 종교분쟁과 같은 거대한 맥락은 볼 수 없다. 그저 효율적으로 승리를 위해 소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전하는 개인들도 모르는 큰 맥락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지도자인가, 이데올로기인가 그도 아니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이를테면 간절히 기도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는...) 큰 힘이 있는 것일까. 그 정체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쟁에 직접 몸으로 참가하는 일개 병사들은 알 수가 없다. 체스를 둘 때 우리는 판 전체를 읽으며 말을 움직인다. 말하자면 큰 맥락은 체스를 두는 사람의 시선으로 전쟁을 보고, <전쟁은 여자의~> 같은 전쟁기록물들은 체스 말들의 목소리인 것이다.



이처럼 개인은 보이지 않는 명령. 즉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다.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회라는 틀 안에서 규범을 지키며 체계에 순응한다. 이를테면 <전쟁은 여자의~>의 많은 참전 용사들은 전쟁이 끝나고 여성으로 돌아오라는(사회에서 요구하는 성역할) 압박을 받았고, 자신들의 입을 함구하는 방식으로 순응했던 것처럼. 그들은 그런 행동이 시스템에 위배되지 않는, 다시 말해 사회에 위해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인식해온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을 존속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지워져 버렸다. 다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시스템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개인을 위해 시스템이 존재하는가. 시스템을 위해 개인이 존재하는가. 나는 이번 발제에서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스탠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 첫숨의 구조 



이번에 발제하는 책은 한국의 SF 작가 배명훈의 <첫숨>이다. <첫숨>은 화성출신 사람들의 자본으로 만든 스페이스 콜로니 '첫숨'으로 쫓겨난 지구의 보안담당자 출신 내부고발자 최신학과 달 기지 철수 이후 스카웃을 받아 첫숨에 살게 된 무용수 한묵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삼각형 바깥에 있는 인물들을 주목하라



책은 최신학의 시선으로 추리 소설처럼 첫 숨의 비밀을 파헤쳐 나가는 큰 플롯을 갖는다. 작중에서 주인공 최신학의 직업은 '보안담당자'이다. 그의 신분증은 첫숨의 거의 모든 기관 및 공간을 드날 수 있는 프리패스의 힘을 갖는다. 그에게 보안담당자라는 직함을 주고 첫숨으로 데려온 것이 유지이자 실권자인 송영 위원이기 때문이다. 최신학은 명시되어 있지 않은 송영의 지령을 알아듣고 일을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실질적인 콜로니의 지배자 송영은 적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체스를 두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 첫숨의 거주민에 한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자리를 박탈할 수도(중재원의 심동완이 파견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진다거나, 최신학이 사는 아파트에 살던 전 세입자 등), 급하게 자리를 만들어낼 수도 (최신학의 위치), 사람들 모르게 큰 그림을 그리고 실행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시스템을 조종하고 때로는 콜로니 안의 구성을(사람, 건물, 중력 제어 등) 통제하는 권력자인 셈이다. 그리고 그 권력을 첫숨의 거주민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게 잘 이용한다.



첫숨에는 화성인(3분의 1 네이티브)들이 암묵적인 지배계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 거주민들에게 지배자로 앞에 나서지 않는다. 신학이 만난 옆집 아이의 이야기처럼, 서민들은 알 수 없는 이를테면 날씨 같은 정보를 통해 드레스코드를 구축한다. 유행과는 다른 그들만의 상징 권력을 구축해 가는 것이다. 이는 걸음걸이나 화성 예절 등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교묘한 방식으로 그들만의 다른 세상(말하자면 상류사회?)을 구축해간다.



# 시스템 바깥에 위치한 최신학과 한묵희를 선택한 이유?



그렇다면 송영은 비서실장 장목은과 비서실을 내버려두고 최신학을 선택한 것일까? 이는 최신학의 출신성분 때문이다. 그는 지구에서 '쫓겨난 내부고발자'다. 첫숨 거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구인이라는 점에서 출신성분을 평범하게 볼 수도 있지만, 그는 내부고발 이슈로 추방된 인물이다. 다시 말해 지구의 시스템을 전복한, 시스템의 통제를 거부한 인물로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시스템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에 반해 장목은은 첫숨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화성인의 견고한 체계가 흔들리지 않게 불안요소는 감시/제거하고 송영과 반씨 일가의 비서처럼 사용된다. 그렇기에 송영은 시스템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인물을 선택한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반지업이 스카웃한 한묵희도 시스템 밖의 이방인이다. 6분의 1 네이티브라는 출신성분이 그녀를 특별하게 만든다.



시스템 밖에 있는 사람들의 감각은 시스템 안에 순응하는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이방인에겐 당연하지 않다. 개인의 감각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새 시스템 앞에서 적응해가지만 지구인 출신 무용수가 6분의 1 네이티브가 될 수 없듯이 이방인은 해당 시스템에서 나고 자란 네이티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스템에 없는 것, 이전의 데이터로는 카테고리화 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감각도 다르다.



결국 송영이 첫숨의 상당 부분을 포기해가면서 지키려 했던 것, <삼면 고래>는 시스템 밖의 존재이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똑같은 외계 생물체(<제5도살장>의 트랄파마도어인들의 시간 감각,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헵타포드 네이티브들의 모습(칠발이) 등을 기억해보자. 다른 텍스트에 나오는 외계인 친구들은 비슷한 특징을 갖는다. 어느 쪽에서 봐도 상관이 없다는 것.)는 이전까지 인간이(화성인이든 지구인이든) 습득해온 지식, 경험밖에 위치한다. 즉 비슷한 것을 찾을 수조차 없는 완전한 이방인인 것이다. 만약 첫숨의 시스템에 최적화된 사람이 삼면 고래를 발견하는 일을 맡았다면 이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이물질은 제거하는 것이 체제의 안정을 불러오고, 체제의 안정은 구성원의 안녕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삶. 그에 대한 달 무용수들의 해법이 관성이고 화성인들의 해법이 첫숨이라면, 지구인들의 해법은 바로 일면이었을 것이다. 단 하나의 얼굴만 가지고 있어서 옆에서 일어나는 일은 곁눈질을 해야 하고 뒤에서 벌어진 일은 아예 까맣게 모르고 살아가도록 정해진 삶.(p 415~416.)


그러나 시스템 바깥의 감각을 가진 최신학과 한묵희는 같은 상황에도 다르게 볼 수 있다. 설명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들에게는 첫숨의 안녕보다 개인의 입지(최신학 - 지구에서 추방되고 갈 곳이 없는 존재)와 개인의 목적(한묵희 - 달과 관련된 목적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화성의 은인 개념으로 등장하는 나모린이 한묵희에게 주문한 미션은 중간에 그쳐버리고, 최신학이 제안한 미션은 <삼면 고래>에 닿을 수 있던 것이 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나모린의 경우는 맞숨에 무기가 있는지 여부가 자신의 첫숨 생활에 위험요소가 되기 때문에 시스템에 최적화된 인물로 보았다)



# 다시 <첫 숨>



또한, 나모린의 사무실에 있는 고래 그림, '첫숨'에 관한 고찰도 의미 있는 지점이다. 첫 숨이 먼저인가 생명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는 추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개인과 시스템에 대한 비유로 볼 수 있다.


그 존재는 바로 새끼 고래였다. 갓 태어난 작은 고래. 어미의 넓은 등에 얹혀 맨 처음 수면 밖으로 숨 구멍을 내민 어린 생명. 다른 존재의 등에 업혀 자기 등에 있는 숨 구멍을 통해 맨 처음 하늘 맛을 보는 순간.
그림의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 숨'이었다.(p.165.)


고래는 생명을 유지기 위해 숨을 쉰다. 그리고 숨을 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수면으로 향해야 한다. 수면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고래의 행동은 제한된다. 마찬가지로 시스템은 개인이 잘 살 수 있도록(생존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시스템이 잘 돌아갈 수 있게 개인은 규범 등으로 행동이 제한된다. 다시 한번 위에서 쓴 명제를 생각해보자.



개인을 위해 시스템이 존재하는가. 시스템을 위해 개인이 존재하는가. 작가 배명훈은 질문을 던진다. 지금 내가 속한 이 곳의 당연한 것들은 정말로 당연한 것일까. 이방인의 시선(최신학, 한묵희 더 큰 틀에서 보면 종이 다른 삼면고래)에서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하며 넌지시 독자들에게 체제 속의 개인의 스탠스에 대해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답은 없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릴 수도 있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둘 다 맞거나 둘 다 틀릴 수도 있겠다. 다만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스탠스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






치-명적인 발제문




매거진의 이전글 3-1.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뒷담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