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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Mar 10. 2018

16. 이 미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법

손원평의 <서른의 반격>이 말하는 정말, 진짜, 반격

*느빌의 책방에서는 "디스토피아"라는 키워드에 이어 "반격"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서른의 반격>은 "반격" 3부작 중 첫 번째 텍스트입니다.


# 디스토피아, 그리고 반격 


‘디스토피아’라는 키워드로 읽었던 세 작품 <꿈의 궁전>, <회색인간>,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에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어떤 세계의 시스템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복역하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극단적인 가상의 사회를 그린 작품들이지만 우린 그 속에서 현실과 닮은 점들을 찾아내고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 작품들은 은연중에 나에게도 내재되어 있을 부정적인 모습들을 찔렀다. 예컨대 <꿈의 궁전> 속 안정적인 직업을 얻었다고 안심하는 주인공의 속물성, <회색인간>의 어떤 장면처럼 나의 안위만을 본능적으로 우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속 대의(기술의 발전 혹은 권력 유지)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정당화하는 모습들이 그랬다.  


그런데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건드려 준 우리 안에 내재된 못난 모습들은 정말 평범하게 만연해 있다. 못난 모습이 ‘평범하게 만연해있다’고 표현했는데, 과연 그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평범함인지, 혹은 만연해 있어서 평범해진 건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기적이고, 크고 작은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모습을 점점 더 공고하게 만들어 평범의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 자체가 사회화되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비합리적인 시스템에 손을 댈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혹은 그럴 힘도 부재한 디스토피아의 개개인들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어쩌면, 애 안 낳아본 것들이랑은 말이 안 통한다는 그녀의 입버릇에조차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진심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그녀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시스템이 문제일 수도 있다. 입바른 말 한번 했다가 미운털이 박히고, 궂은일을 맡게 되고 견딜 수 없게 되고 밥줄이 끊긴다. (72쪽)


이전 발제문을 쓴 동석은 디스토피아 소설이 극단의 상황을 미리 상상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옳지 못한 선택지를 하나씩 지울 수 있게 도와준다고 했다. 우리는 어떤 선택지를 가지고 있고 무엇을 지워가야 할까. 이제 다시 현재와 현실을 생각해볼 때이다.


위의 문장처럼 개개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그래서 평범하게 무력한 개인들을 정상의 상태로 규정하고 만들어가는 시스템의 문제를 대놓고 까보는 시간이 필요한 때이다. 또한, 이미 도래한 디스토피아적 상황들에서 ‘반격’이 가능하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런저런 물음표들로 <서른의 반격>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 정말, 진짜, 반격 

손원평, 서른의 반격

이 소설의 제목은 세 차례 바뀌었다고 한다. ‘보통사람들’에서 ‘1988년생’으로 그리고 ‘서른의 반격’으로. 내용과의 연관성은 차치하고, 이전 제목들보다는 임팩트 있는 ‘반격’을 내세워서 일까. 나는 제목에서 이미 ‘반격’을 명명했으므로 이에 대한 기대를 하며 책을 골랐다. 그리고 이제 주인공들이 어떤 속 시원한 반격을 할까를 고대하며 소설을 읽어나갔다.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건만 여전히 스스로가 실망스러운, 겨우 이런 서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지혜가 규옥을 만난 순간부터 그런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규옥은 자신의 원고를 가로챈 교수의 강연에서 당당하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으며 무언가 목표가 있는 듯한 느낌으로 DM아카데미의 인턴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규옥이 지혜에게 우쿨렐레 강연을 듣자고 하고, 거기서 만나게 된 이들과 모종의 일들을 꾸미게 되며 나는 이들이 가하는 균열의 단계가 점점 높고 정교해질 것이라 예상했다. 초반에 이루어진 김부장에 대한 장난스러운 복수는 결과적으로 김부장의 무례한 행동에 제지를 가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고 통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반격들이 점점 더 진행될수록, 결과적으로 어떤 의미 있는 균열이 이루어진 것일까 하는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이들의 소심한 복수는 해프닝으로 그치고, 갑은 여전히 갑이고, 을도 그대로 을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답답하게 소설을 읽다가, 규옥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질걸요?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죠. 내가 말하는 전복은 그런 겁니다. 내가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 그런 가치의 전복이요.” (68쪽)

어쩌면 나 또한 은연중에 이들의 소소한 복수들에 한 발짝 거리를 두며, 변화시킬 수 없다면 가만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다시 이들의 행동을 되짚어 보자, 애초에 이들의 작은 복수의 목적이 완벽한 문제 해결은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상대는 이미 쉽게 무너트릴 수 없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이고, 대항하는 이들은 생활적인 무력감과 외로움에 허우적대는 작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작고 소심한 이들의 복수는 자신의 존재 조차 부정당했던 이들이 함께 모여 어떤 방식으로든 소리친 ‘나 여기 있어!’라는 외침이기도 했다. 혹시 사회의 시스템은 “그냥 그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반격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균열은 균열 그 자체로 의미 있다는 것”을 자꾸만 잊게 만드는 건 아닐까.


간간이 등장하는 규옥의 말들은 ‘반격’이 누구에 대항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만을 상상하는 나의 나태한 상상력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야말로 반격의 성공 가능성만을 따지는 보수화된 마음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쩌면 최근의 미투 운동 이슈들에서도 읽히듯, 언제나 약자가 억울함을 토로하는 일이 다른 원인이나 목표가 숨겨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피해자의 고백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야말로 보수적인 사회화 과정을 거친 모습은 아닐까. 


그런가 하면 진정한 악의 축이라 믿었던 김부장에게 부끄러움을 알게 했다며 기뻐했으나 결국 그도 갑들에게 무릎 꿇어야 했던 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후부터 지혜에게는 심경 변화가 이루어진다. 지혜는 김부장이 퇴사하면서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등업을 한 것에 대한 마음에 애매한 부채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싶었던 DM그룹의 수직적인 구조, 사원들을 소모품으로 인식하는 구조에 환멸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토록 원했던 DM그룹 정직원이 된 지혜는 사직서를 내고, 성실하고 무난한 사람을 찾고 있던 조금 특이한 회사 ‘휴’에도 입사 취소 문자를 보낸다.  


가볍게 장난스러운 반격들로 시작한 이들의 행동들은 어느새 점점 더 복잡한 단계로 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독자들이 보기에 그 과정과 심리 변화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도 들지만 말이다.



# 나는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느빌에서는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를 ‘시스템-개인’이라는 키워드로 다뤘던 바 있다. <아몬드>에서 작가는 감정을 모르는 소년 윤재가 친구를 만나고, 감정을 배우게 되는 과정을 그리며 당연시 여겨온 감정이나 규칙에 대한 의문을 제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설은 역설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가 노력하고 성장하면서 결국은 어떻게든 배워야 하는 감정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한다. 타인의 아픔을 알아채는 것,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대신 아파할 수 있는 것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리고 윤재와 나이차가 약 12살 정도 차이 나는 서른 살의 지혜는 이제 사회생활을 하고,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를 겪게 될 어른들이 잊어버리면 안 될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지혜, 규옥, 지환 등의 인물은 어쨌거나 불가피하게 어떤 조직에 포함되어 노동을 해야 하며, 취업이라는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다.


결국 작가는 결말에서도 어떤 회사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는 규옥과 지혜의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사회생활을 하게 될 회사원으로서 어떤 마음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부끄러움’, 그리고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는 능력’이다.  


규옥을 중심으로 모인 을들의 사연은 억울하고 슬프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각자의 이야기를 하다가 이것이 슬퍼할 일이 아니라 분노해야 할 일임을 깨닫는다. 소설 속 익명의 제보자들로부터 시작되는 고발과 고백들은 재벌가를 폭로함으로써 분노한 을들의 유의미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최근 드러나고 있는 만연한 폭력적 상황들과도 유사하다.  


최근의 사건들에서도 나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마땅한 곳에서 발휘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절실히 느낀다. 물꼬를 튼 고백들은 여전히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데 필요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오히려 피해자들의 입막음에 활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동시에 잘못 쓰인 ‘부끄러움’과 ‘분노’는 다시 가해자의 명예훼손이나 무고죄 역고소에도 활용되고, 정치 공작이니 더 큰 사안에 집중하라느니 하는 말들도 가능하게 만든다.


“그랬군요. 그런데 사실 난 가끔 궁금해요. 우리가 욕하고 한심하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입장에 놓였을 때 나는 그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비판하는 건 쉬워요.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 상식을 잣대 삼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이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순간에 놓이면 존엄성과 도덕, 상식을 지키는 건 소수의 몫이 돼요. 내가 그런 환경과 역사를 통과했다면 똑같이 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결국 뭔가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적어도 내 몫을 위해서만 싸우지는 않겠다고 자꾸자꾸 다짐하는 노력이요. 마음에 기름이 끼면 끝이니까. 정답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요. 더 나은 어떤 것을 향해 차츰 다가가고 있기만을 바랄 뿐이죠.” (80-81쪽)


규옥의 말대로 마음에 기름이 끼면 부끄러움과 분노를 엄한 데 활용하게 된다. 내 몫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나의 보호막 뒤에 숨는 것을 자연스레 여기고 뭔가 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열심히 2차 가해에 복역하는 위치에 있게 될 수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 ‘뭔가 다른 노력’이라 함은 사회생활을 잘하고 커리어를 성장시키기 위해 하는, 나를 소모시켜 무엇을 이뤄내는 그런 노오력이 아니다. 실패하건 성공하건 그런 여부에 상관없이 뭔가를 실행해보는 노력(느빌이라던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가벼운 폭력적 언행이나 농담에 반격을 가해보는 노력(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기) 같은, 나의 마음을 나쁜 기름들로부터 지켜내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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