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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Mar 19. 2018

17-1. <바보들의 결탁> 뒷담화

* <느빌>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록합니다.

* 발제문과 뒷담화는 전담 에디터 없이 돌아가며 작성합니다.

* 이 뒷담화는 <서른의 반격>에 이어 작성된 '반격' 키워드의 두번째 텍스트입니다.


*이번 모임엔 동석, 박루저, 다희, 이주,  해정, 최생, 연연 님이 참여했습니다.

*본 녹취록은 이전 게시글인 '발제문'을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참고 링크 : <바보들의 결탁> 발제문


들어가기에 앞서, 이번 발제에는 아쉽게도 책을 다 읽지 못한 채 참석한 이들이 더 많았다.

책을 다 읽은 사람은 발제자 연연, 최생, 박루저 뿐이었다.

...



1. <바보들의 결탁>은 전무후무한 코미디 소설?


연연 : 발제문에 줄거리를 친절히 요약하고 배경도 쓰고 노력했습니다. 이 책을 선정하게 된 계기는 믿고 읽어온 이동진 평론가의 추천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 나가니 정말 힘들었어요.(눙물) 나름 재미있게 읽히기는 하는데 개인적으로 캐릭터에 애정이 안 가서인지 더 읽기 힘들더군요. 그런데 계속 읽어나가게 하는 힘은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게 필력이겠죠? 필력이 좋아서 계속 읽게는 되더라고요. 만일 제가 여유가 있었다면 더 재밌게 읽었을 것 같아요.


또 읽기 힘들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작품 자체가 굉장히 사회와 닿아 있어서, '뉴올리언스'라는 배경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꽤 될 것 같았어요. 그리고 원어민이 영어로만 알 수 있는 언어유희들이 많은 편인 것 같아요. 수 없이 많은 각주들을 보면서 옮긴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느껴지기도 했고요. 마지막에 실린 옮긴이의 해석을 보면 이 소설은 전무후무한 소설이고, 이렇게까지 뭐라 말할 수 없는 소설이 있을까 라고 썼더라고요. 그 표현에 공감하기도 하면서, 기존 코미디 장르의 소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혹시 코미디 장르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박루저 : 저는 뭔가 이러한 서사와 표현 방식들이 익숙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아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와도 비슷하게 느껴져서 낯설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전형적인 미국식 코미디 소설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연연 : 저는 익숙하지 않았고. 굳이 꼽자면 <돈키호테>와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그가 자본주의 사회로 가더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했어요. 작품 읽는 내내 반격을 언제 하나 싶었어요. 공장 노동자들의 현실에 들어가서 체제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론적인 지형을 알고 있는 사람이 같이 궐기를 준비해서 무언가를 하나보다 생각했는데, 그 조차 코미디가 된 것이 아쉬웠어요. <무정>처럼 너희를 계몽시킬 테니 나를 따르라. 같은 느낌이고요. 전혀 노동자는 공감 못하는, 그런 한계가 생긴 것 같아요. 어쩌면 이런 면들이 지식인에 대한 조롱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최생 : 저는 아주 재밌었어요. 이런 주인공을 내세운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만약 작품 자체가 코믹하게 나가더라도 이러한 인물을 대표적으로 내세운 것은 독보적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만큼 인물을 독창적으로 사용한 작품인 것 같아요. 특히 여자친구를 히피스타일로 자유를 추구하는 매우 전형적인 인물로 그릴 수도 있는데, 자조적인 성향을 더했다는 것이 독특했어요. 이처럼 인물들에게 이상한 매력이 있더라고요. 극혐인데 계속 보게 되고. 그래서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연연 : 시대적인 감각에서 오는 불편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런데 주인공의 처지가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에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어요. '머나'도 재밌었던 것이 심리를 섹스나 프로이트적인 기호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인데요. 그런 것도 너무 공감이 가고 현실에도 있을법한 설정이었어요.


박루저 : 작가가 정말 잘 쓴다고 느꼈던 소설이에요. 작가의 상상력이나 인물에게 부여한 독창적인 성격이 아주 좋았어요.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보였어요. 특히 소설 속 인물들이 하는 생각을 한 페이지 두 페이지씩 길게 끌고 가는 데도 재밌었어요. 굉장히 매력적인 필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1961년이라는 분위기를 아는 사람이 읽으면 더 재밌었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 읽으니까 약간 불편한 것들은 있긴 하지만요.


다만 발제문에서 현재의 시점에서 한국 상황들과 비교 분석해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주인공이 한국의 지식인들과 아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인데요. 허레허식과 엘리트주의로 똘똘 차있고,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의 얘기를 늘 한다는 점에서요. 한편으로는, 냉정시대의 소련을 은유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구요. 무튼 당시에 내가 읽었으면 정말 좋았을 것 같아요. 왜 매니아층이 생겼을지도 짐작이 가고요.


연연 : 한국 상황과의 비교.. 개인적으로 저는 인물로만 대입이 되더라고요. 발제에 언급했지만 주인공은 고학력자 석사이자 백수이고 인문학 전공자이죠. 그런 희화화가 여전히 한국에서도 가능할 것 같고요. 당시의 히피족은 자유 운동을 하는 젊은이로 생각해볼 수 있겠고. 자본가로 나오는 리바이 팬츠사의 부인이 일하고 있지만 퇴직하고 싶어 하는 나이든 여성을 보고, 일할 때가 가장 아름다워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고연령의 여성이 노동하는 것을 보면서 감동하고 뒤에 가서는 태도를 바꾸는 모습이 드러나는 모순적인 장면이죠. 어쩌면 작가는 모든 위치에 있는 인물들의 위선을 위악적으로 나타낸 것 같아요.



2. 읽지 못한 자들의 궁금증 TIME


해정 : 책은 읽지 못했지만, 코미디 하면 떠오르는 것이 <창문 너머 도망친 100세 노인>이에요. 오래전에 읽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그 소설의 서술방식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주인공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기 어렵고 또 회의적이게 되어서 도리어 코믹하게, 농담처럼 읽을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작가 시점을 코미디라는 장르가 활용하는 이유는 독자들이 주인공이 조금 우습게 여기고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어서인 것 같은데, 이 소설은 왜 일인칭인지 궁금했어요.


최생,박루저 : 전지적 작가 시점이에요..! 음 그리고 계속 시점이 바뀌어요.


해정 : 아하! (벌 받는 토끼 이모티콘)


연연 : 이 소설은 공간을 중심으로 서사를 따라가는 것이 더 이해하기 좋을 것 같아요. 리바이 팬츠 회사, 노점상, 등등 공간으로 이해하고 그게 어떻게 엮여 있는지를 읽는 게 더 수월할 것 같고요. 소동들이 하나의 사건에 수렴하는 것도 아니까요. 


이주 : 평을 읽어봤을 때 굉장히 현재와 연관시킬 점들이 많을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실제 책으로 읽었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는지 궁금해요.


연연 : 모든 인물이 살아있다고 느껴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이 약간 전형적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시트콤 보면 각자 맡는 역할들이 있잖아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맡고 있는 역할들을 그려낸 것 같고, 그 틀이 있는 한 도식화되어서 현재 인물들과도 맞춰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박루저 : 간혹 다큐멘터리를 보면 파탄된 가정들을 다루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땐 너무 안타깝고 뭔가 특이하게 느껴지는데, 어쩌면 그런 가정 하나하나가 모여 있는 것이 현대사회인 것이잖아요. 동정하면서 거리를 두게 됨으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반면 이 책은 그들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살짝 웃기게 보여주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어요. 연민화하지 않고. 그러니까, 다큐 형식처럼 한 명을 쭉 조명하는 건 맞는데, 그 그려내는 방식은 시트콤인 거죠.


이주 : 그런데 왜 이렇게 길까요..


연연 : 그러게요... 만약 제가 편집자였다면 분량을 분명 줄였을 것 같아요.


박루저 : 작품이 더 길게 느껴지는 이유가 크게는 사건 세 개가 나오는데 이것이 발전되거나 끝나지 않고 시덥잖게 끝나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마지막에 결국은 정신병원에 가는 결말이 긴 분량을 참고 읽은 입장에서는 굉장히 아쉽더라고요.


최생 : 절대로 줄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동들과 이 인물을 모두 작품에 필요하다고요!


다희 : 어떻게 보면 지난 책 <서른의 반격>에서도 소동들이 이어졌는데, 이 책도 비슷한 것 같아요.


박루저 : 컬트스럽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제 안된 듯이 마구 써갈겨놨는데도 정말 잘 써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죠. 순서도 모르고 싸질러놓은 글에서 오는 컬트한 감성이 있는 것 같아요. 한국 작가로는 정유정, 천명관이 떠올랐어요. 정유정은 유쾌하게 한방을 먹이는 걸로 끝나고, 천명관은 그냥 일상으로 끝나는 차이가 있지만요. 작가가 매력적인 스토리를 마구 풀어 나가는 게 비슷했어요. 오히려 <바보들의 결탁>에서도 그렇고 <서른의 반격>에서도 그렇고 반격에 성공하는 순간 동화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해정 : 소동인 이유는 '바보들의 결탁'이기에 그렇지 않을까요? 제목에 충실하게, 자신까지 포함해서 당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굉장히 바보스러웠기에 이런 작품을 쓴 것 같아요. 그 ‘바보’라는 지칭은 일말의 애정이 담겨있는 것이거나 혹은 완전히 냉소적인 걸 수도 있겠지만요.



3. 정말 반격은 이루어졌는가


연연 : 그런가 하면 저는 권력을 이미 가진 자로서 이그네이셔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궐기 자체를 정말로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로 찍는 느낌이었어요.

 

박루저 : 궐기가 목표가 아니라 머나라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하는 것 아닐까요. 우스꽝스러운 창작을 하는 과정이죠. 머나에게 편지로 쓸 때는 고급진 언어로 풀어쓰잖아요. 게다가 부조리를 고발하고 싶은 것도 지적 허영심, 자아도취 형태로 하기에 이 사람을 보면서 반격이라고 느낄 여지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진지하게 하는데 웃긴 것이 아니라, 주인공도 스스로 입 발린 소리를 하면서 자신이 풀어내는 글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아요. 밖에서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데 그것을 포장하는 언어는 혁명스러운 언어로 포장하죠. 때문에 현실적인 반격이 아니라 미학이라고 느껴지는 것 같아요. 보여주기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것으로.


연연 : 엄마가 정신병원으로 보내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정신병원에서 머나가 이그네이셔스를 끌고 나와서 끝나요. 뭐지 싶으면서도 코미디 었으니까 이해했어요. 그런데 끝에 정신병원으로 가게 만드는 것이 급 동정심을 유발해요. 정말 현실과 제도에서 떨어진 인물 같았는데, 정신병동에 묶이는 순간 자본주의나 사회 질서 안에서는 '미친 자'가 되니까요.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현실로 와버린 느낌이었어요.


박루저 : 머나는 주인공에게 왜 그렇게 사냐라고 말해요. 나는 강연도 하고, 이러이러한 것들도 한다고 말하면서요. 그런데 그 상황을 주인공 입장에서 안 보여 주기에 독자 입장에서는 머나가 현실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이그네이셔스는 동떨어진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되어요. 그런데 머나와 이그네이셔스가 결국에는 만나니까 현실과 포섭되는 느낌이었어요. 성욕이 없는 사람으로 그려지다가 마지막에 머나와 키스하면서 끝나잖아요.


해정 : 어쩌면 자본주의를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에서 주인공은 욕망을 금기시하는 사람이잖아요. 자본주의와 싸우는 방식이 곧 자본주의적 욕망을 절제하고 금기하는 것이었는데, 한편으론 그것이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욕망은 분명 자본주의와 조응하지만 어떤 욕망은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라고도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은 갇혀있던 스스로를 열어젖힌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요.


다희 : 발제문에 가장 중요한 문장으로 인용한 문장은 왜 인용하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희망적으로 살아가는 것’ 따위 사양합니다. 낙관주의는 딱 질색입니다. 그거 아주 변태적인 거라니까요. 인류가 타락한 이후로 이 우주에서 인류에게 주어진 마땅한 위상은 바로 참담한 고통이란 말입니다.”
“난 고통스럽지 않아.”
“아니, 그렇습니다.”


연연 : 바보들이 결탁한다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읽혔는데요. 이그네이셔스가 바보이기도 하고 이그네이셔스가 천재고 세계 전체가 바보라는 말로요. 이미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낙관주의에 대해서 질색하면서 이것이야말로 고통을 배가시키는 요인이다 하고 말하는 것이 결탁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비관적 태도야 말로 우리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결탁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고요.


박루저 : 이런 소설이 가치는 그런 게 아닐까요. 최근 읽은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에 '비관은 쉽고 낙관은 어렵다'는 표현이 나와요. 그런데 저는 반대로 생각하거든요. 긍정 이데올로기보다, 삐딱한 비관이 훨씬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꾸 '넌 왜 그렇게 삐뚤게만 봐'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들이 문제제기를 막게 되면, 문제 있는 현실이 익숙해지고, 그게 디폴트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얘기들에 졸지 않고, 계속해서 삐딱한 시선과 태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런 책의 가치도 거기 있지 않을까 해요.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을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에요.


연연 : 비관은 낙관을 막지는 못하지만, 낙관에 돌멩이를 주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해정 : 하지만 작가는 사회 전체를 엄청 비관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코미디라는 장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코미디 장르로 글을 썼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애정이 전제되어 있다고 느껴져요. 그리고 글을 쓰는 데 있어 낙관을 지니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사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필요하지만, 어떤 변화의 지점을 빠르게 캐치할 수 있는 힘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가능한 사람들이 진정한 낙관주의자라고 생각도 해요.


연연 : 코미디라는 장르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장르이긴 하죠. 그래서 좋아하긴 하는데. 이 소설이 휴머니즘을 담은 건가는 잘 모르겠어요. 오히려 정말 비관적인 세계관 속에서 '유우머가 없으면 어이사나'이런 느낌?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비꼬는 코미디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박루저 : 저는 문학에서의 휴머니즘은 가족주의를 건드리는 것을 일컫는다고 생각해요. 여기서는 거의 패륜이기에 내가 생각하는 휴머니즘 코드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이런 작품이 문학사에 있다는 것이 부러웠어요. 15년의 기간이 걸렸지만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고요.


연연 : 정치적인 이슈로 인해서 사회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어려운 문단 분위기가 있어왔고, 그래서 존재하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박루저 : 한국문학에서는 인물 한 명이 톡톡 튀고 엄청나게 매력적이라고 나오는 경우는 잘 없는 거 같아요. 아마 그간 역사에서 한 번도 '개인'이 오롯하게 조명되었던 적이 잘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민족과 국가의 문제에, 그리고 자기를 포함한 어떤 집단의 문제에 비해서 '개인' 그 자체가 중요한 가치로는 잘 부상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늘 시대나 집단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은 소설사에 많지만, 완전히 사회를 뒤집어 놓는 통통 튀는 캐릭터는 잘 없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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