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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Mar 18. 2018

17. 모두가 바보 같은 내가 바보?

천재의 반격, 『바보들의 결탁』

*느빌의 책방에서는 "디스토피아"라는 키워드에 이어 "반격"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바보들의 결탁』은 "반격" 3부작 중 두 번째 텍스트입니다.


#반격 #달걀세우기 

 반격의 첫 번째로 작품으로 손원평 작가의『서른의 반격』를 읽고, 미미해 보이지만 상대에게 수치심을 안길 수 있는 ‘달걀로 바위치기’를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오늘 다루는 『바보들의 결탁』은 ‘(실패하는) 달걀 세우기’쯤이 될 것 같다. 콜럼버스처럼 달걀 한 쪽을 짓누를 용기 없는 ‘달걀 세우기’는, 당사자는 진지할지라도 겉에서 보기엔 우스꽝스러울 뿐이기에.


#줄거리 #소동의연속 

『바보들의 결탁』의 주인공은 1960년대 미국 뉴올리언스에 사는 이그네이셔스 J. 라일리이다. 그는 서른이 넘도록 어머니에게 얹혀사는 만년 백수(a.k.a. 게으름뱅이, 엄살쟁이, 망상가)이다. 소설은 고도비만에 가까운 그의 더러운 행색을 표현하는 데 큰 분량을 할애한다. 이그네이셔스는 입버릇처럼 ‘유문(위와 십이지장의 경계 부분)’이 약한 자신을 위해 신경을 거스르지 말라고 외치는데, 수시로 트름하고 방귀를 뀌는 모습을 보아 사실로 보인다. 더 얘기해봤자 역겹기만 할 테니 이그네이셔스 외관에 대한 설명은 미국판 표지로 대신한다.

                                                     

미국 Penguin Red Classics 버전 표지


이그네이셔스는 중세를 흠모하고 타락한 자본주의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고발장과 여자친구 머나에게 편지 쓸 때만 내공을 쏟는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 고학력자(석사)다. (세상의 수많은 고학력자들이여, 이 대목에서 울어도 좋다.) 그는 평소 자본주의 현대문명을 비판하기에 그 세상에 속해야 하는 노동도 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빌붙어 산다. 그러던 어느 날, 특유의 고집불통과 거만함으로 인해 소동에 휘말려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으라는 엄마 등쌀에 못 이겨 노동을 시작한다. 세상을 다 안다는 거만한 자세로.

“실망시켜드려 죄송하지만, 급료가 적정 수준이 아닌 듯한데요. (..) 현재로선 제가 그 사람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받아 들일 수 있을지, 결정을 고민하는 중이죠. 최종적으론 그 사람한테 ‘종습니다’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첫 직장은 망하기 직전의 의류 회사 ‘리바이 팬츠’. 그곳에서 그는 공장 (흑인) 노동자와 함께 관리자/자본가에 맞설 계획을 세우고 이행한다. 그러나 결국 한낮 소동으로 끝나 해고된다. 둘째 직장은 핫도그 노점상. 수레를 끌고 다니며 핫도그를 팔아야 하는데, 자신이 대부분을 먹어버린다. 벌이가 좋을 리 없다. 와중에 정치 집단을 조직하고자 작당을 하나, 작당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그 취지를 모르고 공감하지 못하니 한낮 파티로만 끝난다. (추후 얘기하겠지만, 이그네이셔스 자신이 취지를 아는지도 헷갈린다.) 그러던 중 전 직장 ‘리바이 팬츠’에서 멋대로 작성해 거래처에 보낸 편지가 문제가 돼 소송으로 번지고, 더 이상 참지 못한 이그네이셔스의 엄마는 이그네이셔스를 정신병원으로 보내려고 한다. 정신병원 사람들이 이그네이셔스를 데려가기 직전, 한동안 편지로만 연락하던 여자친구 머나가 그를 데리러 온다. 그 두 사람이 함께 뉴올리언스를 탈출하면서 극이 끝난다. 


#선정동기 #와사비라떼 

나는 오랜 시간 이동진 평론가의 추천에 기대어 독서를 해 왔다. 그래서 ‘반격’을 주제로 책을 고를 때 『닥치고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책 부록인 ‘이동진 추천도서 500선’을 참고했다. 『바보들의 결탁』은 그 중 한 권이었다. ‘결탁’이라니! 뭔가 반격을 저지를 것 같아 검색을 했고, ‘자본주의 체제와 정면 대결’, ‘밥벌이 전선에서 세상 변혁을 꿈꾸는’, ‘미국 문학계의 코믹 걸작’, ‘1981 퓰리처상 수상’이라는 카피에 홀려 바로 선정했다. 노동하며 생활 언어로 읽고 쓰는 행위가 필요해온 나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것과 달리 소설의 방점은 ‘코믹 걸작’이 아닌 ‘미국 문학계’, ‘퓰리처상’이 아닌 ‘1981년’에 있었다. 그러고 나니 라떼킹의 와사비 라떼가 생각났다. 

당신은 신 메뉴를 도전하는 편인가, 아니면 평소 먹는 메뉴를 고수하는 편인가? 나는 전자다. 특히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을 만나면 무조건 그걸 마셔봐야 하는 지병이 있다. 와사비 라떼도 그 중 하나였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메뉴판에 적혀 있는 와사비 라떼를 보는 순간, 이미 다른 음료는 안중에도 없었다. (거짓말이다. 소금라떼랑 조금 고민하다 와사비 라떼로 골랐다.) 물론 결과는 여러분의 상상대로 처참한 실패. 한 입 마시고 첫 모금이라 그렇다며 정신승리, 두 입 마시고 세 모금은 마셔야 진가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정신승리, 세 입 마시고는 뱉었다. 그렇게 와사비 라떼는 나무의 자양분으로서 흙으로 회귀했다. 『바보들의 결탁』도 첫 장 읽고 초반이라 그렇다며 정신 승리, 두 번째 장 읽고 이동진의 추천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정신승리, 세 번째 장 읽고는 왜 추천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구나, 했다. 그래도 이 책이 궁금한 분들을 위해 이제부터 ‘왜 추천하는지 모르는 건 아닌’ 이유를 풀겠다.


#창작 배경 #15년의비극

『바보들의 결탁』은 작품이 쓰이고 출간되기까지 십오 년이 걸린 저자의 유작이다. 저자 존 케네디 툴 또한 이그네이셔스처럼 미국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컬럼비아 대학 석사 출신으로, 강한 확신을 갖고 이 책을 썼지만 계속해서 출간을 거절 받는다. 와중에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어머니와의 사이가 갈 수록 나빠지면서 급속하게 건강이 악화된다. 결국 심한 우울증과 편집증에 시달리다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자살한다. (이러한 배경을 감안하면, 이그네이셔스와 그의 어머니 라일리 부인에 저자와 그의 어머니의 모습이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후 『바보들의 결탁』이 책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머니 셀마는 당대 미국 문학의 대가에게 이 원고를 전하고, 그는 “이렇게 훌륭하다니, 있을 수 없다”는 서문과 함께 출판사에 추천한다. 미국에서 1980년 출간된 후 평단의 호평과 함께 대중적으로도 성공했고, 결국 다음 해 퓰리처상의 영광을 안았다. 

#시공간 #1960년대 #미국뉴올리언스 

앞서 나는 책 뒷면에 적힌 추천사에서 ‘걸작’이 아닌 ‘미국 문학계’, ‘퓰리처상’이 아닌 ‘1981년’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 소설의 배경이 된 1960년대 미국 뉴올리언스의 총체적 난국을 잘 보여주고 있고, 둘째, ‘호모’, ‘갈보’ 등 지금으로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혐오 표현이 쓰이고, 셋째, 미국 유우머가 코미디의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한 페이지에서 별이 네 개(****)까지 달린 각주에서 엿보이는 옮긴이의 처절함…)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그 이유를 천천히 살펴보자.

이미지 출처: 네이버 사전

1960년대 미국에서는 인종차별, 성차별, 노동문제, 경찰의 강압적인 진압 등 다양한 사회 문제가 복합적으로 수면 위로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도덕적 가치를 재창조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청년들의 운동이 활발했다. 이그네이셔스의 여자친구로 소개되는 머나가 당대의 대표적인 청년, ‘히피*’이다. 『바보들의 결탁』은 시대적 배경을 술집이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흑인(조지 등), 어딘가 부족해 보이면서도 무력을 행사하는 데에는 거침없는 경찰들,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드러낸다. 

과거만큼 적나라하지 않지만 현대에도 여전히 인종차별과 성차별 등 1960년대 미국에서 나타난 사회 문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바보들의 결탁』은 재미있고 서글픈 블랙코미디로 읽힌다. (약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충분히 감각 가능하다는 점이 슬프지만.) 다시 말해, 위에서 언급한 방점이자 한계가 다시 리딩포인트다. 첫째, 1960년대 미국의 사회 배경이 2010년대 한국에서도 공감할 만하고, 둘째, 호모 표현은 『82년생 김지영』 속 '김치녀' '맘충'과 같이 현실을 보여주는 언어인 셈이다. (셋째의 번역 문제는... 논외로 하자.)


*히피: (hippie/hippy) 1960년대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물질문명에 항거하는 자연찬미파 사람들. 더벅머리, 맨발, 자유로운 옷차림, 개방적인 성생활 등으로 자유를 표현했으며, 탈사회적 행동을 보였다.


#자본주의희생양 #사회부적응자 #그사이 

책 제목 『바보들의 결탁』에 대한 힌트는 소설 맨 앞장에 적힌 인용구에서 얻을 수 있다. 

“세상에 진정한 천재가 나타났음은
바보들이 모조리 결탁하여 그에게 맞서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 조너선 스위프트, 『도덕적이고 재미있는, 다양한 주제에 관한 소고』 중에서
 

소설의 주제이자 이그네이셔스의 사고를 반영하는 인용구이다. 이그네이셔스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속에서 하나의 질서로 움직이는 것을 '바보들의 결탁'으로 보고,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한다. 

“제 벨탄샤웅(=세계관)을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증오하는지 어머니도 좀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고발장을 통해 사회를 비판한다. 고대부터의 고전을 섭렵한 그는, 교양의 상징인 독일어와 학문적 용어,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현 사회를 분석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러므로, 일상 언어에 뿌리내리지 않은 이그네이셔스의 반격은 실패한다. 그뿐만은 아니다. 거창한 명분 뒤에 숨은 자신의 속내,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겠다는 거만함으로 인해 이그네이셔스의 비판은 불평이 된다. 실제로 사회에 대한 반격을 하기 위해 ‘리바이 팬츠’ 공장 노동자 궐기와 정치 집단 ‘평화단’ 조직을 도모할 때 이그네이셔스는 아래 세 가지 한계를 보인다.

1) 반격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그 취지를 공유하지 못한다.
2) 사회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지 않고 연구자적 (고)자세로 객관화하여 본다.
3) 예의가 없다.

이런 한계는 노동자가 표어를 적은 천막과 무기를 들 때, 이그네이셔스는 카메라를 들어 그들을 찍는 장면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시종일관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그네이셔스를 보면 그가 바보인지 주변인이 바보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그네이셔스뿐만 아니라 『바보들의 결탁』속 등장 인물 모두 어딘가 꼬여있다.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이는 어머니 라일리 부인의 친구들도 툭 하면 빨갱이냐며 색깔논쟁을 시작하고, 가장 이성적으로 보이는 ‘리바이 팬츠’ 사장의 부인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당사자의 의사는 무시한 봉사 활동을 계속한다. 여자친구 머나 또한 히피로서 정의에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프로이트주의에 매몰되어 물적 세계와 떨어진 언어로 세상을 본다. 대환장파티다.

웃긴 것은, 대환장 파티와 저자의 일생이 겹치면서 이그네이셔스라는 인물이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희생양으로 보이고, 그를 마냥 싫어할 수만은 없게 된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여러 사고를 치고서도 요리조리 잘 피해왔던 이그네이셔스가 빚을 갚는  현실의 책임과 마주해야 할 때, 결국엔 정신 병자로 낙인 찍히는 장면에서 이런 복잡함 감정은 극에 달한다. 비로소 코미디라는 형식을 취한 저자의 의도가 이해된다. 위선적인 인물을 위악적으로 그림으로써 우리가 이미 푹 젖어 있어 미처 보지 못하는 체제와 사회의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움을 드러낸 것이다. 바보들의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은 미쳤어!'라고 쉽게 나서지 못하는 우리 바보들은, 이그네이셔스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동정할 수는 있게 된다. 


“저는 ‘희망적으로 살아가는 것’ 따위 사양합니다. 낙관주의는 딱 질색입니다. 그거 아주 변태적인 거라니까요. 인류가 타락한 이후로 이 우주에서 인류에게 주어진 마땅한 위상은 바로 참담한 고통이란 말입니다.”
“난 고통스럽지 않아.”
“아니, 그렇습니다.”

왜 고통스러운지 모르는 사람, 왜 고통스러운지 아는 사람 모두 사실은 고통스러운 질서 속에 살고 있다는 아픈 이야기를 씁쓸한 자조적인 유머로 전하는 『바보들의 결탁』. 결국 반격이 실패하는 세계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낙관이 아니라 유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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