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뒷담화
* <느빌>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록합니다.
* 발제문과 뒷담화는 전담 에디터 없이 돌아가며 작성합니다.
* 이 뒷담화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 이어 작성된 멘붕 키워드의 두 번째 텍스트입니다.
*이번 모임엔 박루저, 다희, 이주, 일벌레, 최생, 연연 님이 참여했습니다.
*본 녹취록은 이전 게시글인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발제문'을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발제문 바로가기: https://brunch.co.kr/@neuvilbooks/14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괄호() 안의 내용은 편집자 연연이 덧붙이는 말입니다.
최생: 지난 번 다룬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멘붕인 상황이 연달아 일어나지만 인물이 멘붕하지는 않아, 이번에는 인물이 멘붕하는 영화로 골랐어요. 그래서 인물이 멘붕해가는 감정선에 집중하고자 했어요. 다른 영화와 달리 중점적인 사건을 회상씬을 통해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이주: 사건이 완전 새롭거나 독특하지는 않은데, 최생 말처럼 사건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물의 감정이 변화하는 선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최생: 맞아요. 그걸 잘 표현해내는 인물의 연기력도 인상깊어요. 초반에 인물의 표정과 행색에서 지치고 힘들고 슬픈 사람이라는 점이 잘 드러나요. 감정을 분출하는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잔잔한 톤을 유지하는데도 미묘한 감정 변화가 잘 드러나죠. 뤽이 줄리엣에게 동화를 읽어달라고 할 때 슬쩍 미소 짓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요, 뤽과의 관계가 드러나는 좋은 장면이었다고 생각해요.
박루저: 연기 쩔죠. 마지막 5분 가량 자신의 사연을 말하기 전까지는 줄리엣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려워요. 이런 사람이 실제로 내 주변에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상당히 불행한 티가 날 것 같은데, 줄리엣은 일상 생활에서 불행한 티가 나지 않아요. 그래서 그녀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생각돼요. 마지막까지 보고 나니 비로소 교도소에 가고 여러 모욕을 당하면서도 불행해보이지 않은 이유가 짐작이 되더라고요.
다희: 줄리엣이 스스로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겠죠. 변명하지 않겠다는 태도, 그래서 침묵하는 태도가 줄리엣의 캐릭터를 잘 설명하고 매력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이주: 맞아요. 어떻게 받아들여지든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이니 그저 감내하겠다는 것처럼 보여요. 멋있어요.
연연: 저는 영화를 자주 보거나 즐기지 않는 사람으로서,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를 보며 영화란 보여주기의 예술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어요. 인물의 행동이나 말에 따라 자연스레 감정선에 이끌려 가는 경험을 했거든요. 생일날 목적 없이 괜히 거리를 배회하고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모습에서도 큰 공감을 했어요. 누구나 마음 적적해서 그런 적 있잖아요.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응?) 그런 경험이 있다면 줄리엣의 표정을 보며 그의 심정을 감각할 수 있을 테죠.
최생: 뜬금이지만 형사 커피 섞는 건 왜 그렇게 보여줄까요?
연연: 줄리엣의 시선을 보여주기 위한 것 아닐까요? 우리도 대화할 때 계속 상대방을 보기보다는 상대를 봤다 근처 사물을 봤다 하잖아요. 영화로 그걸 표현해내는 걸 보고 역시 보여주기의 대가라고 느꼈어요!
최생: 감독이 예술에 대한 생각을 많이 집어넣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인물들이 춤, 시, 음악, 등 여러 예술을 통해 교류하고, 이야기를 소설에 빗대어 설명하는 걸 보면, 예술을 공감을 위한 매개체라고 생각한 거 아닐까요?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공감 불능이 문제잖아요? 영화를 보며 '이래서 예술이 필요하구나'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예술은 한계가 있어요. 직접 말하기까지의 중간 단계로서만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이주: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공감의 매개체보다는 예술로는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의 복잡함을 예술(영화)로 말하려는 시도로 보여요.
다희: 맞아요. 동생 레아가 문학 토론 시간에 문학(예술)도 결국 하나의 가정일 뿐이라며 화를 내잖아요. 예술로든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든 이해하려는 시도는 항상 엇나가므로 정확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그걸 뛰어넘을 수 있는 하나가 있다면 그건 사랑이라는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아요.
이주: 맞아요. 결국 자매가 서로를 이해하는 결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동생 레아가 화낸 건, 커가며 언니를 이해하려고 했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아서겠죠. 그 지점에서 복잡한 심정이 드러난 거고요.
박루저: 저도 예술과 언어가 자매 간의 화해로 이끌었다고 생각지 않아요. 그와는 별개로 15년으로 대변되는 자기만의 시간과 상처, 감옥 바깥의 자살하는 등 나름의 아픔이 있는 사람들을 보며 아픔을 말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줄리엣이 감옥에서 나와 처음으로 원나잇하고도 아무 감흥이나 변화가 없잖아요? 남자는 자부심에 쩔어서 좋았냐고 물어보는데, 줄리엣은 별로였지만 괜찮다고 하죠. (일동 까르르 웃음)
그래서 발제문의 예술, 언어, 감각은 세 꼭지로 나눌 필요 없이 하나의 큰 범주로 묶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생: 그런데 원나잇한 경험도 바깥 생활을 하며 충분히 감각한 다음에 동생과 웃으며 얘기잖아요? 그런 장면으로 비추어 볼 때, 줄리엣이 외부의 일상과 수감 생활에서의 감각은 서로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만나는 사람들이 다르니 감각도 다르겠죠. 영화는 타인의 시점에서 줄리엣을 보여주는데, 그렇기에 오히려 매개가 되는 감각이 중요해요. 인물은 서로를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교류 전, 서로 공감해가는 매개체로 예술이 기능한 거죠.
이주, 박루저, 다희: (최생이 말하는) 감각이 뭐예요?
최생: 감각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어떤 것을 보며 피부로 느끼는 것, 예술이 감각의 총체라고 생각했어요. (점점 자신 없어지는 말투)
연연: 생각할 틈 없이 밀고 들어오는 무엇인가요?
최생 옆에서 생활하면서 느끼는 무엇이요. 줄리엣은 감옥에서 홀로 생각하는 시간이 많던 사람인데, 감옥에서 나와 느낌만으로 모든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일상 생활에서 어느 정도 지나간 생각들을 떨쳐 버리는 계기를 얻은 거 같아요.
연연: 트라우마를 회복할 시간 없이 감옥이라는 단절된 공간 안에서 홀로 생각하던 사람이 일상 속에서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는 건가요? 과거의 트라우마에 덧입혀지는 새로운 감각들에 의해서 변화가 나타난다는 의미?
최생: 네, 어쨋든... (말잇못)
박루저: 저는 감옥에서의 시간이 마이너스는 아니고, 그 사건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사회에 나온 후 편견에 자주 맞닦뜨리죠. 감각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일상의 감각보다는 사회의 아픔(자살하는 사람 등)을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풀었다고 생각해요.
일벌레: 저도 박루저 말에 동의해요. 줄리엣은 사회에서 관계를 맺고 사회적 역할을 가지기보다는 혼자인 상태로 과거에 머물러 있고 싶어서 감옥에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자살한 형사가 얘기하는 오라노코 강이 과거를 상징한다고 봤을 때, 그 사람이 강을 좇다가 자살한 걸 보고 과거에서 떠나 여기에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마지막에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게 그 방증이고요.
이주: 저도 줄리엣은 감옥에 평생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도 안 싫어했을 것 같아요. 자기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감내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바깥을 두려워했겠죠.
다희: 저는 반대예요. 동생과의 관계를 많이 회복한 후 둘이 콘서트 같은 곳에 갔을 때 복도에 서서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뛰쳐나와 울었던 장면에서 줄리엣이 감옥에 있었을 때 괴로웠음을 알 수 있어요. 감옥에서 여러 수감자와 함께 줄 서야 했던 어떤 상황들이 떠올랐겠죠.
연연: 저도 다희 말에 동의해요. '나 여기 있어요'는 혼자 가능했던 게 아니에요. 바깥이 두렵다고 해도 그것이 외롭지 않다는 말은 아니잖아요? 나는 외로워야 해, 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나는 외롭지 않아, 가 아니니까요. 레아가 '나는 외로워야 해'라는 벽을 수없이 두드려서 어렵게 부수고 허문 거죠.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언어가 중요해 보여요. 초반에 줄리엣이 유일하게 먼저 말 거는 사람이 말을 하지 못하는 할아버지라는 점도 의미가 있죠. 발제문에서는 언어를 조금 다루다가 끝에 '뭘까?' 질문하고 끝나잖아요.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했어요.
일벌레: 언어 얘기에 생각나는 장면이, 레아가 의사 친구에게 줄리엣의 아이가 아팠다는 사실을 들을 때 곁에서 아이가 읽는 동화책 내용이 겹치잖아요. 아이가 그걸 완벽히 이해하지는 않겠지만 오해를 풀 열쇠가 '말해진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희: 처음에 불편한 질문을 하는 걸 보면 ('어디서 있다 왔나요?' 등) 아이들이야말로 진실을 깨우는 잔인한 존재로 보여요. 그게 어린 아이의 태도겠죠. 그런데 줄리엣은 가족에게도 해명하지 않고 오해 받아요. 그러니 더 먼 사람에게는 이해 받으려는 시도도, 어떤 말도 하지 못했을 거고요. 저마저도 죄가 죄인 만큼 처음에는 편견을 가지고 봤어요.
이주: 맞아요. 저는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 알고 보니 동생이 죽였다더라, 하는 반전이 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되더라고요. 줄리엣이 동생의 죄를 뒤집어 썼다, 이런 것처럼요.
연연: 저도 레아가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할 때, 기억이 안 나면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거 아냐? 하고 의심했어요.
일벌레: 너무 한국 드라마 설정인 거 아니에요?ㅋㅋㅋ 저는 오히려 직설적으로 말하는 존재, 아이들이야말로 덜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레아 부부는 줄리엣 문제로 뒤에서 싸우고 앞에서 잘 대하는 반면, 아이와 줄리엣은 직설적으로 소통해서 더 잘 교감해요.
최생: 어쨌든, 우회적이든 직접적이든 표현은 해야 하나 봐요. 사람까지 가기에 예술이 필요하다!
연연: 저는 표현도 중요하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술보다는 사람!
이주: 사람이 뭘 해줄 수 있는데, 라고 묻지만 가장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