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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Apr 11. 2018

20. 사랑을 말하기까지

*느빌의 책방에서는 "반격"라는 키워드에 이어 "멘붕"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는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 이은 "멘붕" 3부작 중 두 번째 텍스트입니다.




  저번 발제에선 제대로 멘붕을 보여주는 cool한 할아버지를 소개해 줬다. 그러나 나에게 그는 너무나도 먼 존재처럼 보인다. 세상을 움직인 사건사고의 중심에서 아무런 불안이나 걱정도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그 인물은 몹시 초인적으로 보이는데, 그야말로 불교에서 내세우는 보살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나와 같은 쪼잔한 마음을 지니고 매사에 전전긍긍하는 인간에겐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인 것. 그 폭발 전문가 할아버진 내겐 그저 세상에 존재할 수는 있지만 내가 될 수는 없는 매력적인 가상의 인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정말로 세계에 존재할 법한 멘붕을 당한 인물을 찾아왔다. 영화의 주인공 줄리엣이 겪은 사건은 세계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다. 그건 가족이건 연인이건 친구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사건이다. 그녀에게 벌어진 사건은 말하자면 사랑에 관한 일이다. 인간이 멘붕 당하는 가장 보편적인 이유인 바로 사랑말이다.   

  현재건 과거건 미래건 간에 개인에게 가장 많은 마찰을 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사랑일 것이다. 떠나는 사랑이건 다가오는 감정이건, 누구를 대상으로 했건 간에 사랑은 한 인간을 혼란에 빠트리는 강력한 심리상태이다. 이 사랑이 가진 에너지는 극도의 행복함을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때때로 크나큰 상실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줄리엣은 이 사랑때문에 입은 상처와 함께 영화에 등장한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함을 고백하는 영화의 제목은 줄리엣의 사랑이 다시 살아나며 과거와 현재 양방향을 향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으로 무너진 멘탈은 사랑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걸 알려주면서.    


+ 스포가 있습니다.




고립된 사람들  


  주인공 줄리엣은 15년간이나 감옥에 살았다. 15 하니 떠오르는 것들은 15 소년 표류기, 올드보이, 로빈슨 크루소 등등.. 15년은 갇히기 적당한 시간인가 보다. 이 긴 시간은 줄리엣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많은 상처를 남겼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치매에 걸렸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동생 레아의 트라우마는 그 사건이 가족에게도 커다란 상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레아에겐 새로운 인생을 구축할 시간이기도 했다.   


10, 15, 15 어쩌면 5의 배수가 갇혀있기에 좋은 숫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긴 레아의 가족은 사랑스럽다. 어린 두 딸과 할아버지 그리고 여전히 데이트를 자주 하는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 그들의 모습은 고립된 인물인 줄리엣과는 대비되며 동시에 레아가 어떻게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 행복한 인생을 꾸려왔는지 보여준다.


  물론 레아의 가족들도 처음부터 함께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폴란드에서 할머니는 러시아에서 이주해왔고, 레아는 영국에서 살던 프랑스 인이며, 아이들은 베트남에서 입양된 입양아들이다.  모두 이주민이었던 그들은 이 도시에 와서야 가족들이 되었다. 이런 관계는 친구들과 다른 인물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미셀은 파리에서 왔고, 사미르는 이라크 피난민이다. 아마도 그들의 과거는 아직은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고립된 형사와 줄리엣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 내에서 고립된 인물을 찾는 것은 눈을 조금만 돌려도 쉬운 일이다. 모두가 한 번은 고립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모습은 인간이라면 겪어야 할 어쩔 수 없는 생활의 조건으로 보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누구나 고립감을 극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엔 자살하는 형사처럼 누군가는 그렇게 허무하게 고독 속에서 죽을 수도 있다.


줄리엣과 조카 - 왠지 모르게 곡성이 생각났다

  물론 이런 불가피한 고립의 환경을 타파하기 위해 정부는 여러 제도적인 장치를 구비해놨다. 그러나 그 기능이 영 신통치 않다. 사회복지사는 직업적으로만 접근하는 과장된 존재로 묘사되고, 줄리엣의 담당 형사는 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해 도와주는 역할이지만 오히려 스스로의 고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한다. 이들에게 결여된 것은 시스템에 의한 관계가 아닌 자연스러운 관계 속에서 생기는 사랑이다. 사랑이 결여된 인물의 쓸쓸한 말로는 고립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줄리엣과 형사 사이의 감정 속에서 사라진 가능성이 아쉬운 이유이다.     


 

사랑의 전제 - 감각하기


서로 다른 계절은 아닌 걸까?

  형사의 경우처럼 사랑은 고립된 사람들에겐 몹시 닿기 힘든 감정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차근차근 사랑에 닿을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현재를 느끼는 것. 바로 감각적인 차원에서 자신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야만 타인의 존재를 느낄 수 있고, 그다음에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느낀 영화는 인간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는 한 방편으로써의 사랑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랑에 다다르는 여정을 그린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여정은 먼저 감각을 통해 시작한다.


  처음에 짙은 색의 두꺼운 코트를 입고, 무감각한 표정을 시종일관 지으며 침묵하는 인간의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고립된 존재였는지 보여준다. 그녀는 감옥에서의 기간 동안 무명인으로 불렸고, 걷는 여자로 불렸다. 감옥이란 유배지에서 아무런 개성도 없이 그저 무감각하게 생각에 골똘하며 혹은 감정의 해소에 몰두하며 보낸 시간들은 그녀가 세상에서 버려졌고, 느낄 수 없는 좌절의 상태로 몰아갔을 것이다.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다. 실제로 어땠는지) 하지만 그녀가 아들의 죽음 때문에 상심했고, 버린 받은 기분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감옥에서의 기간 동안 사랑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고, 느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세계에 들어서면서 감각을 통해 상처로부터 회복한다. 가구를 만지면서 느끼는 감촉부터, 음식, 춤, 노래, 그림 등 오감을 자극하는 감각이 영화 내내 펼쳐진다. 나아가서 미술작품들을 감상하고, 마지막에는 사람들까지 감각적으로 느낀다. 이것이 회복의 과정이며, (동생의) 사랑의 결과이기도 하는데, 마침내 줄리엣은 공감받기 위한 존재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온전히 상처 속에서 자신을 회복한다. 반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형사에겐 감각적인 생활이 없다. 벌을 자처하여 TV를 볼뿐. 그의 모습은 어쩐지 무감각했던 줄리엣의 수감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줄리엣과 형사

  그 무감각한 모습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주인공의 15년은 사소한 단서들을 통해 관객의 상상 속에서 어렴풋이 재현될 뿐이다. 오로지 서사로만 존재하는 줄리엣의 과거는 그녀가 현재의 형사와 같이 자신의 마음만 몰입한 시간을 보냈음을 보여주며,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줄리엣과 사람들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타인의 벽이 존재해 그 실상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관객 또한 느낄 수 없게 이야기로만 얼핏 제시된다.


    마찬가지로 줄리엣의 감정들도 그녀의 과거처럼 영화 속 타인의 입장에서 관객들에게 전해진다. 어떠한 직접적인 제시도 없는, 회상도 없는, 그리고 말미에 이르기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줄리엣이라는 미스터리. 이 줄리엣을 이해시키는 것은 오로지 영화를 통해 전해지는 감각들이다. 불가해한 줄리엣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들과 같은 조건에서 느끼고 공감한다. 우리 또한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한 사랑에 닿기 위해선 기본적인 감각으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예술을 통한 소통


 그리고 그런 감각의 교류에 방점을 찍는 것이 영화 내내 등장하는 여러 예술작품이다. 음악, 시, 소설, 회화, 춤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예술은 줄리엣이 침묵에 빠질 때마다 등장해서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또 받아들이는 창구가 된다.

  

  죽은 아들이 사랑의 표현으로 선택한 수단은 시였다. 그리고 줄리엣과 동생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장면의 상징으로 드러난 것은 노래였다.  동생 레아는 <죄와 벌>을 통해 언니의 심리를 고민하고 이해하려 하며, 할아버지와 줄리엣은 <실비>라는 소설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미셀도 <무명인>이라는 작품을 통해 줄리엣을 이해한다. 또한 그들이 고립되었던 시절에 각각의 인물들은 예술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고통을 이겨내기도 했다. 


 반면 또 다른 고립된 사람인 형사의 경우 예술과는 다소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과의 접촉에 적절한 형식이 없다. 예술의 형식을 빌리지 않는 표현은 그렇다고 명확하게 전달되지도 않은 채 공허하게 메아리치고, 결국 그는 고독을 벗어나는데 실패한다. 비단 형사뿐만 아니라 고립된 인물들에겐 예술이 없고 제도만이 존재한다.  

심쿵...

  허나 예술이란 타인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미스터리하다. 다양항 해석의 여지를 지니고 있고, 현실을 모방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레아가 지적한 것처럼 예술은 결국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어쩌면 예술을 경유한 소통이란 그럴듯한 것들에 기댄 모호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모호한 표현이 사랑의 근거가 될 수는 있지만 사랑이 될 수는 없는 것처럼. 



사랑을 말하기  


내 딸 사랑해~


  결국 예술만으로는 부족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감각적인 교류를 넘어 직접적인 언어가 필요하다. 그들 자신의 언어를 사용해야만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행복한 가정의 대명사처럼 보이는 레아의 가족들은 그래서 행복하다. 가족들 모두가 언어생활에 참여하며 표현에 거리낌이 없다. 그들의 사랑은 그런 언어소통 속에서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15년의 수감생활 후에 재회한 어머니도 줄리엣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만 자신의 언어인 영어를 통해 사랑을 표현한다. 그녀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레아와 줄리엣 또한 결말에 이르러 그간의 비밀들을 말하면서 서로를 이해한다. 말할 수 없던 것들이 말해지자 사랑은 확실해진다.


  감각적인 소통만으론 사랑을 알 수 없다. 인간과 인간의 틈은 너무나도 많은 모호함으로 가려져 있어서 간접적인 소통이 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그걸 통해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따라서 사랑은 말해져야만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공감하는 것에 공감하는 영화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공감하는 일이란 언제나 힘든 일이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나게 되는 무형의 장벽들은 단순하고 소심한 몇몇 시도들로는 도저히 깨부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 이렇게 공감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영화를 보게 돼 반가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쨌든 형사는 죽어버렸다는 것이고, 그걸 줄리엣은 10일이나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는 점, 어쩔 수 없는 벽이 시야를 벗어난 어딘가엔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다는 점?    

 


사랑.. 그거시야말로.. 멘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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