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슨한 빌리지 Apr 27. 2018

목숨을 건 북한 작가의 소설 <고발>

남북정상회담 스페셜

0. “한민족” 북한의 존재


씬 하나. 남북정상회담이나 북미정상회담이라는 키워드가 연일 화제가 되고, 한반도 평화에 대한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올림픽에서는 남북한 선수들이 하나의 팀으로 참가하기도 했고, 경기만큼이나 북한 참가단의 외모, 복장, 말투, 동선 등이 이슈가 되었다.

평양공연으로 북한 거리를 찍은 사진들이 언론에 도배되기도 하고, 북한의 걸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모란봉악단’의 가십이 남한의 주요한 뉴스거리가 된다. 심지어 김정은은 백지영의 노래가 좋았다거나, 본인이 레드벨벳을 보러 갈지 말지를 남한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걸 스스로도 잘 안다고 하더란다.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혹은 처음으로, 남북한은 서로 간의 문화/정치적 교류에 매우 긍정적인 듯 보인다.


씬 둘. 패널들이 나와서 떠드는 정치 프로그램이나 혹은 인터넷 공간에선 여전히 ‘종북’이니 ‘평양 올림픽’이니 ‘역시 문재인’이니 등등, 입장들이 지극히 이분법으로 갈린다. 죽을 고비를 넘어 귀순한 북한 병사의 위생 상태와, 탈북의 아찔한 장면을 담은 cctv를 보면서는 북한 인민의 삶을 동정한다. 이때 언론은, 북한이 얼마나 후진적인가, 혹은 그들 삶의 실태가 얼마나 안타까운가를 강조하며 동정을 이끌어낸다.

북한과 관련된 정책에는 찬성이나 반대만 있을 뿐이다. 이때 북한은 동정의 대상이거나 혹은 주적으로만 표현된다. 남북문제에서만큼은 냉전시대의 질서를 조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씬은, 놀랍게도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장면이다.


이렇게 아이러니하게 북한을 대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입장은, 나에게 ‘북한의 존재’에 대해서 늘 고민하게 한다. 북한의 정권에 대해, 그 아래에 있는 인민에 대해, 혹은 통일된 이후의 우리 모습에 대해. 그리고 이 고민은 늘 어렴풋한 ‘걱정’으로 이어진다.


뉴스에서 남북한 교류나 혹은 통일을 운운할 때마다 참으로 걱정되는 게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도 아니고, 역시 무슨 짓 할지 모르는 김정은도 아니며,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보는 홍준표도 물론 아니다.

바로 북한을 상상하는 내 감각이고, 타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정치적으로 혹은 외교적으로 북한과 교류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는 이미 북한을 완전한 타자로 만들어온 게 아닌가 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북한에 대한 우월감과 동정심, 그리고 북한 인민을 외국인 노동자 정도의 위치로 밖에 흡수하지 못할 것 같은 우리 사회가 늘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냉전을 통과하면서 이념적/문화적 타자로 완전히 분리된 그들을, 여전히 ‘한민족’이라는 참으로 쉬운 기만적인 캐치프레이즈로 잘못 그려내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늘 든다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북한 작가가 쓴 북한 현실’이라는 광고 문구에 끌려 <고발>을 읽게 되었다.



1. <고발> 줄거리


반디 작가의 <고발>은, 제목 그대로 북한 사회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책 속에서 묘사된 북한은 이렇다.


‘반혁명종자’로 언제든 찍힐 수 있기 때문에, 인민 전체는 늘 ‘당’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당’의 허락 없이는 집의 커튼조차도 마음대로 치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지도 못하며, 직업 선택의 자유도 전혀 없다. 모든 개인의 성과는 당에게 귀속되고, 모든 사회의 문제는 당이 아닌 개인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현실의 비극들은 언론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 언론에서는 늘 ‘수령’으로 인해 잘 굴러가는 사회만 나오기 때문이며, 그 이면에서 고통받고 죽어나가는 인민들은 감춰진다. 예컨대, 김일성 장례식으로 온 나라가 몸과 마음을 바쳐 조의를 하는 장면은 매일같이 보도되지만, 이 조의에 바칠 꽃을 따기 위해 죽어나가는 인민들의 모습은 삭제되는 것이다.


이때 개개인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의 원천은 ‘당’으로 대표되는 사회 시스템이자 이데올로기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사회 시스템이자 이데올로기라는 추상적인 대상은 현실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가?

그러니까, 독자로서 마땅히 하게 되는 비난이 향해야 할 그 목적지는 어디인가. 빨간버섯으로 상징되는 당의 건물인가. 공산주의의 원형처럼 나오는 마르크스의 초상화인가. 지배시스템의 꼭대기에 있는 김일성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인민들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처참하게 만드는 그 사회 시스템을 대변하는 건, 또 다른 ‘인민’이다.





2. 전체주의는 누가 지탱하는가


전체주의 시스템을 지탱하고, 그걸 현실에 구현하는 건 결국 ‘인민’으로 묘사된다. 북한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인민들 한명 한명이, 매우 적극적으로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사회의 구석구석 적용하고 있다. 언론을 조작하는 건 한명 한명의 기자들이며, 이동의 자유를 막는 것 역시도 여행증을 검사하고 판단하는 공무원 개인이며, 누군가를 반동분자라고 판단하는 것 역시 주변에서 늘 감시하고 있는 정보원 개개인이다.


그럼 이들의 부역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며 겉으로만 하는 연극인가? 그렇지도 않다.     

이들은 이미 체질화된 ‘복종’을 하며 살아간다. 강요된 조의를 겉으로만 할 뿐인데도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리고, 마르크스와 김일성의 초상화만 보아도 절로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린다. 북한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란 일상과 떨어진 사상이 아닌 것이다. 이미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진, 반항하는 순간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공포이자 자기검열의 기제가 되어 있다.

그래서 스스로가 공포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이 모순된 상황을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그간 이데올로기를 스스로 실천해오던 자기의 삶 전체를 부정하거나(준마의 일생에서 느티나무를 베고 죽어버리는 아자씨처럼), 혹은 이 모순적인 시스템을 애써 모른 척하는 수밖에 없다(대다수가 하고 있는 ‘복마전’처럼).


이 모든 상황을 책으로 보고 있는 우리는 텍스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동정하거나, 북한식 독재시스템을 비난하며 ‘인권의 소중함’을 책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이 해석은 참으로 게으른 해석이자 심지어는 매우 오만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곧바로 따라온다.


 



3. 북한 인민의 인권, 남한 국민의 인권 


인권이라는 주제에서만큼은, 우리 역시도 철저히 타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북한 인민의 인권을 들먹이고 전체주의를 비난하지만, 실은 (책 속에서 자유의 나라처럼 포장된 남한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도 북한 인민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 당의 폭력적 권위와 이데올로기의 세뇌에 길들여져 부역하고 있다면, (나를 포함한) 우리는 일상 속의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에 철저하게 부역하고 있지 않은가. 북한의 인민들은 처형과 반동분자 낙인이라는 강제적인 탄압으로 인해 복종하게 된다면, 남한의 시민은 오히려 사회적인 성공사례와 서열화된 인간관계를 인정하면서 스스로 살벌한 체제에 순응해가지 않는가.


당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약자를 성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소설 속 책임비서는 쉽게도 욕하면서, 성매매가 일상화되고 성차별이 구조화된 우리의 현실에는 참으로 무덤덤하다. 가난한 자들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소설 속 북한 경찰들을 보며 분노하고 당위적인 해석을 잘도 내뱉는 우리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바로 우리 사회 속의 기업들에게는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도 들어가고픈 회사라며 동경을 한다.


그래서 실제 내 일상을 침범하고 내가 속한 사회를 유지하는 온갖 차별과 구조적인 서열화에는 열렬히 도 참여하면서, 소설 속 ‘가상’이며 나의 삶과는 동떨어진 상황 앞에서는 모두 성인군자가 된다. “역시 민주주의와 인권은 소중한 거야” “쯧쯧. 전체주의 시스템은 역시 폭력적이군”


그리고 눈 앞의 현실에 대해서는 늘 똑같은 합리화다. “자본주의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나부터 먹고살아야지” “나 혼자 해봤자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



4. 고작 리얼리즘이 되지 않으려면


제 아무리 리얼리즘이라도, 결국 난 책상에 편하게 앉아서 머릿속으로나 잠시 비판하며 그 텍스트를 읽어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내 삶이 아니기 때문에 판단은 쉽고 옳은 태도를 취하기도 쉽다. 그렇게 내 삶과 떨어진 ‘담론’은 만들어진다. 노동자, 페미니즘, 장애인 등등 수많은 소수자 담론이 그렇게 ‘담론’으로는 진보적인 말들로 거대해지지만, 결국 눈 앞의 ‘현실’은 잘 변하지 않는다.


리얼리즘 텍스트가 겨우 우리의 똑똑한 척과 자위를 돕는 그럴듯한 가상현실 게임이 되지 않으려면, 모든 텍스트는 결국 현실을 향해야 한다. 책을 읽은 감각이 우리의 현실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 속 묘사된 ‘날아가라고 열어줘도 자유를 못 느끼고 돌아오는 종달새’는 우리 사회에서 누구의 모습인가. 이데올로기를 욕하면서도 그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확인하는 자가당착에 처한 설용수는, 우리 사회 누구와 닮아 있는가.


이 모습들을 소설 속 비판의 대상으로만 파악하고 혀를 차며 넘어갈 게 아니라, 늘 현실을 고발하고 진보적인 척 하지만, 실제론 그 현실을 강력히 지탱하는 데 동참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으로 읽는 태도가 필요하다. 북한 인민의 인권과 전체주의 사회는 수많은 담론들이 ‘고발’하고 있지만, 내 속의 위선과 이 사회를 ‘고발’할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실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에 바꿔야 한다’가 되어야 한다. 더 많은 고발이 있어야 하고, 그 고발에 동참해줄 자세가 필요하며, 무엇보다 ‘현실’을 바꾸어야 할 일상 속의 진짜 변화들이 있어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예술은,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