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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Aug 01. 2018

당신은 무엇을, 어떻게 믿나요?

25-1. <침묵> 뒷담화

* <느빌>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록합니다.
* 발제문과 뒷담화는 전담 에디터 없이 돌아가며 작성합니다.
* 이 뒷담화는  키워드의 첫 번째 텍스트 <침묵>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글입니다.


*이번 모임엔 다희, 박루저, 이주, 연연, 해정,학곰님이 참여했습니다.
*본 녹취록은 ' <침묵> 발제문 : 신을 향한 믿음, 자신을 향한 물음'을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침묵을 어떻게 읽었나요


연연 : 일단 타인이라고 했을 때, 그다음으로는 신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발제에도 썼지만, 현실세계 너머의 초월 세계를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뭔가를 찾기 어려울 때 혹은 불가해한 상황에서 신을 찾게 되니까요. 저는 종교를 고민할 때, 왜 이런 믿음을 이어나가게 되는가 하는 것이 더 큰 화두인 것 같아요. 무엇이 계속 믿게 하는가 하는 문제요. 그랬을 때 이 <침묵> 속 사람이 시험에 든 것 자체가 그 화두를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믿음의 상황에서 불가해한 문제에 맞닥드렸을 때 인간은 믿음을 어떻게 이어가는가도 궁금했고요.


제가 고민한 답부터 이야기하자면, 신에 대한 믿음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이어나가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해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아무리 선순환을 한다고 하더라도 좌절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실천하잖아요. 그것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이 종교 활동인 것 같고요.


박루저 : 저는 종교를 믿는 것과 신을 믿는 것은 굉장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마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믿어가는 과정에서 이것이 분리될 것이라 생각하고요. 결국 이 책에서도 한 명 한 명이 가지고 있는 종교와 신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종교와 신이 분리되고 자기 나름의 믿음이 남는 방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역자 후기가 흥미로웠는데요. 일본인 해설은 무신론자고 한국인 옮긴이는 종교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한국 옮긴이는 보편적인 믿음을 확인했다고 적었어요. 저는 이렇게 다른 역자 후기 또한 자기만의 종교로 축소해나가고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다희 : 저자의 다른 책 <깊은 강>을 재밌게 읽었는데요. 그 책에서는 가톨릭과 불교가 합쳐지는 진리를 보여주는데, 거기서 강조되는 이야기가 '신은 양파다'예요. 그러니까 신은 사실 어떤 명칭으로 불리더라도 상관없는 존재라는 것이죠. 거기서 강조하던 가치가 이 책에도 잘 드러나 있어서 더 공감이 되었어요.


해정 :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이 깨달은 바를 저는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물음표를 남기고 끝이 났어요. 오히려 저는 계속해서 배교하는 기치지로야말로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종교인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 정도로 배교를 하면 수치스러울 법도 했을 텐데, 수치스러움을 인식함에도 끝내 다시 와서 죄를 고하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는 것이 신기했고요. 어쩌면 기치지로야말로 다른 의미로 믿음을 지속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는 결국 자신 혹은 종교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이라고 생각해요.



종교의 그림자, 배타성에 대하여


해정 : 한편으로는 이 소설에서 배교한 스승이 말했던 '일본에서는 신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이교도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읽히기도 했어요. 어떤 종교에서든 신은 정해져 있고 그것이 오염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인식하는 데 사이비를 용납하지 않는 신앙인의 말로 들렸거든요. 어떤 종교에서든 신의 형상을 그리고 그의 세상으로 가기 위해 순교한 이들이 숱한데, 이들을 사이비라고 해서 여기고 답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정당한 걸까 궁금해요. 이 모습은 마치 사이비는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종교인에게서 느끼는 독선적인 느낌이 났어요. 사이비란 대체 뭘지, 종교인이 아닌 저로서는 그 개념도 사실 모호하구요. 반면 주인공의 배교는 왜곡된 신일지라도 일본인이 믿는 신의 방식을 받아들인 방식인 것 같아서 좋게 읽었어요.


학곰 : 저는 군대에서 세례를 받았는데요. 그 당시에는 제게 믿을 것이 필요했어요 정말... 그래서 당시에 성경을 읽었는데, 읽으면서 처음에는 저도 납득이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미사를 보며 기도를 하다가 그날 아침에 읽었던 성경 구절이 떠오르면서 뭔가 느낌이 왔어요. 당시 제가 힘들었던 일이 있었는데, 성경의 어떤 구절 비유가 확 와 닿았거든요. 그러면서 아무 말도 안 해주는 십자가를 보면서 제가 스스로 정답을 찾게 되는 그 경험을 했어요. 그 계기로 기댈 곳이 필요할 때 절대자의 존재가 참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어떤 누군가가 절대자를 믿는다면 그것은 존중받아야 함도 이해를 하게 되었고요.


그런데, 제가 종교에서 납득이 안 되는 것이 이교도를 배척하는 문제예요. 나의 신, 너의 신이 모두 같은데 호명을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결정적으로는 독실한 기독교인 친구가 있었는데요. 그 친구가 이단인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준 찌라시를 찢어서 던지고 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이 왜 그렇게 타인에게 모욕을 주고 부정적인 배제를 할까 싶었어요. 성경을 다 읽고 법경을 읽고 깨달은 바는,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출발하는구나 생각했어요.


박루저 : 저는 사이비라는 단어 자체를 싫어해요. 애초에 현실에서 권력자들만의 동떨어진 유대교의 상황을 바꾸자는 것이 예수였잖아요. 저는 무신론자이고 종교도 없지만 당시 예수가 했던 행동은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로 삼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특정 종교를 이단이라고 지칭하는 것 자체는 폭력적 프레임이죠. 어쩌면 많은 이들이 기독교나 가톨릭이 가진 프레임으로 타 종교를 바라보기 때문에 사이비나 이단을 말하게 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이렇게 말하면 보통 종교인들은 사이비 종교는 인권 차원에서 문제가 많아서 옳지 않다고 하겠지만, 전체적 양으로 따지면 오히려 주요 종교의 악행의 양이 더 많지 않을까요?


그리고 기치지로가 이상하지 않았고 일상에서 만나는 종교를 믿는 이들을 조금 더 과장해서 만든 것 아닐까 생각했어요. 주변을 보면 청년 예수가 내세운 좋은 가치를 믿는다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현실에서 하는 행동들은 이와는 매우 다른 점을 자주 발견해요. 그러고 나서 <밀양>처럼 구원을 찾죠. 자신의 죄를 인간의 원죄라고 생각하고 구원을 찾는 합리화를 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요. 오히려 성경은 예수의 인간적 모습에 더 집중해야 더 확장적인 종교의 모습이 될 것이라고 봐요. 그래서 저는 주인공 또한, 예수를 인간적 모습보다 너무나 성스럽게 인식하는 것이 조금 어색했고 아쉬웠어요.


다희 : 종교 자체에는 깊이 들어가 말하고 있는 진리는 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에 문제가 있다기 보단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어서 잘못된 신앙이 생긴다고 봐요. 예수를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선악이 혼재되어있고 혼란스러운 현실의 모습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신의 모습을 성스럽고 따뜻하게 그리잖아요. 그러나 예수의 인간적 모습을 이해한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저는 <침묵>의 주인공도 유다를 생각하는 예수의 분노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적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했어요.  



믿음을 이어가는 이유


이주 : 저도 주인공이 예수의 인간적 모습을 이해했다고 생각해요. 예수의 성스러운 모습을 좇았지만, 실제 처한 현실은 자신의 모습이고 처참한 순교의 모습들을 보며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자연스레 깨달은 거겠죠. 저는 믿음을 이어가는 원동력은 '인간이 가진 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기치지로도 자주 하는 말이 '제가 약해서 배교한다'는 식으로 말해요. 결과적으로 그 '약함'이 종교를 이어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종교 없이 이겨내기엔 약해서 어긋나는 것을 저지르면서도 계속해서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연연 : 희망이 없으면 지속이 어려워서 희망의 몫을 신에 남기는 것이 아닐까요? 신을 생각하면 따뜻하고 포용하는 에너지로 상상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신의 실제 모습이 차가울 수도 있는데, 따뜻하게 이미지화를 하는 것 자체가 희망을 남겨두지 않으면 현실을 이어나가기 힘들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싶어요.


해정 : 신을 믿는 사람들이 죽어간 역사가 쌓여 있기에 그들에 대한 애도로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기도 한 것 같아요. 죽어간 사람들의 역사가 있기에 신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좋은 방식으로 그려온 것이 종교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죽어간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죽음으로도 믿음을 놓지 않은 것, 그러니까 신과 종교에 부착되어있는 여러 의미들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없다면 그건 너무 부당한 것 아닌가. 그런 애도의 맥락에서 믿음이 지속되는 것 아닐까요?


연연 : 맞아요. 의미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현실이 있으니까요.


다희 : 그리고 어떻게 보면 순교의 차원이 아니라, 박해를 받던 약자들의 역사와 신의 역사가 결국 일치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경 자체도 당대의 인권 선언이고 예수도 혁명가였기도 했으니까요. 정말 박해받은 이들의 믿음으로 종교가 이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박루저 : 예수의 움직임 자체가 굉장히 정치적인 움직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책에서는 정치적 메시지를 모두 배제한 채로 이어지는 것 같아서 아쉬웠어요. 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도, 일본에서 이들을 박해하는 것도 굉장히 정치적인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서사가 단지 성스럽지만은 않고, 현실과 정치의 문제들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로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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