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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ul 18. 2018

신을 향한 믿음, 자신을 향한 물음

25. 엔도 슈사쿠, 『침묵』

*느슨한 빌리지에서는 "타인"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신"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침묵>은 "신" 3부작 중 첫 번째 텍스트입니다.


길을 가다 보면 가끔 믿음이 있으시냐며 물어오는 이들을 만난다. (길을 묻고 나서 본론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믿음이 있으시냐니. 참 오묘한 질문이다. 대상이 분명하지 않을 뿐더러, 서술어가 주어로서 높임을 받는다. 하지만 엔도 슈사쿠의 장편소설 『침묵』을 읽으면 이 질문이야말로 종교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게 된다.


타인에 관한 텍스트 다음으로 타인과의 관계, 즉 실재 세계가 아닌 초월 세계를 다루고자 한다. 현실 세계에서 해결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문제에 맞닦뜨리면, 흔히 초월자를 찾는다. 다시 말해, 속세의 인과율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고통이나 사건을 마주하면 초월 세계에 그 원인을 묻는다. (하늘을 바라보며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대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묻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렇게 신을 믿게 되었는데, 그 신이 나를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그땐 뭘 더 어떻게 해야하나.  우선, 『침묵』을 따라가보자.



※ 아래 글에 등장하는 종교적 정보는 틀릴 수 있습니다. 오류 사항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일본으로 향한 로드리고와 가르페 (네이버 영화 〈사일런스〉)

#침묵

배경 가톨릭 박해가 일어난 17세기 일본

주요 인물 로드리고 신부, 가르페 신부 / 신도 기치지로 / 부교오(일본 지도자) 이노우에 / 페데이라 신부

줄거리 일찍이 일본에 건너 가 선교 활동을 하던 페데이라 신부의 배교 소식을 들은 로드리고 신부와 가르페 신부. 둘은 자신을 가르친 스승이 그럴 리 없다며, 진위를 확인하고 하느님의 뜻을 펼치고자 일본으로 향한다. 그들이 도착한 일본에서는 부교오 이노우에가 앞장서 성화를 밟는 행위를 강요하고 심한 고문을 하는 등 가톨릭 박해가 벌어지고 있었다. 숨어 다니며 선교 활동을 이어가던 두 신부는 여러 번 위험한 상황을 겪은 끝에 결국 가르페 신부는 순교하고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한다.


#왜 믿어요

  전에 갤럽에서 실시한 한 설문조사에서, "당신은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면 유신론자, "그렇지 않다"고 답하면 무신론자로 분류했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는 속세에서 설명되지 않는, 인과가 불분명한 고통을 마주할 때 신을 찾고, 고통의 의미를 구한다.


플리즈, 아버지! 내게 답을 알려줘! (사진 출처: unsplash)

초월 세계의 가치는 진리로서 성문화된다. 교리에 따라 정과 부정이 나뉘고, 사람들은 구원을 바라며 뜻에 따른다. 여기까지는 흔한 이야기다. 그런데 소설 『침묵』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제시된다. 사람이 신의 뜻에 따르고자 하면서 오히려 보다 많은 고통을 받게 되는 상황. 수많은 신도와 신부들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고문당하고 죽어나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계속 '침묵'하는 상황.


한 인간이 무참히 죽었는데도 바깥 세상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바보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순교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당신은 침묵하고 있는가? (186쪽)
고문 당하는 신도들 (네이버 영화 〈사일런스〉)

순교라는 거창한 이름에 지워진 수많은 개죽음을 목도한 신부 로드리고는 믿음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죽임당하는 자는 모두 가난하고 천하다. 신의 말씀에 따르면 그래서는 안 됨에도. 왜 하느님은 이런 고난 속에도 침묵하는가. 지친 로드리고는 결국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만일...... 물론 만일의 이야기지만......."
그때 가슴 한구석 깊은 데서 다른 소리가 속삭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무기둥에 묶여 파도에 씻긴 모키치나 이치소우의 인생은 얼마나 익살스러운 연극인가. 많은 바다를 건너 2년의 세월을 보내며 이 나라에 다다른 선교사들은 또 얼마나 우스운 환영을 계속 뒤쫓은 것인가. 그리고 지금,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는 산속을 방황하고 있는 나 자신은 얼마나 우스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106쪽)


  종교는 그 자체로 불가해한 질문이 된다. 사람은 왜 여러 고난과 시련을 감수하면서까지 보이지 않는 (존재를 확증할 수 없는) 초월자를 섬기는가. 이해 불가능한 현재(주로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을 '찾았'다면 그 신을 '믿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구도자는 어떻게 신도자가 되나.

   『침묵』은 질문에 답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주로) 로드리고 신부의 시점에서 서술하며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진리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로 인해 더 고통스워진다면, 답해주지 않는 신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있을 필요가 있는가?


#신은 있나요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은 태초부터 있었고, 세계만물은 신의 뜻에 따라 만들어졌다. 하느님의 존재는 의문의 대상이 아니다.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 신도는 그렇게 믿는다. 『침묵』에도 로드리고가 왜 신부가 되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일본의 신도들은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카톨릭을 받아들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거칠게 말해, 일본인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했다. 어쩌면 신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평등한 더 나은 삶을 꿈꾸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을지도.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자. '신은 있나요?'라는 질문에는 두 가지 논점이 있다.


1)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존재(있음)'은 어떻게 확증할 수 있나.


성경에 따르면, 이 질문은 잘못되었다.

네이버 영화 〈사일런스〉
히브리서 11장 [개역개정]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구절에서 신앙의 방점은 신-존재에서 믿음-행위로 옮겨온다. 그러니 '신이 존재하냐'고 물으면 '믿으면 보입니다'라고 (마치 '1루수가 누구야' 같은) 출구 없는 대화가 이어질 수밖에.

  꼭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생각지 않아도 좋다. 연인 사이에서 서로 사랑을 확인할 수 없어 마음 앓는 시간을 생각해보자.어느 웹툰의 설정처럼 사랑을 보여주는 어플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현존하는 과학 기술로는 증명할 수 없다. 서로 사랑한다고 믿기에 사랑이 가능하고, 이어지고, 현재한다.

   그러니까 신은 믿음의 이름, 즉 믿음이 형상화된 모습일 테다. 영웅과 같은 상징 말이다. 신의 존재에 관한 두 가지 논점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는 셈이다.


2) '믿음' 자체가 존재의 근거로, '신'을 현재하게 하며,

1) '신'은 그러므로 '자신이 믿는 무엇'을 가리킨다.


  비로소 '믿음이 있으세요?'라는 질문은 그 어떤 종교에 관한 질문(이를 테면, '어떤 신을 믿으세요?'나 '교회 다니세요?' 같은 질문)보다도 진실해진다. 그래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역설적으로 신을 가리키고 만다. 『만들어진 신』은 그 자체로 무신론이라는 신의 교리가 된다. 신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있다고 믿으면 있고 없다고 믿으면 없다. (현대의 과학이 보여주듯, 가시/불가시가 곧 존재로 이어지지는 않으니.)

  그러니까 로드리고가 "투쟁하여 온 것은 이노우에 지쿠고노가미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이 아니었다." 이노우에를 앞세운 일본 막부가 싸운 것도 하느님이 아니었다. "믿음에 대해서였다(286쪽)."

   

#어떻게 믿어요

  같은 맥락에서, 배교한 점은 같을지라도 로드리고와 페데이라는 매우 다르다. 페데이라 신부는 일본에서는 하느님이 "굴절"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가톨릭을 전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고 배교를 선택하는 반면, 로드리고 신부는 신도의 죽음과 배교라는 선택지 앞에서 배교를 선택한다. 로드리고는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신을 져버린다. 로드리고는 배교가 배신이 아닌 다른 형태의 신앙이라고 믿는다. 다른 형태의 사랑이라고. 페데이라 신부가 절대주의적인 종교관을 보여준다면, 로드리고 신부는 상대주의적인 종교관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러므로 로드리고는 기치지로를 이해할 수 있다. 기치지로는 소설 속에서 로드리고 신부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로, 유다와 닮았다. 그는 소설 전반에서 후반까지 몇 번이고 성화를 밟고 로드리고를 배신해 위험에 빠뜨린 후에, 몇 번이고 다시 로드리고 앞에서 고해성사를 한다. 거듭된 배신으로 로드리고(의 믿음)는 계속 시험에 든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기치지로를 쉽게 배신자로 낙인찍을 수 없다. 예수는 유다가 배신한 후에도 그를 제자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의 길을 가도록 허했으니까.


그분은 왜 결국은 자신을 배신할 그 사나이(유다)를 자신의 제자 대열에 포함시키고 있었던 것일까? (...) 게다가 만약 그분이 사랑 그 자체라면 최후에는 왜 유다를 쫓아 버린 것일까? (255쪽)
기치지로는 유다와 닮았다. (네이버 영화 〈사일런스〉)

로드리고는 스스로 배교함으로써 비로소 기치지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배교하며 겪는 고통이 신앙은 견지하며 겪는 고통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는 점을 깨달은 탓이다. 신을 찾게 했던 고통과 신을 믿음으로써 겪은 고통과 신을 배신하며 마주하는 고통 중 어느 것도 덜 아프거나 더 아프지 않기에.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그러나 당신은 유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가서 네가 할 일을 이루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너에게 성화를 밟아도 좋다고 말한 것처럼 유다에게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라고 말했던 것이다. 네 발이 아픈 것처럼 유다의 마음도 아팠을 테니까." (293쪽)


  『침묵』을 따라가면 처음 출발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왜 (신을) 믿는가. 믿기를 져버리지 못하는가. 기치지로처럼, 로드리고처럼, 페데이라처럼, 순교한 뭇 신도들처럼, 그리고 박해자 이노우에처럼 나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낙관이든 비관이든, 무엇이든 믿어야만 지금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 로드리고 신부가 인간의 운명에 조소를 보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조소를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은 옛날의 그것과는 다릅니다만 역시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290쪽)


  결국, 각자가 믿는 신은 다 따로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모두 자기화(의미화)하는 신은 다르듯이. 우리가 믿는 신은 삶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일지 모른다.

우리가 믿는 신은 내가 믿는 답일지 모른다 (네이버 영화 〈사일런스〉)




#책속밑줄

아름다운 것이나 선한 것을 위해 죽는 일은 쉽지만, 비참한 것이나 부패한 것들을 위해 죽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저는 그날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60쪽)
그러나 연민은 결코 행위가 아니었다. 사랑도 아니었다. 연민은 정욕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본능에 지나지 않았다. (212쪽)


#함께 보면 좋아요

영화 《사일런스》, 마틴 스콜세지

책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책 『성과 속』, 멀치아 엘리아데

책 『한 톨의 밀알』, 응구기 와 티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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