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과 구원에 대하여
*느슨한 빌리지에서는 "타인"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신"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밀양>은 "신" 3부작 중 두 번째 텍스트입니다.
신애는 어린 아들 준과 함께 밀양에 내려왔다. 남편도 없이, 남편의 고향이라는 밀양에 내려와 새 삶을 시작하려는 그녀는 극 내내 오리무중이다. “그 누구도 나를 모르는 장소”가 그녀에게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녀의 과거를 아주 잠깐 예감할 수 있을 뿐, 그래서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영화의 주인공이라기엔 딱히 호감형도 아니다. 드문드문 확인하게 되는 그녀의 속물적인 모습이랄지, 히스테리랄지. 그런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쨌든 영화 바깥의 내가 감정적으로 이입하기엔 조금 멀리 있는 사람 같다. 인물과의 이 거리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한동안은 그걸 고민했더랬다. 그녀를 ‘한 영화의 주인공, 신애’가 아니라, ‘영화’라는 이 강제적 틀거리 안에서 적어도 러닝타임이 지속되는 동안 유지될 시선으로, 조금은 버티어내듯 보아야하는 ‘보통 사람, 신애’로 그리고자 했던 걸까. 사람이 한 사람을 대하는 일에 정직함이 가능하다면, 그 모습은 결국 무언가를 버티어내는 것에 가까울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밀양>은 정직함과 조금 가까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인물의 마음과 행동과 얼굴을 다소 버티는 마음으로 보아야 했으니까. 신애라는 인물과 그녀가 겪는 고통을 영화적이고도 유려한 무엇으로 직조해내기를 포기한 것만 같은 영화 <밀양>은, 그런 태도를 통해 ‘고통’ 앞에서 가능할, 거의 유일한 윤리적 태도를 간신히 견지하는 듯하다고, 지금 당장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대하는 일에 있어 가장 난감하고 어려웠던 건 이 까마득한 거리감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겪는 지난한 과정 역시 너무나 까마득하다. 아무래도 모르겠는 것 투성인데, 아들을 잃은 그녀의 고통 앞에서도 나는 “아들이 유괴됐다.”는 문장 하나를 곱씹으며 순간순간 변하는 신애의 얼굴을 이해하려 애쓸 뿐, 그 과정에 함께할 수가 없다. 혹여 아주 잠깐이라도 슬픔이라든지, 그런 특정한 감정이 들이닥칠 때면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내가 진정 그런 감정을 가져도 되는 사람인가. 자기 혐오감에 가까운 무엇마저 느꼈다. 방금 네가 느낀 건 명백한 기만이 아니느냐고. 영화 <밀양>은 한 사람의 고통 앞에 절대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내내 호명하는 듯하다.
그렇게 무언가를 버티고 참으며 영화 말미에 다다르면 결국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고통을 극복하는 일, 그러니까 구원은 가능한가?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기까지가 이 영화의 1막이라면, 2막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 중심에 신애와 종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았던 신애는 갑작스럽게 (정말 갑작스럽게) 기독교인이 된다. 교회 안에서 거의 절규에 가까운 얼굴이었던 신애의 머리 위로 드리운 누군가의 손. 그 다음 컷에서 신애의 얼굴은 평온하다. 자신의 안에 깃든 하나님의 말씀과 그로 인해 가능했던 평화를 고백하는 신애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고통을 극복하는 일, 그러니까 구원은 마치 가능한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삶 바깥에 있는 나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다. 한 사람의 생에서 단절에 가까운 이런 점프가 가능한가. 그런데 혼자 있는 신애는 상을 차리지도 않은 채 우두커니 서서 밥을 꾸역꾸역 먹는다. 그러다가도 대뜸 눈물이 흐른다. 집 안을 메우는 어떤 소리에는 불현 듯 눈을 꿈벅이며 죽은 준을 그린다. 그렇게 준의 공백을 절감할 때면 공허한 얼굴로 누구든 부라린다. 여기에는 그 어떤 평화도 구원도 없다.
영화 속 누군가의 대사처럼, <밀양>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역시 존재한다고 말한다. 신애가 겪는 고통처럼. 그리고 그 고통을 극복하려는 그녀의 사투처럼. 구원을 통한 고통의 극복, 이 과정에 선제되어야 하는 건 그런 ‘보이지 않는 것’을 아는 일일 것이다. 그 고통을 알아야만 구원이 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저 그녀의 얼굴과 구토와 절규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대적으로 구원을 행하는 자일 수 없다. 그렇다면 신은? 혹은 그 신을 따르는 종교인들은? 이에 대한 <밀양>의 대답은 다소 절망적이다. 신은 내내 침묵하는 와중에, 종교인들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애의 고통과 사투를 말하더라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붕 떠있는 목소리와 일면 사무적이기까지 한 말들. 신애가 토로하는 말을 채 소화하기도 전에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는 위로와 기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또 그것을 말하는 종교가 구원에는 명백히 실패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지는 불쾌감은 이 괴리로부터 기인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그 사람들이, 정작 보이지 않는 신애의 고통을 조금도 예감하지 못하니까. 게다가 ‘용서와 구원, 불행과 기쁨’과 같은 단어들을 매끄럽게 말하니까. 거기에 어떤 주저함도 없으니까.
하지만 내내 불쾌했던 그 사람들의 모습은 곧 인간이 할 수 있는 위로의 모습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는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는 타인의 위로, 그 모습 말이다. (이건 극 내내 신애의 주변을 머무르지만 정작 신애에게 닿지 못하는 종찬의 모습 같기도 하다.) 결국 <밀양>은 “종교를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다”기보다 “구원은 불가능하다”를 말하는 듯하다. 고통 앞에 모든 것은 무력하다. 무력하지 않은 것은 오직 고통뿐이다.
극 내내 신애의 자세가 눈에 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독 눈에 띄게 꼬깃꼬깃한, 기도하는 뒷모습이라든지. 신에게 닿기를 열렬히 기원하듯 가슴을 젖혀들고 하늘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것만 같은 자세라든지. 이 자세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신애에 대해 거의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구원을 향한 그녀의 바람, 그 밀도와 무게이다. 가해자를 용서하겠다는 결심도, 어쩌면 신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의 연장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녀에게 종교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절실하고 절대적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유괴범의 말은 충격적인 것이 된다. 그녀가 용서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그는, 그 용서의 주체가 그 누구도 아닌 신이었다고 말하니까.
신의 명백한 배신 앞에 그녀는 종교와 신을 부정하기보다 (나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당신을 용서한 신이란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신애는 오히려) 신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하늘을 매섭게 올려다보며. 이는 얼핏 그녀에게 가능할 새로운 구원의 방향처럼 보인다.
한편, 급작스럽게 기독교인이 된 신애를 두고, “사랑했던 이들이 모두 죽고 없는 지금, 신을 따르는 이들이 말하는 ‘구원과 천국,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만 간신히 버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신을 진짜로 믿는 게 아니라 신의 말이 필요했던 거라고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그런 의심이 무색하리만치 신애는 이 복수로 말미암아 신을 거의 전적으로 긍정하는 사람이 된다. 그녀는 교회에서 절규했던 순간, 그녀의 머리 위로 드리운 누군가의 손으로부터 신을 분명히 예감한 것일까? 신을 적대하는 신애로 인해 종교가 긍정되는 이 순간부터, <밀양>을 “신을 부정하는 영화”라고 단순히 정의내릴 수가 없어진다. 그리고 신을 향한 신애의 복수 앞에서 나 역시 ‘신은 없습니다.’, ‘나에겐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전부입니다.’라고 감히 말할 수가 없게 되는데, 이 지점에 영화 <밀양>의 윤리가 깃들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그러니까 ‘나의 세계’를 전적으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동의할 수 없는 순간을 내게 요구하는 것 말이다.
그녀의 복수는 처절히 실패한다. 장로를 꼬드겨 하나님의 시선, 바로 그 아래에서 죄를 저지르고자 했지만 실패했으며, 그녀의 자해 역시 살고 싶다는 인간적인 욕구 앞에서 실패했다. 그녀의 시선은 늘 위를 향해있었으나, 그녀가 던진 돌은 가장 멀리 던져봤자 여기 근처 정도를 맴돌 따름이다. 신을 향한 복수의 실패는, 그 주체가 인간인 신애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명했다.
신을 향한 복수마저 실패한 지점에서, 그녀에게 가능할 모든 구원은 끝내 지연되거나 아주 사라라진 듯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명쾌한 구원은 없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 방문한 미용실에서 유괴범의 딸을 만났을 때, 신애는 아이와 말 몇 마디를 나누다가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미용실을 뛰쳐나온다. 신애가 기원한 구원이 용서로부터 가능한 거라면, 이 용서마저도 지연된 것이다. 자르다가 만 머리 모양은 종교와 복수를 거쳐 이내 그 무엇에도 명쾌해질 수가 없는 신애의 마음―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구원을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자르다가 만 머리 모양을 한 채로 하늘을 매섭게 올려다보던 그녀는 옷가게 앞에서 마주친 주인과 대화를 나누다 피식피식 웃기도 했다. 그 자르다가 만 머리 모양을 하고서.
집에 도착한 신애는 머리를 마저 자른다. 곁에는 종찬이 함께이다. 신애의 가위질과 함께 잘린 머리칼은 땅으로 가라앉는다. 카메라는 땅 위로 흩날리는 머리칼과 빛을 내내 비춘다. 그리고 그렇게 끝이 난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응시가 신애의 얼굴도, 종찬의 얼굴도, 다른 무엇의 얼굴도 아닌 땅 위의 작은 빛을 향해있다는 것. 하늘을 올려다보며 빛을 찾으려했던 신애의 바로 옆에, 이미 오래 전부터 드리우고 있었을 아주 작은 빛은, 고통의 해소나 구원은 불가능한 이곳에서 그럼에도 버티어 존재하는 인간의 동력을 희미하게나마 암시하는 듯하다.
이번 주 주제가 종교였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얘기가 담긴 글이고 싶었지만, 결국 고통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하게 됐다. 9년 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만 해도 종교에 대한 생각들이 숱했지만, 지금의 내게 이 영화는 더 이상 종교에 대한 영화이지만은 않게 됐다. 오히려 영화와 윤리, 그리고 인간의 고통에 대한 생각들을 빈번히 했다.
영화라든지 책이라든지, 사실상 거의 모든 서사 안에는 고통이 있다. 그건 결코 나의 것일 수 없다는 점에서 명백히 타인의 고통이다.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거의 모든 매체는 취약할 수밖에 없으나, 그 중에서도 영화가 가장 취약하고도 무력한 매체일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대다수의 영화는 그 취약함을 감추려든다. 쉽고 명백한 구원을 미끼로 삼고서. 하지만 영화 <밀양>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그대로 내보임으로써, 그 취약함과 무력함을 고백한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신애의 고통을 관객에게 납득시키려 들지도 않는다. 신애의 고통은 그녀의 것이지 영화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해소하지도 않는다. 역시, 그것은 신애의 것이지 영화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그것을 진득하게 본다. 보기만 한다. 그렇다면, 고통 앞에 절대적으로 무력하다는 이 덤덤한 고백과 응시는 지금 나에게 어떤 메시지가 되는가. 정말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구원의 낌새를 예감한다. 이를테면, 한 사람의 고통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자의 진득한 응시 같은 것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