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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Aug 20. 2018

신은 있는가, 믿음의 방식에 대하여

26-1. <밀양> 뒷담화

* <느빌>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록합니다.
* 발제문과 뒷담화는 전담 에디터 없이 돌아가며 작성합니다.
* 이 뒷담화는  키워드의 두 번째 텍스트 <밀양>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글입니다.


*이번 모임엔 다희, 이주, 연연, 해정,학곰님이 참여했습니다.
*본 녹취록은 ' <밀양> 발제문 : '고통과 종교와 구원'을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밀양은 어떻게 보셨나요?


해정: 밀양을 몇 년 전에 봤어요. 종교(신)라는 주제를 생각하고 이 영화를 떠올렸어요. 그런데 다시 보니 종교보다는 고통에 대한 태도가 눈에 띄더라고요. 그래서 그것을 중심으로 발제를 쓰게 되었어요.     


학곰: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지난 <침묵>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생각한 키워드는 ‘로컬’이었는데요. 로컬(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유대가 굉장히 완고하고, 이방인이 이 사회 안으로 들어오는데 중요한 연결고리로 쓰이는 게 ‘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침묵>은 선교를 통해, <밀양>은 교회를 다님으로 로컬의 단단한 집단안에 받아들여지니까요. 타지에서 정착을 할 때 교회를 다니란 말을 하는 것도 생각나고요(웃음)

     

다희: 발제문의 ‘슬퍼하는 것 자체가 자기기만이다.’라는 대목이 공감이 되었어요. 다른 영화였으면 슬프고 눈물흘려야할 서사인데, 내가 울 수가 없는 거예요. 주인공한테 내가 울면 실례인 것 같은 기분?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인상깊었어요. 지난 <피프티 피플>에서 우리가 모르는 타인을 어떻게 상상하고, 어떻게 거리를 둬야하는지 얘기를 했었는데 그것과 종교와도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타인을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놓고 본다면 믿음이나 신도 그런 것이지 않을까요?     


이주: 영화를 처음 보기 시작하면서는 아 보다보면 울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웃음), 다희님이 말한 것처럼 눈물이 하나도 안 나는 거예요. 전체적으로 거리감 있게 그려지기도 했고, 그래서 인물들의 행동에 이입하기 어려웠지만, 동시에 ‘그 사건’의 고통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라서 더 이입하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어쨌거나 <침묵>은 신은 어디에나 있다는 긍정으로 끝났다면, <밀양>은 더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문제의 그 장면, '구치소 면회'


해정: 영화에서 그려지는 교인들은 사랑, 구원, 믿음 이라는 말로 점철된 이야기를 신애에게 해주잖아요. 교인이 아닌 저는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약간의 의심(?)을 하면서 보았었는데요. 신애가 종교를 믿는 것도 “아! 안돼!”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더라고요(웃음)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 가해자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장면이었는데, 이 장면은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특히 더 충격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희: 저는 그 장면이 논란이 있던 부분이라 알고는 있었어요. 어떤 교회는 상영금지 시위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는 여기에 나오는 교인들이 전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전형성을 가진 사람들을 전부 모아둔 교회인 거에요(웃음). 그렇지만 흔하기도 한 모습이긴해서 보면서...(웃음) 저도 그 장면보면서 충격적이었어요. 가해자가 평화롭게 용서받았다고 말했을때 아... 어떡해야하지? 정말 저걸...          


해정: 가해자가 말한 하나님의 용서가 실제로 기독교안에 있는 가치인가요?     


다희: 잘못 취한 거죠. 부정적인 종교인의 모습인 거죠. 자기가 용서를 받았다고 피해자 유가족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안 좋은 종교인의 인간성이 다 합쳐진 모습? 그 자체가 기독교의 가치는 아닌거죠.



신을 대하는 신애의 태도에 대하여


해정: 신애가 구치소 면회를 다녀오고 자기나름의 방황을 하잖아요. 그런 과정들은 어떻게 보셨어요? 저는 그것도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만약 신애였다면 신 자체를 부정할 것 같거든요? 근데 신애가 화를 내는 포인트는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용서한 신’였거든요. 다시말해,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복수를 통해 신에게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처럼 보였어요.     

 

이주: 신애가 종교를 믿는 것 자체는 저는 오히려 이해가 되더라고요. 아이가 죽고 고통받는 상황에서 죽지 않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면 신을 믿을 수 밖에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나중에 안좋은 일이 생기면 신을 믿을 수 있겠다싶더라고요. 그렇지만, 그 방황하는 행동들까지 이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그렇게 믿음이 무너지는 상황을 겪고나면 저는 아무것도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런 것을 할 힘이 없었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한건 왜였을까요?     


다희: 신애가 처음 교회를 다닐 때 저는 이 인물이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인지 안 믿었거든요. 위태로운 얕은 믿음? 왜냐면 갑자기 180도 변한게 너무 슬픈 것이 있어서 그것을 억누르려고 연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구치소 면회 장면을 보면서 신애가 적극적으로 신을 믿고 있구나 하는게 확실히 느껴졌어요.

방황을 촉발시키는 요인은 배신감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기댔던 존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느낌이 복수로 나오는 것 같아요.     


해정: 아이가 죽고 신애의 집에서 같이 기도를 할 때 혼자 꺾꺾거리면서 울잖아요. 그 장면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온도로 종교를 대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저는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은유라고 생각하는데, 신애에게는 은유가 아니라 진짜 있는 것, 있어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방황을 보기가 힘들었어요.      


학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군대 입대하고 처음 성당에 간 날 앞이 안보이게 울었었어요(웃음). 십자가를 보고 있는 순간에,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을 외고 있는 주술적인 분위기속에서 내가 너무 힘들고, 고통받고 있고,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상황에서 누가 내게 손을 내밀어줬으면 하는 기분이 그때 딱 들었어요. 어느 순간 찾아오는 울컥함,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꺾꺾거리면서 우는 것은 정말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 잠깐의 순간, 울면서 해소되었던 그 마음이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해줄거야!’하는 생각보다는 내가 이 공간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후련해져. 하는 마음으로 두 번째 세 번째 교회를 나갔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한 두세 번 가다보면 종교인들의 이야기,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신’을 믿어야되겠다는 마음보다는 나도 모르게 동화되는 그런게 교회, 성당 같은 공간에 있는 것 같아요.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하고 차에 십자가 걸어놓고 교회에 나가잖아요. 처음에 그 사람도 믿음이 있어서 간 것은 아닌데, 가다보니까 가게 되는 말이 경험이랑 연결이 되더라고요.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어도 교회에 가는 이유는, 물어볼 상대가 필요해서였던 것 같아요. 왜 이렇죠? 하고요. 답은 돌아오지 않지만 절대자에게 얘기를 털어놓으면 마음이 정리되고 풀리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주: 앞으로 신애는 교회를 갈까요?   

  

해정, 다희: 아마 안 갈 것 같아요.(웃음)     


이주: 그래도 신에 대한 의문은 계속 가지겠죠?     


해정: 미용실 나와서도 신애는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닐까요? 내가 가는 장소마다 신의 뜻이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가해자의 딸을 보고 나와서 잠깐 하늘을 보잖아요. 왜 나를 이곳에 오게했는가? 하고요. 신애에게 ‘신의 존재’는 확실한 것이지만, 더 이상 교회의 방식일 수는 없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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