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세인트☆영멘>을 읽고
*느빌의 책방에서는 "타인"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신"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세인트☆영멘>은 "신" 3부작 중 세 번째 텍스트입니다.
지난 모임들에서 느슨한 빌리지 에디터들은 '신'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침묵> 발제문
<밀양> 발제문
두 작품을 보며 발견한 두 가지 공통점으로 이 발제문을 시작하려고 한다.
먼저, 신을 부르는 인간의 방식이다.
<침묵>의 로드리고 신부는 단지 기리시탄(*막부시대의 일본인 크리스찬을 이르는 말)이라는 이유로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을 속에서 끝없이 부르짖지만 침묵뿐인 하나님을 마주한다. <밀양>의 신애도 아들 준의 죽음 이후 기독교에 귀의해 안정을 찾는 듯 하지만, 교도소로 용서를 위해 살인자를 찾아간 날 그가 하나님 아래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을 하며 온화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고 무너진다.
인간은 신과 달리 불완전한 존재다. 거시적으로 보면 옳은 가치도, 거국적으로 의미 있는 희생도 높으신 곳에서 바라볼 때는 의미가 있을는지 몰라도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 된다. 로드리고와 신애는 신을 부른다. 도움을 청하고, 의심을 하고, 원망을 하며 돌아오지 않는 응답에 괴로워하고 계속해서 흔들린다.
말은 상대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할 때 그 말을 가장 먼저 듣는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이다. 때문에 남의 말은 어느 정도 흘려들을 수 있어도, 자신의 말은 발화자 자신이 온전히 들을 수밖엔 없다. 신을 향한 인간의 외침은 어쩌면 일방향적이다. 때때로 몇몇 사람들에게는 청각적으로, 시각적으로 때론 촉각적으로 응답이 돌아온다고도 하지만 대개의 기도는 피드백이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기도하는 이가 절대자에게 던진 물음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고 자신의 상황과 처지에 대해서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 과정에서 납득하여 현실을 견디거나 혹은 그 상황을 부정하며 반항하는 다양한 행동이 나타날 것이다. 똑같이 신에게 기도를 해도, 그 이후에는 인간의 선택이 개입되는 것이다. 때문에 절대자에게 기도를 하면서 인간은 역설적으로 주체성을 획득한다.
둘째, 로컬과 종교다.
<침묵>의 로드리고 신부는 일본,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 막부시대의 일본'이기에 그의 종교관과 사상, 존재까지도 배척당한다. <밀양>의 신애는 서울에서 밀양으로 내려와 정착하는 인물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갈등은 없을지어도, 서울 사람이 풍기는 감각은 로컬에 오래 거주했던 사람들에게는 배척의 대상이 된다. 이는 차별과 박해까지는 아니어도, 넘기 힘든 마음의 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드리고와 신애는 로컬의 주민들과 '종교'를 통해 연결될 수 있었다. 같은 신을 믿는다는 명제는 완전하게 원주민과 이방인의 통합은 이룰 수 없었겠지만, 최소한 교감은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타지에서 외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는지는 지역 바이 지역, 시대 바이 시대이기에 확률의 문제다. 중요한 포인트는 신이라는 절대자가 국적도, 지역도 때론 시대도 극복하여 사람과 사람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함께의 가치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크고 좋은 뜻이 있을지어도 그 가치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뿐이라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그중 몇몇 종교들이 타 종교에 비해 영향력을 갖는 이유는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의 수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의 목표 혹은 가치를 위해 나아갈 때 혼자 보다는 함께 일 때 힘은 커진다. 그리고 구성원들 역시 함께 일 때 자신의 믿음에 확신이 커진다.
로컬이라는 말은 배척적인 말이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그들의 생활, 색, 말씨, 스타일 등으로 해당 지역의 주민들을 후려치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로컬의 감각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데 익숙하다.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것, 이질적인 것(혹은 사람)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이방인은 함께 하지만 불편한 존재들인 것이다.
하지만 공통의 가치는 이를테면 국적, 학연, 군연, 취미, 소속 등 연결고리를 통해 이질감은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겠지만 원주민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마음속 허들을 조금씩 낮춰갈 수 있다. 그리고 <침묵>과 <밀양>에서는 종교가 그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신에게 기도를 하면서 주체성을 획득한다는 점, 로컬의 이방인이 원주민과의 연결고리로의 종교. 두 키워드로 이야기를 분석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신을 너무 도구적으로만 해석한 것은 아닐까?'
지난 모임 중에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고, 그분(신)의 부르심에 따라 자연히 흐르는 것이 인생이다."
라고 말이다.
여전히 큰 틀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선택하고 개척한다고 믿는 것들이 결국 정해진 뜻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인간의 입장에서 절대자를 바라보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신의 입장에서 인간을 본다면? 다른 시야와 다른 생각으로 종교를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세인트☆영멘을 만나게 되었다. 읽고 나서는 처음 생각했던 심오한 동기는 조금 사라졌지만 유의미한 텍스트였다.
세인트☆영멘을 굳이 분류하자면 '절대자는 우리 주변에 있어!'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브루스 올마이티, 에반 올마이티, 이웃집에 신이 산다 같은 영화, 그리고 신은 내게 얘기나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신은 좀 도와달라고 말했다 등의 소설같이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신을을 그리는 발칙한 상상을 다루는 장르(?)이기에 대개 유쾌한 감각이 살아있지만, 현실에 있는 종교를 다루는 텍스트들의 경우 때때로 진중하게 다루는 부류이기도 하다.
세인트☆영멘은 세기말을 넘기고 하계의 일본으로 휴가를 온 예수와 붓다의 이야기다. 종교적인 고증이 어긋나거나 신성모독(우상숭배 금지, 유일신, 신을 인간의 레벨로 격하시켰다 등) 문제는 피해갈 수 없는 주제지만 본 발제에서는 코믹만화의 특성을 고려해 감안하여 작성함을 밝힌다. 양해를 구한다.
세인트☆영멘은 예수와 붓다라는 두 성인의 캐릭터(성경이나 불경에 나온 성인의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모아 만든 일종의 캐릭터쇼다. 두 캐릭터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의 계율이나 교리는 잠시 내려두고, 타 종교와 스스럼없이 공존한다.
성인과 성인의 동거라기보다는 매우 다를 것 같은 두 외국인(일본인 기준에선 외국인이다.)의 동거 리얼리티쇼를 보는 것 같다. 십자가와 불상으로 상징되는 믿음의 상징들이 성흔, 후광 같은 특징만 남은채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론 예수와 붓다 모두 인간 출신(?)이기에 불완전한 인간의 특징을 갖고 있겠지만, '절대자' 혹은 '깨달음을 얻은 자', '평정, 평온, 용서, 사랑'과 같은 정돈된 키워드로 상징되는 두 인물을 전복시킨 것은 재미있는 시도였다.
거대한 권위에서 살짝 벗어나, 성인의 모습에서 인간적인(불완전하고 흔들리는 모습) 요소를 발견할 때 보는 이는 그 아이러니함에서 재미를 느낀다. 그 어긋남은 종교에 대해 믿음과 격식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격식의 엄중함은 어떤 효과를 가져올는지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나는 신자들이 그들의 믿음을 더 신성한 것으로 만드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교리는 신자들로 하여금 믿음의 정당성을 강화한다고 생각한다. (ex) 성당의 교리 공부) 진입장벽은 장벽 안에 있는 사람들의 함께 의식을 강화하는 동시에 믿을만한 가치를 동시에 생산하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와 붓다의 관계는 격식보다는 믿음 그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크리스마스에 함께 성탄행사를 즐긴다거나, 집안에 마트 행사로 받아온 불상을 한구석에 세워놓고 산다거나 하는 모습들은 격식과 행사보다는 각자가 갖고 있는 신념은 그대로 둔 채로 타인을 배려하는 모양새로 표현된다. 이를테면 크리스마스니 칠면조 고기가 먹고 싶다는 예수가 '아 붓다는 채식을 하지.' 하며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대목이 그렇다. 자신의 신념과 종교관에 맞춰 행동하기보다는 타인과 타인의 문화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보인다.
평범한 옆집 청년들이 신 일지도 몰라! 하는 서사는 아슬아슬하다. 물론 명탐정 코난처럼 '들키면 안 돼!'류의 이야기는 아니다. 외려 본인들은 숨기려고 노력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어긋남에서 오는 개그코드를 잘 활용한다. 혹시 아는가. 우리 주변에도 있을지 모르는 독특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이 신일지도? 이 세계 어느 곳에나 하나님(하느님)은 계시고, 모든 인간이 다 부처라는(아미타 신앙) 생각을 하면 나의 주변의 혹은 스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신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 이 뒷담화는 신 키워드의 세 번째 텍스트 <세인트☆영멘>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글입니다.
*이번 모임엔 다희, 이주, 연연, 학곰님이 참여했습니다.
학곰: <침묵>과 <밀양>은 무거운 주제인 듯하여 비교적 가벼운 텍스트를 골랐습니다. 다들 어떻게 읽으셨어요?
다희: 상상으로만 신들끼리의 우정을 상상해보았는데, 그 장면을 구체적인 그림과 대화로 볼 수 있어 즐거웠어요. 예수가 수영장에 들어갈 때 물이 갈라지고 부처가 롤러코스터 탈 때 득도해서 후광이 비치는 등 잘 알려진 종교적 정보를 활용한 유머 코드가 남달랐어요.
연연: 저는 <세인트☆영멘>을 만화책으로 10권까지 읽었는데, 초반에는 잘 알려진 종교적 정보로 웃겼다면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더 디테일한 설정으로 웃기더라고요. 저는 불경에 등장하는 붓다의 제자 아난자와 아들 라훌라와의 에피소드를 보고 작가가 경전을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요, 같이 본 기독교 신자 친구는 교회 고등부 학생들에게 추천할 정도로 성경 고증이 철저하다고 하더군요. 신성 모독이라기보다는 재해석인 거죠.
이주: 맞아요. 그래서 오히려 저는 따라가기가 힘들더라고요. 비신자인 제가 알지 못하는 종교의 인물과 설정들이 많이 나와서, 점점 공부처럼 느껴져 안 보게 되었습니다.
학곰: 사실 설정 자체를 신성 모독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으니까요. 그럼에도 <세인트☆영멘>의 설정이 가능했던 건 일본이기 때문 아닐까요? 일본의 종교적 바탕에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다신교가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성탄절이나 석가탄신일에 스님과 목사, 신부님이 서로의 기념일을 함께 축하하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결국은 위로 올라가면, 즉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신앙도 하나로 수렴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세인트☆영멘>이 좋았어요. 나의 믿음에 대한 존중을 바라는 만큼 너의 믿음도 존중한다는 태도가 <세인트☆영멘>에 깔려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붓다와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의 스승(신)을 존중하는 것만 봐도 그렇고요.
이주: 저도 학곰의 말에 동의해요. 일본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토속신앙을 믿고 명절이면 신사에 가서 소원을 빌잖아요. <침묵>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종교적 토양이 믿음을 펴는 데 장애물이 되었지만, <세인트영맨>에서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바탕이 되었던 거죠.
학곰: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건 다시 말해 신을 일상적 존재로 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일본이 유독 권위를 건드리는 아슬아슬한 유머를 잘할 수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