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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Dec 23. 2017

2. 전쟁과 분노, 그리고 용서 사이에서

드니 빌뇌브 <그을린 사랑>



0. 영화 선정 이유와 관련하여  


  지난주 <제5도살장>으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과연 전쟁 서사가 여성을 어떻게 다루고있나 하는 논의를 하게 되었다. 논의를 들으며 몇 가지 전쟁 서사를 떠올리다가 떠오른 것이 <그을린 사랑>이었다. 어쨌거나 여성이 이야기의 중심에 등장하는 전쟁영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선정 이유와 잘 맞는 작품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잘 맞는 점도 있고 잘 맞지 않는 점도 있는 것 같다.   


  <그을린 사랑>은 나왈 마르완을 중심으로 전쟁 속 여성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나왈 마르완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삶을 쫓아가며 전쟁 속에서 그녀가 어떻게 변화하게 되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를 보여준다. 주변의 어느 남자를 보조해주거나 보완해주는 존재로, 또는 남자를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쟁 속 여성의 삶을 다루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만하다.  


  하지만 <그을린 사랑>을 통해 전쟁 속 여성의 모습을 논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전쟁 당시의 여성들을 조명하고 비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을린 사랑>은 나름의 전달하고 싶은 메세지가 있으며, 결국 영화 속 여성의 모습은 이 메세지를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이자 철저한 허구이다. 때문에 이 이야기가 당시 전쟁 속의 상황-그리고 전쟁 속의 여성-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그럴 필요도 없다. (또한 감독인 드니 빌뇌브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레바논 출신도 아니며, 전쟁을 경험하지도 않았으며 여자도 아니다.) 때문에 영화 속 한 여인이 전쟁 속에서 감내해야 했던 많은 것들이 ‘그려진 여성’이라는 비판에서는 완전히 비켜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여성이라는 면 뿐만 아니라 <제5도살장>에서 이야기했던 '반전'과도 이어진 맥락이 있었기 때문에 본 영화가 떠올랐던 것 같다. 전쟁과 전쟁서사가 여자를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대해서는 차주에 또 다시 이야기될 것이니, 우선은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자 한다. 영화 속에서 전쟁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에서부터 시작하자.   

 


1. 배경으로서 존재하는 전쟁  


  우리는 흔히 전쟁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에 이입하게 되고 적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는다. 대부분의 전쟁 서사에서는 개인이든 국가든 주인공과 그 주변을 공격하는 '악'의 존재가 등장하기 마련이고, 끝내 그 '악'을 물리치며 영화가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을린 사랑>에서는 나왈의 이야기가 중심이며, 전쟁은 철저히 배경으로서만 존재한다.


  물론 전쟁이라는 배경이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전쟁은 나왈의 삶에 불쑥불쑥 찾아와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발생했으며, 누구와 누구가 싸우는 것인지를 파악하기까지는 영화를 어느 정도 보고 난 후에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마저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어느 한 나라에서 일어난 내전을 배경으로 하며, 그 내전은 종교 및 정치로 인한 것이라는 정도만 알 수 있다. (실제로 감독은 영화의 배경을 레바논으로 특정하지 않고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요르단 사이에 낀 조그만 지역, 가상의 국가로 설정했다고 한다.)


  이것은 <제5도살장>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쟁의 시작과 끝이나 전쟁 속 영웅을 다루지 않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전쟁을 서사화하고 미화시키기 보다는 배경으로만 집어넣었다. 대신 그 속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나왈이 겪는 고통이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보편적인 경험이 되며, 어느 한 전쟁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대된다.

 


2. 진실은 진실을 깨고서 진실이 된다  


  영화 중간에는 잔느 마르완이 조교로 있는 수학 수업 이야기가 나온다. 교수는 강의를 시작하며 “여러분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수학은 정확하고 분명한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답을 찾는 거였어요. 하지만 이젠 완전히 다른 모험을 시작할 것입니다. 아주 어려운 주제를 다룰 것이며 그건 항상 또 다른 어려운 문제를 낳게 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수학의 진리는 잔느와 시몽 앞으로 찾아온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어머니 나왈이 남긴 유언장이야말로 아주 어려운 문제였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형을 찾아서 편지를 전하라니. 그리고 이를 풀기 위해 어머니가 행방을 쫓아가면 갈수록 그 속에는 충격적인 진실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 진실 속에서 만난 것은 내가 알던 어머니가 아닌 다른 모습이었다. 정치범으로 수감돼 15년동안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그 감옥살이 중에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이로 인해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문제의 마지막 지점에 다다라서 ‘1+1=2’가 아니라 ‘1+1=1’이란 진실에 다다르게 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밝혀지며, 잔느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관객들도 충격적인 진실 앞에 놓이게 된다. 이와 같은 문제 풀이의 서사는 결과적으로 전쟁이라는 상황에서는 정확하고 분명한 답 따위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을 바깥에서 보았을 때에는 적이 확실하고 전쟁으로 인한 결과도 확실하지만 실제 전쟁은 그렇지 않다. 적과 동지는 반으로 나눠지지 않고 진실로 믿고 있었던 것은 더 이상 진실일 수 없다. 결코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도 아무렇지 않게 자행된다.     



3. 어머니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까?  


  나왈은 긴 기간 동안 복수심을 품고 살아왔다. 처음에는 남편의 죽음과 아이를 빼앗긴 것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복수심이었으나 버스 사건을 통해 나왈은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끝내는 그 복수를 이루고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감옥에서 지낸 15년 동안도, 결코 적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랬던 나왈이 아부 타렉이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채는 잠깐의 순간에서 결말의 용서로 이어지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그 순간 이후에도 나왈에게는 많은 고뇌와 괴로움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영화의 서사는 그 이후의 시간은 깊게 다루지 않기에 그 고뇌의 순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때문에 마지막 짧은 편지만으로 그녀가 느꼈을 모든 감정을 알기는 어려웠다.


  어떻게 그 모든 고통을 용서하고 함께하라는 메세지를 남길 수 있었을까. 용서와 이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복수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다. 진실을 알게 된 잔느와 시몽, 편지를 받은 니하드가 그 모든 것을 감내하도록 한 것이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운 결말일 것이다. 그들의 고통의 몫은 영화 속에서 깊게 다루어지지 않지만 그저 좋게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국내에서는 ‘그을린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사실 원작의 제목인 ‘incendie’ 는 ‘화재, 전란, 감정의 고조, 폭발’ 등을 의미한다. 왜, 어떤 경로로 한국 영화의 제목이 ‘그을린 사랑’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전쟁으로 인해 그을려진 나왈의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허나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 제목으로 인해 마지막 결론은 ‘어머니 나왈의 위대한 사랑’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여버림으로서 진실 이후의 괴로움과 고통에 대한 고민과 비난을 막아버린 것이다.   


  물론 용서는 좋은 것이다. 용서는 분노와 복수심을 끊어내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섣부른 용서는 위험한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확실히 구분되지 않고 피해자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 때 가해자이기도 한 누군가가 피해자의 입장에서만 쉽게 용서를 하고 모든 것을 덮어버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화의 메세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이 영화의 메세지가 쉽게 '용서', '사랑'으로 해석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좀 더 치열한 고민을 통해 영화가 개개인에게 하나의 메세지를 형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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