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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Dec 17. 2017

1-1. 제5도살장 뒷담화

첫 오프라인 모임 & 열렬한 대화의 현장으로!

Photo by Kapil Dubey on Unsplash


* <느빌>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록합니다. 느빌사람들의 열띤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겠습니다.

* 발제문과 녹취록은 전담 에디터 없이 돌아가며 작성합니다.


1. 첫 오프라인 모임


2017년 11월 4일, 합정의 어느 카페. 역사적인 첫 오프라인 모임이 열렸다. 

그렇다. 독서모임의 패러다임을 바꿀 <느슨한 빌리지(이하 느빌)>가 출범한 것이다.

라고 거창하게 시작해보았지만,  사실 <느빌>이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시작은 소설-시나리오 창작 학회 <필담>의 소모임 <어쩌면 수요독서회>이다.  

<어쩌면 수요독서회>는 근근이 살아남아 알음알음 사람을 모았고, 아름아름 모임을 유지하다가 내부 사정으로 잠정 폐쇄되고 만다. 휴식기라는 이름 아래 몇 주의 시간이 흐르고 <어쩌면 수요독서회>는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때였다.



죽어있던 단톡방에 새 카톡 알림이 울렸다. 



독서... 독서모임이 하고 싶어요.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현재 그 단톡방은 <느빌>방으로 대체되어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슬램덩크의 정대만 같은 절박한 외침을 던졌고, 모임원들은 그 응답에 부응했다. 아니, 통성기도를 하듯 모임의 부활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그다음 주에 바로 긴급회의가 열려 앞으로 읽을 책을 선정하고, 1회의 파일럿 모임을 가졌다.(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파일럿 모임의 이야기를 따로 풀어보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임원들은 생각했다.



이 모임이 흩어지는 시간에 그치지 않았으면...
모임의 흔적들이 모여 가치 있는 콘텐츠가 되었으면...



이 작은 아이디어는 이번 모임을 통해 구체화되었고, 모임원들의 어색한 관계(?)를 고려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느슨한 공동체'를 만들자는 취지로 <느슨한 빌리지>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



여차여차하여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느빌>, 그 첫 모임에서는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다뤘다.


제5도살장(2016)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을는지 한 번 확인해보자.



*이번 모임엔 학곰, 박루저, 다희, 동석, 이주, 일벌레, 오요밍 님이 참여했습니다.

*본 녹취록은 이전 게시글인 '발제문'을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참고 링크 : 제5도살장 파워 발제문

https://brunch.co.kr/@neuvilbooks/6




2. 녹취록 - 제5도살장



1. 시작- 한국의 포스트 모던과 제5도살장(비-장)



*박루저의 발제문을 읽고



학곰 :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적용 범위가 큰 용어라고 생각해요. 제5도살장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엔 동의하나, 이 작품이 ‘포스트모던’하게 의도되어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평가는 작품이 나온 후에 이뤄지니까요.



더불어 발제문에 쓰신 한국의 포스트 모던은 맥락 없이 형식만 차용되어 우스운 코메디 라는 말에 대해, 사실  발제문에 쓰여있는 [맥락]이라는 것을 저는 ‘주류 예술’의 맥락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이해했어요. 그렇지만 ‘주류’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닌 것에도 맥락은 있다고 생각해요. 작품 하나가 스스로 맥락을 형성해갈 수도,  주류가 아닌 어떤 것의 맥락 속에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맥락’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관점이자 평가가 아닐까요? 그래서 한국의 포스트 모던은 우스운 코메디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박루저 : 포스트모던이 마구 쓰이는 넓은 의미라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이른바 포스트모던한 형식(예컨데 박민규나 미래파 시인이나)적 실험들은, 주류의 맥락을 벗어나고말고를 떠나 그 자체의 주관적 맥락도 전혀 읽히지 않고 그저 형식적인 어이없음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발제문에서도 말했지만 전복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근데 이 형식적 전복을 비평가들이 포스트모던이네 해체네 어쩌고 하면서 상찬하고 흉내 내는 비슷한  작품들이 확 많아지니까 결과적으로 문학계 전반이 '그들만의 리그'처럼 난해해진 게 아닐까 합니다. 



커트 보니것의 소설에선 ‘전쟁의 서사화’ ‘개인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등등의 기존과는 다른 전복적인 가치들이 그 형식 자체만으로도 읽히는 반면, 한국문학에서 포스트모던이라고 비평가들이 상찬 했던 작품들엔 그러한 가치들이나 맥락들이 읽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건, 일부, 아니 어쩌면 다수 문학 읽는 사람들의 오만한 태도예요. 문학부심이 있는 사람들은 흔히들 자기계발서나 힐링 서적들 잘 안 봅니다. 그리고 이런 책들이 베스트셀러 올라가면 쯧쯧하며 개탄해요. 그러면서 유행따라 가볍게 책 읽는 대다수 사람들이랑 진짜 가치 있는 책을 읽는 뿌듯한 본인과는 구분합니다.



근데 실은 오히려 이런 분들 때문에 문학의 가치가 정말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해요. 이런 분들의 기준은 자기 자신한테 나오는 게 아니라, 유명한 비평가나 혹은 다른 문학인들의 기준을 그대로 들고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386을 까는 그 아래의 세대는 386을 까면서 자신들의 언어를 말하는데, 우리는 그 세대를 까지 못해요. 예컨대 장강명이 우리 세대를 말하는 거 같지만 그건 우리 세대에 결코 속하지 않는 스타작가가 우리의 모습을 날카롭게 묘사한 것일 뿐이거든요. 우리 나름대로는 또 장강명의 그런 태도가 불편해야 하고 여기에 장강명이랑은 구분되는 당사자로서의 목소리를 내야 마땅한데, 우리는 여전히 장강명이 마치 우리 세대의 마음을 대변하는 양 젊은 작가라고 상찬하기만 하잖아요.



 2. 왜 보니것의 책은 2000년대 이후에나 한국에 나왔을까?



학곰 : 보니것을 SF라고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제5도살장에는 SF적인 요소들이 보입니다. 보니것이 한국에서 늦게 번역이 시작된 것에 대해 저는 한국의 SF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와서 말해보겠습니다. 이 내용은 대학의 한 SF 수업에서 배웠던 것을 인용하는 거예요.


 

한국의 SF, 혹은 판타지는 ‘문학’이라기보다는 그보다는 낮은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 스타워즈가 빵빵 터지면서 SF-판타지 등 장르문학이 성장할 때, 한국은 민주화운동이 한창이었지요. 민주주의라는 ‘중요한 가치’가 우선시되었기에 상대적으로 상상력과 재미가 주요소인 장르문학은 ‘더 중요한 것’보다 차순위였고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하이텔, 나우누리 등의 PC통신 커뮤니티를 통해 이영도 등 대형작가들이 등장하고, 장르문학의 붐이 일었으나 ‘대여점’ 중심의 사업들이 작가들을 소진시키고(한 작품이 끝나면 바로 다음 작품을 만들도록) ‘양판소’라는 말이 대변하듯 글의 퀄리티를 보장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장르문학’은 ‘하급’, ‘문학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은 막연한 선입견 형성에 기여했지요. 



그렇지만 요즘의 장르문학은 조금 결이 다릅니다. 재평가를 받고 마니아를 만들면서 파이를 키워가고 있지요. 오늘날에서야 이런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독자들이 비로소 ‘장르문학’을 받아들일 여유가 생기고, '장르'라는 전에 없던 분류체계가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해봐요. 80년대에는 ‘더 중요한 가치’ 때문에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면, 90년대를 거치며 새로운 장르에 대한 감각이 쌓여 지금이 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니것의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떤 작가라고 분류하기가 어렵습니다. ‘보니것’이라는 작가는 우리가 한국에서 이전까지 쌓아온(읽어온 혹은 배워온) 카테고리에 없는 스타일을 구사합니다. 한국 독자들이 받아들이는 데도 역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요즘에서야 그 감각이 전해지게 된 것은 아닐까요? 아, 물론 다 뇌피셜입니다.



3. 제5도살장 속 여성들은 어떻게 재현되는가?



다희 : 음...  그런데 제5도살장도 결국 무엇인가를 복원하고 서사로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이 책 안에서 사라져 있는 존재들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예컨대 이 소설에서 여성에 대한 묘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그녀는 뒷부분을 다 읽지 못하고 모임에 참석했다.) 앞부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죽음의 허무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모든 존재들이 결국 전쟁 상황에서 어이없게 죽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존재들을 같이 묶으면서 성별이나 젠더는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요? 끝까지 내용을 더 읽으신 분들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학곰 : 이 책은 이렇게 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이라고 명시했지만, 이 이야기를 쓴 커트 보니것은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 소설을 쓸 수 있었지요. 그리고 작가 본인이 드레스덴이라는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그 현장에 있었기에, 이 책은 ‘기억의 복원’ 작업이 됩니다. 기억은 기승전결로 구성되지 않지요. 파편화된 채로 강한 기억, 내게 임팩트를 준 좋았던 혹은 나빴던 사건 중심으로 남을 것입니다. 때문에 기억을 백 퍼센트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시간의 순서를 어그러뜨리거나 트랄파마도어를 서사에 끌고 들어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덧붙여서 이 책에서 전쟁 속 ‘여성’을 찾는 일에 대해, 비난을 무릅쓰고 약간의 변호를 해볼게요. 그 주제는 이 책보다는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같은 책에서 찾는 게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제5도살장에도 여성은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주인공 신체적으로(덩치) 경제적으로 그보다 우월한 존재로 그려지는 빌리 필그림의 부인, 그가 포로로 이송될 때 마주하는 감자를 먹는 여성이나, 수용소에서 본 어린 여자들의 모습들이 그 예시죠. 



이 책의 시선은 온전히 ‘빌리 필그림’의 것입니다. 전쟁 속에서 지워진 수많은 여성들을 못 보거나, 지나칩니다. 그러나 간혹 보는 여성에 대해서는 결코 ‘성적 대상화’ 하지는 않습니다.(이를테면 저 여자와 한 번 하고 싶다. 거나 그들의 육체를 질척거리게 묘사하는 등의 표현 말이에요.) 그저 뚱하게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묘사가 더 많은 이유는, 전쟁 속에서 ‘생존’이 우선이 되는 순간이기에 주인공이 타인에 대한 관찰이나 감정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빌리 필그림의 시야가 좁은만큼, 그가 볼 수 있는 전쟁의 풍경도 좁은 거죠. 어떤 명분으로 2차 대전이 발발하고,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전쟁을 하는지는 당최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가라는 곳으로 향하고 시키는 대로 움직일밖에요. 그래서 빌리는 결코 큰 그림을 볼 수 없어요. 그의 앞에 있는 건 그저 오늘 먹을 감자와 내 옆에서 죽어가는 동료들 정도뿐이죠.



다희 : 꼭 기억의 재구성에서 등장 횟수가 공평해야 한다는 의견은 아니었어요. 전쟁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행위 중 하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었습니다. 


(+덧)

그리고 모임 후 더 읽어보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오히려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 편인 것 같아요. 전의 궁금증은 다 안 읽어서 생겼던 것이었네요...(반-성) 오히려 한국 문학에서 전쟁을 다루는 방식보다는 훨씬 불편하지 않게 읽히더군요. 최근에 김훈 문학세계에 대한 강의를 들어서 더 그런 의문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전쟁의 무의미를 사유하는 주체가 남성으로만 그려지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주제였어서... 그런데 오히려 이 소설에서는 반전소설 쓴다는 작가한테 비난조로 이야기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그런 장면들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국문학에서는 이런 부분들이 비교적 아쉬운 이유가 뭘까요? 이 자체가 우리가 생각 볼만 한 문제의식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박루저 : 저도 학곰님 의견이랑 비슷해요. 여성이 등장하지 않은 것 자체가 문제라고는 생각 안 해요. 관점이나 결 자체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기존의 서사에 적용되는 기준으로 젠더 밸런스를 말하는 건 맞지 않는 거 같아요. 그래도 전쟁-여성이라는 키워드를 생각해보면, 다희님 문제제기는 여전히 분명히 의미 있는 일인 거 같아요. 전쟁에는 분명 남성만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도 동원되고 희생당하는데, 전쟁을 다룬 대다수 텍스트는 남성들로 채워져 있잖아요. 서사 안에서 주목하는 것도 전우애 형제애 애국심 이런 남성적인 가치들이고요.  전쟁 속에서 여성을 다룬 텍스트들이 매우 궁금하긴 하네요. 



이주 : 저도 이 소설 속에서 여자가 어떻게 그려지는지는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긴 하지만, 전쟁 속에 여성이 어떻게 그려지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혹시 영화 중에 <그을린 사랑> 보셨나요?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전쟁 영화라고 하니 문득 떠오르네요. 전쟁 속의 개인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제 5도살장>과 연결성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4. 그런데 왜 외계인이 등장하는 걸까?



이주 : 왜 하필 외계인이라는 소재를 사용했을까요? 사실 소설 속에 나오는 외계인의 시간 인식 개념이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와도 유사한 측면이 있어서 신기했어요. 



(+덧)

약간의 스포가 있지만 덧붙이자면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칠발이(에디터 동석의 표현을 빌렸다) 친구들은 헵타포드 문자를 사용한다. 칠발이 친구들과 헵타포드 문자는 둘 다 어느 쪽에서 보아도 상관없는 비선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상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은 죽어간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정방향, 늙어가는 방향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칠발이 친구들은 다르다. 시간의 개념도 비선형적이다. 시간의 방향은 정방향, 역방향 때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리고 그 시간을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제5도살장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의 시간도 '인간적'이지는 않다. 과거로 현재로 미래로 또 현실인지 아닌지 모를 세계로 시공간을 끝없이 넘나 든다. 그러나 그에겐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않다.



학곰 : 외계인은 인간이 아닌 제3의 종족의 시선에서 보면 ,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 객관적으로 쓸 수 있어서 넣은 게 아닐까요.



이주 : 트랄파마도어인의 시간 인식에 따르면 모든 순간은 이어져있고 인과관계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잖아요. 전쟁의 상황에서 빌리는 끊임없이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했을 것 같아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괴로워야하나를 생각하다가 그 괴로움 속에서 혼자 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모든 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5. 반전소설 그리고 위선, 뭐 그런 거지.



동석 : 근데 이 소설은 한편으로 앞으로의 전쟁, 혹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학살 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요. 그러니까 이때는 생존자가 있었지만, 앞으로의 전쟁에는 생존자 따위는 없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경각심을 일깨우는 소설로도 읽힙니다.



학곰 : 군대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게요. 저는 아침부터 어떤 흙더미 앞으로 차출이 되었어요. 간부의 명령은 흙을 50자루 정도 쌀 마대에 담으라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오전 내내 가열차게(?) 삽질을 했습니다. 일을 지시한 소대장에게 물어도 돌아오는 건 빨리 마대나 채우라는 말 뿐이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흙은 우리가 모시는 대령의 집에서 키우는 개집 흙을 갈아주기 위해 푼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맥락을 모르고 움직이는 빌리 필그림의 시선에서는 ‘반전’이라든가 ‘거대한 명분’은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보는 시선으로는 내 옆의 동료가 죽어나가고, 폭격에서 살아남는 풍경을 담는 것일 뿐이에요. 때문에 그에게는 ‘반전’이라는 맥락이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 맥락으로 책을 읽는 것이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위선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맥락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대상과 거리를 둔 채로 텍스트를 읽은 것이기에.



제대로 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82년 김지영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제가 평생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책을 읽고 나서의 감상이, 아! 한국 여자들 불쌍해. 라든지 여성 혐오를 근절하자!라고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나’는 이전까지 겪지 못했고, 앞으로도 겪지 않을 일에 대해 ‘평가’할 자격이 없거든요. 제가 취해야 할 스탠스는 그저 내가 모르는 세계를 사는 이의 목소리를 잘 듣고, 내 입장에서 재단하거나 그들에게 충고를 하지 않으며, 내가 그들에게 실례가 될 행동을 하지 않는 것. 정도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읽고 나선 가만히 듣는 것에서 한 발자국 나와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자로 바뀌긴 했지만.



때문에 소설에서 맥락을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너는 그렇구나.’하고 있는 그대로 듣는 태도가 내가 생각하는 괜찮은 스탠스라고 생각합니다.



다희 : 이 소설에서 계속 파편화된 개인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것이나, 82년생 김지영에서 주인공의 일대기를 말하는 것은 모두 피해자의 증언인 셈이지요. 우리가 피해자 서사를 읽을 때 주의할 점은, 다 읽고 주인공에 대한 연민으로만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연을 읽고 다른 다양한 사연들까지 상상하는 것으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지영을 읽은 후 그랬듯이. 



박 루저 : 이 소설을 단순히 반전소설로 분류한다거나, 혹은 이 소설에 포착된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우리의 인간성을 확인하거나 경각심을 갖는 건 매우 단순한 감상이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위선이고요. 발제에서도 말하였지만, 드레스덴과 비슷한 대학살은 그 이후에도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지구에 여전히 일어나고 있어요. 내 주위에서도요. 쿠르드족은 세계대전 이후에도 몇 번이나 대학살을 겪었고, 로힝야족 역시도 최근 꽤나 가까운 나라에서 일어난 대학살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을 겁니다. 우리는 이런 국제적 뉴스들을 매우 수동적으로 ‘소비’할 뿐이에요.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나 올라야 한번 클릭할 뿐이고, 그 역시도 이미 누군가의(거의 강대국의) 시선으로 포착된 뉴스를 그냥 사실로 받아들이고 맙니다. 진짜 실체가 뭐인지 알아보려는 노력은 거의 하질 않죠. 심지어 우리 역사 속의 수많은 학살에 대해서도 사실은 매우 무관심하지 않나요. 



이런 우리 모습은 죽음에 대해 ‘뭐 그런 거지’라고 반응하는 비인간적인 소설 속 묘사와 거의 다를 게 없는데, 근데 이런 소설을 비인간적이라고 하고, 인간성에 대한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건 매우 위선이 아닐까요. 그런 상식적인 교훈조차도 문학을 끌어들여 말해야 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게 없지 않습니까? ㅜㅜ 제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겨우 당위적인 교훈한 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러기엔 문학이 너무 아까워요. 내 모습을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문학의 메시지를 내 실존과 연결시키고 감수성을 넓히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감상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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