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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Dec 16. 2017

1. 싸구려 인간성과 반(反)전에 대하여

커트 보니것 <제5도살장>


0. ‘전쟁’이라는 텍스트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중에서 서로를 전멸시킬 듯이 죽음으로 몰아가는 잔인한 종(種)은 인간밖에 없다고 했던가. 그런 점에서 전쟁이라는 거대서사는 인간성을 다양한 결로 포착할 수 독특한 역사이자 텍스트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역사와는 달리,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재구성되는 순간 매우 위험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로, 전쟁은 그럴싸한 '스토리'로밖에 기록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토리로 스-윽 바뀌는 이 과정은 매우 논리적이고, 인과적이며, 심지어는 흥미롭다. 전쟁이라는 디스토피아가 재미난 ‘서사’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 서사에는 당연히 '히틀러', '루스벨트', ‘스탈린’이라는 주인공들이 있으며, '연합군 vs 추축국'이라는 갈등 역시도 명확하다. 또한 '독일의 폴란드 침공'부터 '히틀러의 죽음'이라는 시작과 끝 역시도 명쾌하다. 그리고 이 시작과 끝 사이에는, 수많은 인과관계들로 촘촘히 메워진 과정들이 작은 전투들로 들어선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결코 설명할 수 없어야 할 전쟁은, 매우 논리적이고 인과적으로 설명 가능한, 하나의 '스토리'가 된다.     


두 번째로, 거리를 둔 채 객관적으로 전쟁을 감각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순간, 우리는 전쟁 속에서 아름다움마저 찾아내고 만다. 각종 무용담, 인간애, 전우애, 희생과 같은 수많은 서사적 요소들을 캐치한 모든 전쟁 스토리들은 그렇게 생겨난다. 전쟁이라는 매우 비인간적인 역사 속에서 인간적인 텍스트를 발견하는 폭력이 교묘하게 작동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사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과거의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전쟁은 하나의 그럴싸한 거대한 스토리로 교묘하게 바뀐다. 이성과 논리는 이 비이성, 비논리의 거대서사를 복원시키는 데 동원되며, 이 총체적 거대서사 속에서 개개인은 사라진다. 그래서 전쟁 서사는 매우 전체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아이러니를 동반한다.



고렇다면 전쟁을 다룬 <제5도살장은>?



커트 보니것은 이러한 폭력적 아이러니를 거부한다. 그것도 매우 유쾌발랄한 방식으로!    



1-1. 뒤죽박죽 기억 - 탈서사화    

 

<5도살장>은 총체적 거대서사로의 전쟁이 아니라, 겨우 한낱 개인에게 들이닥친 전쟁과 개인의 상처를 그린다. 실제 개개인이 감각했을 전쟁은, 결코 일목요연하거나 인과적이지 않다. 개개인에게 전쟁은 매우 맥락 없이, 나와 내 가족들을 갈라놓고 내 주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었으며, 여기에는 주인공 따윈 없다. 당연히 ‘시작-끝’이나 ‘원인-결과’도 없다. '연합군 vs 추축국'이라던가 '전체주의 vs 자유주의‘라는 갈등 축은 역사적으로 서술한 국가적 관점일 뿐, 전쟁을 수행한 개인에게는 눈앞의 살인자만이 있을 뿐이다. 날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죽여야 할.

어떠한 인과관계나 맥락 따위도 개인의 서사에는 없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5도살장>엔 전쟁의 거대갈등이나 인과관계 따위는 없으며, 전쟁으로 망가진 개인의 내면과 후유증만이 그려질 뿐이다.

시작과 끝을 정해놓고 인과적으로 묶어내는 서사화를 피하기 위해서 트랄파마도어인의 감각을 빌릴 수밖에 없었으며, 덕분에 인과관계는 모두 무너지고 시간들을 뒤죽박죽 섞을 수 있게 된다. 전쟁 이전이 3차원이자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계였다면 전쟁 이후는 4차원이자 외계인의 세계가 된 것이고, 이 4차원으로 넘어오는 과정은, 빌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기에는 어떠한 왜도 없”다. 그저 닥친 불행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쟁의 이성적인 서사화를 거부하고, 비이성적이고 우스꽝스럽게 개인의 서사를 다룬 소설은 그 형식 자체만으로도 매우 정치적이며 인간적일 수 있게 된다. 뒤틀릴수록, 인과가 무너질수록, 서사가 파괴될수록 오히려 전쟁 전후에서 개인들이 감각했을 진짜 서사가 복원되기 때문이다.


고렇다면 요롷게 유쾌발랄하게 ‘탈서사화’를 했으니 이제는 안전한가?


커트 보니것은 이것만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는 더 치밀하게 전쟁이라는 텍스트를 다룬다. 다시 유쾌발랄한 방식으로!


1-2. 뒤죽박죽 구성 - 서사화


커트 보니것은 전쟁을 탈서사화 시키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전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도 개입한다. 전쟁의 서사화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렇게 서사화된 이야기를 실체라고 믿어버리는 그 이후의 감각들이기 때문이다. 사후적으로 서사화된 전쟁(허구!)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실제!)로 대체하는 또 다른 폭력적 아이러니를 막기 위해, 커트 보니것은 더욱 확실한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는다.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도 또 다시 소설 속에 집어넣으면서, 전쟁과 이야기를 확실하게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책 속의 이야기로 남겨질 자신의 소설이, 하나의 역사적 사건, 혹은 드레스덴 폭격 생존자의 증언처럼 읽히지 않기 위해, 그는 이 이야기가 확실한 하나의 소설임을 못 박아둔다.




2.' 뭐 그런거지' - 싸구려 인간성


소설 속에서 모든 죽음 뒤에는 ‘뭐 그런거지’라는 불감의 한마디가 따라붙고, 이 죽음에는 벌레, 박테리아, 개, 사람 모두 포함되며 이들 간의 위계는 없다. 애초 인간성이 상실된 맥락 속에서 죽어나가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군복에 붙은 벼룩이 죽어나가는 것이나, 비겁하다는 이유로 총살당하는 군인이나, 드레스덴에서 동시에 죽어나간 개, 민간인, 박테리아나.


결국 '뭐 그런거지'라는 이 한 문장은, 사후적으로 전쟁을 서사화하면서 떠드는 수많은 인간성에 대한 강조나 당위들이,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폭로한다.


지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대학살이 일어나고, 수많은 비인간적 죽음들은 주변에 널려있다. 여전히 우리는 여기에 불감이다.


우리는 세계 수많은 학살들을, 포탈사이트에서 친절히 제공하는 뉴스를 겨우 스마트폰의 작은 창으로 접하면서, 시간을 때우며 소비할 뿐이다. 그러면서 중얼거리는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될 텐데' 따위의 말들은, ‘뭐 그런거지’와 별반 다를 게 없다.



<5도살장>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단순히 당위적인 반전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저도 전복시키면서 전쟁을 폭로하는, 그러면서도 유쾌발랄하게!



3. 예술과 코미디     

말하자면 ‘맥락’이다. 가치를 평가받는 수많은 전복들은, 전복적인 시도 그 자체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못마땅하고 구식이었던 ‘기존의 것’들을 ‘전복’한다는 맥락 위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뒤샹의 <샘>은 ‘다다’라는 흐름 속에서 당시의 매우 난해하고 권위주의적이 된 미술판을 조롱하였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예술로 남았고, 잭슨 폴록의 <넘버>(물감 마구 뿌려댄 어이없는 그림) 역시도 이미 회화에서 형태의 파괴가 끝난 시점에 우연성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추상으로 포섭하였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비싼 그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예술들을 보고 ‘오 변기 느낌있는데?’ ‘오 이 물감들 속에선 현대인의 외로움이보여! 훗!’과 같은 작품 내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우스운 코미디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이런 맥락들은 캐치하지 못한 채 그 추상적인 형식만을 따라하는 뒤늦은 시도들 역시도 코미디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2017년에 한국에서 예술가 뽕에 취한 미대생이 변기(혹은 그 어떤 사물이라도 상관없지만)를 전시회에 갖다 놓는다던 가, 물감을 마구 뿌려댄 그림을 걸어놓는다면, 코미디라는 것이다.


근데 이 코미디가, 현재 한국 예술계 전반에서 진지하게 행해지고 있는 동시대 예술들이다. 한국의 수많은 현대예술은 맥락 따위는 잊은 지 오래된 채 어이없는 추상화들만을 있는 척하며 그려내기 바쁘고, 문학 역시도 맥락 없는 말장난을 쏟아 내거나 작디작은 자기만의 세계를 자폐적으로 묘사하기 바쁘다.


그리고 예술을 소비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전시회에 가거나 책을 읽으면서 이 코미디의 일부분이 된다. 잭슨 폴락의 작품이 여전히 대단하게 취급되고 마크 로스코의 전시회가 대박 나듯이, 박민규가 대박이 났고 미래파 시인들이 세련된 젊은 시인들로 주목받는다.

전시회의 티켓이나 인증샷이 SNS를 꾸미는 악세사리가 되었듯이, 시집이나 소설 역시도 자신의 교양과 부심을 뽐내는 악세사리가 되었다.


코미디를 보고 예술이라 하지 않아야 한다. 이 구분은 시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물감을 뿌려댄 그림은 과거에는 가장 앞선 예술이었으나 지금은 코미디여야 마땅하며, 박민규는 애초부터 코미디였어야 했다.

비평가가 주례사처럼 포스트모던 운운하며 친절히 소개하지 않아도, 현대적인 작품은 그 자체로 독자에게 동시대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동시대적’인 감각은, 지금 이 시대의 ‘맥락’ 속에서만 유효하다. 과거로부터 혹은 위로부터 권위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로부터 주목받고 선택받는 것이다.


그래서 코미디와 예술의 구분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코미디를 보고 예술이라 하지 않으려면, 구시대와 그럴싸한 남의 의견에 대한 복종부터 철회해야 한다.

내 감각을 믿자. 코미디는 코미디다. 뭐 그런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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