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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Nov 21. 2018

함께 살 수 있나요?

35. 구병모,『네 이웃의 식탁』

*느빌의 책장의 발제-녹취가 개편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매주 수요일 발제 / 월요일 녹취가 업로드됩니다.

* 11월의 주제는 [공간] 입니다!


*11월 주제 [공간] 업로드 일정표

- 11월 7일(수)    『서울선언』, 김시덕(2018)

- 11월 14일(수)   「초행」, 김대환(2017)

- 11월 21일(수)  『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2018)

- 11월 28일(수)   「고양이 케디」, 제다 토룬(2017)



'공동주택'이라는 공간


책『서울선언』을 통해서는 '서울'이라는 공간을, 영화「초행」을 통해서는 '궤적' 또는 '삶으로서의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공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 번째 책은 『네 이웃의 식탁』이다. 공간이라는 주제로 책을 고르다 책의 소개가 눈에 띄였다.

'공동'이라는 이름이 유난히 강조되는 그곳, 꿈미래실험공동주택에 모인 네 이웃의 이야기!

대중교통이 열악하고 기반 시설이 갖춰지기 전인 경기도 외곽 지역, '꿈미래실험공동주택'에 네 부부가 이웃이 된다. 요진과 은오, 단희와 재강, 효내와 상낙, 교원과 여산 그리고 그들의 어린아이들. 각자 다른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이웃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묶인 이들은 더 나아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라는 투박한 범주화를 통해 공동 육아를 꿈꾼다.

공동주택에서 각기 다른 네 부부가 함께 살아가며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에 관심이 갔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건물 한 채에 오순도순 사는 것을 꿈꿔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공동 육아'라는 시스템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일었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떨지, 그 모습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공동주택의 입주자로 선정되셨습니다


여러 '공간들' 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인 공간이면서도 편안한 곳이 바로 '집'이다. 집과 같은 개인적인 공간에서는 무엇을 하든 대부분이 허용된다. 옷가지를 다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며칠간을 씻지 않고 물건들을 마구 엉클어 놓는 것도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고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그만이다. 물론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 있거나 동거인이 있는 경우에는 좀 더 이런저런 것들을 지키며 살아야한다. 엄마의 청소 습격으로부터 내 방과 물건들을 지키기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거나, 정해놓은 요일에 맞추어 화장실이나 부엌을 청소해야하는 일 등이다.


그럼에도 집이 가장 편안한 장소가 되어야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단 한칸 방이라도 내 몸을 누일 수 있는 집을 가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타지에 오랜 기간 나와있게 되면 집을 그리워하곤 한다. 소설은 네 가족이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곳에 함께 살게되며 시작된다. 소설 첫부분에서 그려지는 네 가족의 모습을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신재강과 홍단희 : 정목이과 정협이라는 아들 둘은 둔 부부로, 재강은 회사에 다니고 단희는 가정주부이다. 단희는 공동주택에서 이런 저런 제안을 하며 다른 가족들을 이끌어가려하는 행동대장 같은 성격이다.
전은오와 서요진 : 시율이라는 여섯살 딸이 있는 부부로, 남편인 은오가 집에 있고 아내인 요진은 약국에서 카운터를 본다. 요진이 돈을 잘 벌어서라기 보다는 은오가 영화 일을 하며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요산과 강교원 : 아들 우빈과 딸 세아를 둔 부부로, 요산은 일을 하고 교원은 가정주부이다. 교원은 단희를 따라 공동주택의 규칙들을 잘 실천한다.
손상낙과 조효내 : 다림이라는 딸을 둔 부부로, 상낙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효내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이다. 효내는 집에서 아이를 보면서 일을 하는데 체력과 시간의 부족함을 느낀다.


네 가족의 살고 있는 모습은 각기 다르지만,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있으며 까다로운 입주 조건과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공동주택에 입주하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저렴한 가격에 안정적인 공공임대 주택에 들어와 앞으로의 삶은 한결 나아져야 할 것만 같다. 함께 잘 살아보자는 생각에 공동으로 지켜야하는 규정들을 만들기도 하며 열두 가구가 모두 입주하고 공동주택에 활기가 가득하게 될 때를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포개어지는 공간


─ 나라고 마냥 좋아서 옳다구나 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끽해야 네 집뿐인데 다른 집들 대충 동의하는 터에 우리만 딱 잘라 빠지면 뭐가 되겠어. 서로 분위기도 맞추고 살 줄 알아야지. (중략)
정말이지 공동생활이라 하여 이런 부분을 신경 써야하리라곤 예상 못 했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키우자니, 우애를 다지자니. 서로 얼굴을 들여다보고 살자니. 무해한 미소와 대화를 나누며 레고 블록으로 조립한 듯한 친근감을 갖자니.(p.93)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이다. 열두 가구가 살 수 있는 작은 공동주택에 아직 네 가구밖에 입주하지 않았고 주변에는 마땅한 보육기관이 없는 상황에서 홍단희 부부는 다른 세 부부에게 공동육아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어차피 각자 아이들을 돌봐야 상황이므로 이왕이면 아이들이 서로 부대끼며 지내고 다양한 활동들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네 가족은 오며 가며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의 사이가 아니라, 공동 규칙을 세우고 같이 지키는 사이, 더 나아가서 공동 육아를 하며 매일 같이 얼굴을 봐야하는 사이가 되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하는 효내와 가사일을 남편 은오가 도맡아하고 있는 요진에게는 썩 달갑지 않기도 하고 우려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굳이 거절할만한 이유도 없었다. 공동 주택에서 일종의 리더 역할을 하는 단희와 단희의 의견을 잘 따르는 교원으로 인해, 나머지 두 가정도 이를 따를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다보면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하곤 한다. 나와 다른 상대방의 입장을 어디까지는 허용하고 어디까지는 부정해야하는지이다.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해있고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함께 살고있는 상황에서 어느 하나의 규칙을 따르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잠깐 보고 말 사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함께 살아야하는 사이이기에 더 조심스럽기도 하다. 내 입장을 말하는 것이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는 않을지, 또한 나중에 도움을 받아야할 일이 있을 때 불이익으로 작용하지는 않을지를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좋은 게 좋은거지 하면서 웃으며 넘어가는 것이다.



'함께'라는 말의 공허함


이들은 함께 육아를 하고 함께 출퇴근을 하지만, '함께' 한다는 것이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효내는 원래라면 딸 다림이 한 명만 챙기며 남는 시간에는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 여섯 명의 아이들을 동시에 챙겨야 하며 중간중간 빠져나가는 것도 눈치가 보이게 되었다. 요진 또한 차가 고장난 재강과 함께 출퇴근을 하며 시간이 좀 더 소요되는 것은 감내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선을 넘는 재강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다. 또한 아이들이 부대끼며 발생하는 작은 사건사고들도 빼놓을 수 없다.


서로의 거리가 좁아지고 공간이 포개지고 '함께' 한다는 명목 아래에서 어디까지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지 또한 어디서부터는 각자가 해결해야하는지가 애매해진 것이다. 또한 '함께'이니까 또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이니까 '이 정도는 참고 감수해야지'라며 시작된 개인의 희생은 개인의 몫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공허한 '함께'는 소설 속의 꿈미래실험공동주택으로 비롯되는 출산 장려 정책과도 이어져 있다. 공동주택의 입주를 광고하며 눈부신 미래를 약속하는 문구들로 치장되어있지만 끝내 그 미래를 향유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도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지원금이나 공공주택의 존재가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지도 모르나 출산과 육아의 문제가 어떻게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만 귀결될 수 있을까. 당장에 해결해야하는 현실적인 경제 문제 뿐 아니라, 실제 육아를 누가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등의 감정적인 문제와 발생할지 안할지도 모르는 가정의 문제들까지. 그 모든 것들을 책임져주지 못하면서 단지 눈부신 미래를 얘기하는 것은 굉장히 허황된,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 없다.


이제는 더 이상 '함께 힘을 모아서 해결하자' 따위는 어떠한 해결책도 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겉으로는 대단한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일지 모르나 그 성장을 이루기 위해 희생되고 사라져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한 적이 없다. 더 나은 미래, 성장에 포커싱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앓고 있는 가장 어두운 부분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우선인 것이다. 강제적인 합의나 속임수 뿐인 합의가 아니라 자발적인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 공간을 지키기 위하여


처음 요진은 자신이 불쾌하다고 느꼈던 지점, 불편했던 지점을 굳이 일일히 지적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어른스러우며 사회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행동을 하였을 때, 주변에서 요진을 피곤한 사람, 까다로운 사람, 예민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예의나 체면치레를 생각해서 행동하도록 학습되어 왔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결코 해결되지 못하고 묻혀있는 문제들과 상처받은 자신 뿐이다. 또는 이러한 폭력을 내면화하고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행하고 있는 모습이거나.


결국 소설은 침범되어지는 내 공간을 지키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반드시 상대방과 싸우고,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해결책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불편하게 여기는 지점을 그대로 감당하고 있는 것도 결코 해결책이 되어주지 못한다. 모두가 그 시스템의 불합리함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시스템에 속해있는 사람들이 표면적으로 잘못됨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요진은 끝내 도망가는 것을 택한다. 정면에서 맞서 싸우기보다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일단은 자기가 안전하게 여겨지는 곳으로 떠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일종의 폭탄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자신이 겪은 불쾌함을 선포해둔 상태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느낀 부당함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이야기하는 동시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힘껏 도망쳤다. 이처럼 '함께'라는 폭력에 무뎌지지 않기 위해서 때로는 힘껏 도망쳐보기도 하고 가끔은 사회부적응자가 되어보기도 하는 것은 어떨까.


"괜찮아요. 여기만 벗어나면 금방 사라지겠죠."
머지않아 지워지겠죠. 냄새도, 그것이 속해 있는, 어쩌면 그것이 주인 되는 공간도.
몇 번인가 차바퀴와 자갈이 부딪쳐 튕기는 소리가 리듬감을 갖고 요진의 몸을 경쾌하게 흔들었다. 불규칙적이고 불안하며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음악으로 인정받을 수 없을 법한 소리였고, 변변한 가로등 불빛 하나 없이 택시는 상향등에 의지한 채 당장 무엇이 마주 덮쳐 올지 모를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가고 있었음에도, 요진은 이 순간 공단 이불에 몸을 부리면 꼭 이럴 듯 싶게 편안했다.(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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