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슨한 빌리지 Nov 26. 2018

함께 살기는 개뿔!

구병모 <네 이웃의 식탁> 뒷담화

* 느빌의 책장의 발제-녹취를 개편했습니다!

*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 매주 수요일 발제 / 월요일 녹취가 업로드됩니다.

* 이 뒷담화는 공간 키워드의 세 번째 텍스트 <네 이웃의 식탁>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글입니다.

* 이번 모임엔 일벌레, 박루저이주 님이 참여했습니다.


* 본 녹취록은 '함께 살 수 있나요?'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의 식탁>에 대한 간단한 소감은?



박루저 : 비교적 오랜만에 한국의 ‘젊은 작가’로 불리는 작가의 동시대 소설을 읽었는데, 사실 새롭지는 않았어요. 젊은 작가의 동시대 소설에 늘 거는 기대와, 그게 충족되지 않는 아쉬움을 다시 느꼈습니다.


일벌레 : 저도 소설의 상황들에 깊이 공감가지는 않았어요. 애초에 따로 살아도 문제가 있을 듯한 가족들을 모아놨다는 점에서요. 애초에 네 가족의 남성들이 다들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이게 ‘함께’해서 잘 안된 것 같은 소설의 모습에는 공감이 안갔어요. 


이주 : 저도 구병모 작가 특유의 느낌이나 신선함을 기대를 하고 봤는데, 그건 없었던 것 같아요. 보통의 한국 젊은 작가 소설을 읽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그래도 작가가 어떤 문제를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무슨 얘기들을 하고 싶은지는 잘 담아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문제 의식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캐릭터들의 부정적인 부분만을 극대화해서인지, 읽으면서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박루저 : 맞아요. 저도 그 부분을 말하고 싶었어요. 제가 다른 한국의 젊은 작가 소설할 때도 자주 언급했지만, 요즘 ‘젊은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소설들이 저한테는 오히려 기성세대에 가까운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가족들 모두 서울에서의 삶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그리고 정상가족에서 조금 벗어난 약자로 그려내잖아요. 그런데 제 주변을 보면, 우리가 자라오면서 들은 ‘보통’의 삶이 오히려 불가능하고 비정상적이거든요. 결핍이 있고 밀려나는 게 오히려 저에겐 ‘보통’인데... 예컨대 지난번에 저희가 다뤘던 <초행>이라는 영화는, 약자로 보는 프레임 없이 정말 보통의 존재로 위태로운 주인공들을 그려내잖아요. 

근데 이 소설에서 작가의 시선은 애초부터 이 가족들을 ‘보통’이 아닌 밀려난 ‘약자’로 보고 있고, 그 불행함들을 캐치해서 전시하는 소설 같았어요. 약자에게 눈길을 주고 그 감성을 캐치하는 건 젊은 세대들의 입장을 대변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아직도 보통과 약자를 바라보는 프레임은 지극히 기성세대에 가깝다고 느껴져요.


이주 : 맞아요. 근데 저는 애초에 작가가 설정하고 그려낸 삶이 현재 저희가 공감할 수 있는 20대보다는 오히려 30대 중후반의 나이이지 않을까 했어요. 그들이 보기에는 소설 속의 인물들이나, 그 인물들을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들이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무튼 저도 저와 나이가 비슷한 가족이라면 이 집에 아무도 안들어 갈 것 같았거든요. 일단 아이 셋을 낳아야 한다는 조건이라니요!


일벌레 : 제 생각에는 요즘의 30대도 이 집에는 안들어 갈 것 같은데요? (웃음)



'젊은 작가의 소설'의 감수성과 가능성은?


이주 : 발제문의 얘기를 잠시 하자면, 음... ‘공간’이라는 키워드가 이 소설을 파악하는 효과적인 키워드였는지는 모르겠더라구요. 소설 전반에는 남성과 여성의 불균형한 육아 역할과 가정에서의 가부장적인 요소가 나오는데, 이러한 문제들이 또 다른 가족들과 ‘함께’여서 드러나는 문제들과 마구 중첩되어 있는 느낌이었어요. 소설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젠더문제와 공동주택의 방식에서 오는 갈등들로 애매하게 섞여있어서 발제문을 하나의 주제로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발제문은 일단 공간에 더 초점을 맞춰서 쓰긴 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육아에서 나타나는 젠더문제는 함께 다루지 못해 아쉬웠어요. 


박루저 : 맞아요. 젊은 작가가 마땅히 가져야할 약자에 대한 감수성이나 책임감이라고 바라보면 좋은 점이긴 한데, 저는 작가가 남성들의 미묘한 폭력과 가부장제의 압박들을 오히려 강박적으로 잡아내고 있는 게 아닌가 했어요. 굳이 이 네 가족들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 넣고, 거기에 나오는 문제들을 소설로 캐치한다는 점에서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강명의 소설들이나 아니면 <82년생 김지영>같은 소설은, 그 모습들이 내 일상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환기시키잖아요. 그런데 <네 이웃의 식탁>에서는, 제 일상과는 떨어진 매우 허구적인 소설 속 설정에 캐릭터들을 넣어놓고,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상황들을 작가가 연출시켰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소설의 상황에 몰입이 안되고, 그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자꾸 느껴지는 거죠.


일벌레 : 작가는 아마 균형잡힌 시선으로 네 가족들을 차갑게 그려내는 게 복잡한 문제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저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 가족의 문제, 그리고 저 가족의 문제. 이렇게 차례대로 하나씩 딱딱 전시하는 느낌이라서 공감이 안 되었어요. 오히려 한 가족만들 담아내는 시선이었다면 효과적이었을 것 같아요.


이주 : 젊은 작가로서 이런 문제들은 한번쯤 얘기하고 넘어가야겠다, 이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문제가 사실 한 가족의 노력이나 개인의 선택으로 고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어느 한쪽의 입장이 맞다고 선언하기가 어려운 문제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소설이 그냥 우리가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던 걸 한번 건드리고만 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요. 


박루저 : 네 맞아요. 그래서 젊은 작가들의 이런 소설들이 반복되면서, 문학의 가능성은 이제 확장되기는 어렵겠구나 생각도 많이 들어요. 누구나 자신의 온 몸으로 다 아는 문제를, 다시 재확인하는 차원에서만 소설이 소비되니까요. 해결 방법을 작가에게 요구하는 건 당연히 아닌데,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나 한 발자국 더 고민한 문제의식이 없다는 게 늘 아쉬운 거죠.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박루저 : 재강이랑 요진의 스토리요. 일상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성추행과 그 이면의 심리들을 잘 포착했다고 생각했어요. 그 스토리가 저한테는 이 소설을 읽게 하는 동력이었어요. 다른 가족들은 처음에 보여준 모습을 반복하는 거였고, 갈등이 고조되고 결론으로 수렴한다고 느낀 건 이 부분이었습니다.


일벌레 : 저는 남편들이 육아를 하는 방식을 표현한 장면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애 본다는 걸, 정말 그대로 ‘보고’만 있는 장면들이요. 그래서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또 조금이라도 큰 애가 어른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걸 남편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그 부분들이 재밌었어요. 


이주 : 저도 시율이에게 오히려 육아의 부담이 전가되는 부분들이 기억에 남아요. 이건 아마도 아내와 남편이 육아에 대해 가지는 태도나 역할의 차이가 드러나도록 작가가 의도한 것 같은데, 이게 시율이라는 아이를 통해서 표현되어서 흥미로웠습니다. 

또 다른 장면으로는, 소설 속에서 개인주의의 감각이 다 다르고, 공동체 생활을 원하는 정도가 다 다르다는 거였어요. 단희와 재강 커플은 의욕적인 반면, 다른 커플들은 조금 거절하기가 애매해서 이끌려가는 모습들이요. 사회생활의 축소판처럼 보이기도 했고, 저희 느빌의 모습이기도 했어요. (웃음)


박루저 : 맞아요. 느빌도 합의를 하는데 늘 실패하죠. (웃음)



공동주택이라는 삶의 방식은 어떤가요?


이주 : 저도 공동주택에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사는 삶을 한때 지향했던 적이 있거든요. 근데 이 소설을 보면 공동주택의 삶이 거의 디스토피아로 그려져서...(웃음). 실제 우리 세대들이 이런 삶을 산다면,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했어요. 아니면 다른 대안적인 삶의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하구요.


일벌레 : 저는 작가가 공동주택을 떠난 세 가족을 실패자처럼 보고, 남은 한 가족을 정답처럼 제시했다고 생각하는데, 전 오히려 남은 한명이 실패자로 느껴졌어요. 떠난 사람들이 잘한 선택을 한 것 같았구요. 서로 다르게 사는 게 당연하고 서로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공동주택이었잖아요. 서로가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 시작하면 그래도 좀 괜찮지 않을까요?

 

박루저 : 저는 오히려 작가도 떠난 사람들을 응원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근데 왜 굳이 요산과 교원의 가족을 마지막에 남는 가족으로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이주 :  맞아요. 저도 그 부분은 잘 모르겠더라구요. 애초에 작가로서 사회의 이런 부분에 말은 해야겠는데, 자신도 딱히 해답을 모르는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요. 이건 혼자서 해결할 수도 없고, 애초에 혼자 해결해선 안되는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소설 속의 가족들이  공동주택의 삶에 실패한 이유도, 뭔가 합의가 된 상태로 시작하지 않고, 한두명이 이끌고나갈려고 하다보니 실패한 것 같았거든요. 이 합의가 시작부터 잘 된다면 이상적인 공동생활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일벌레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떤 이상적인 룰이 있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 구성원들끼리 공유할 수 있는지가 오히려 더 중요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룰인지가 아니라 누구랑 같이 사는지가 더 중요한 거죠. 예컨대 공통의 공간을 깨끗하게 싶어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도 좋겠지만, 오히려 또 더러워도 상관없는 사람들끼리 살면 그건 그 나름대로 정답이기도 하구요. 어떤 정답이 있기보다는, 이런 감각들이 비교적 잘 맞는 사람들끼리 살아야 되는 것 같아요.


이주 :  맞아요. 저도 만약에 누군가 같이 산다면, 엄청 깔끔한 사람보다는 적당히 더러운 사람이랑 살고 싶네요. (웃음)

 



<네 이웃의 식탁>을 읽고 우리는 또 제멋대로의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당신에게 누군가와 같이 사는 삶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댓글로 여러분의 제멋대로인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









매거진의 이전글 함께 살 수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