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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17. 2019

아프지 않은 성장이 필요해.

41-1. <위플래쉬>  뒷담화

* 느빌의 책장의 발제-녹취를 개편했습니다!

*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 매주 수요일 발제 / 월요일 녹취가 업로드됩니다.

* 이 뒷담화는 성장 키워드의 첫 번째 텍스트 <위플래쉬>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글입니다.

* 이번 모임엔 박루저, 다희, 이주, 해정, 연연, 학곰님이 참여했습니다.


* 본 녹취록은 <이래도 '성장'하고 싶어?>를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0. 영화를 보고


이주 :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생각하자 <위플래쉬>가 떠올랐어요. 그 전부터 보고싶은 작품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는 조금 불편하고 힘든 감정들을 느꼈어요. 물론 예술, 특히 그 중에서도 정확성이 중요시되는 연주라는 영역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기도 했지만요. 그래서 제가 느꼈던 불편함, 왜 이렇게까지 성장해야하는가 라는 부분을 발제문에 담아보았습니다.

 
연연 : 교통사고 기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캐릭터 자체가 기준이나 성취욕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런 사람을 멈추게 하는 것도 맞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방법은 틀렸지만요.


박루저 : 영화를 처음 봤을때는 앤드류가 플래쳐에게 몰려서 행동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볼 때에는 플래쳐라는 인물도 이해가 되고, 오히려 앤드류도 극적인 인물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 꿈을 안고 대학교를 입학한 그 나이에 그 상황이라면 잘 하고 싶은 마음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곰 : 우선 영화는 재밌고 몰입감 있게 봤습니다. 보면서는 두 가지 생각을 했는데 하나는 '나는 글렀다'였어요. 맨날 말로는 빡세게 하자고 해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구나 하면서 반성을 했고요. 두번째는 '저 정도로 미쳐야지 닿을 수 있는걸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가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모든 주변 인간 관계도 다 정리하고 올라가다가 또 꺾이고 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저렇게 미쳐야만 마스터피스가 나올 수 있는걸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발제문을 봤는데 그 다음에 폭력이 보이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만 보였어요.



1. 사회적 성장과 개인적 성장


연연 : 업무 특성상 두 명이서 한 조로 일하는데 엄정한 분 밑에서 일하면 매출이 더욱 잘 나오도록 훈련을 받게 되어요.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정말 힘들고 자신을 갉아먹고 불안에 시달리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팔아야 하는구나를 잘 배우긴 하는데 계속 쫓기다 보니 불안하게 지낼 수 밖에 없없어서 어려웠어요. 시스템 자체가 이렇게 배워야지만 성장한다거나 어느 지경에 닿을 수 있잖아요. 이걸 안 하면 스스로 자존감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어서 그 균형이 맞춰질 수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곰 : 위플래쉬에서는 주인공이 직업적으로 성취하고 싶은 것도 드러머였고, 개인적으로 성취하고 싶은 것도 드러머로 일치했기 때문에 여기에 올인해도 무방했던 사람인데 사실 여기 앉아있는 우리는 자기 직업과 직업과 개인적 성취가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대개 직업 영역에서 성장을 강요를 받곤 하는 데 저는 성장이 아니라 '적응'이라고 생각을 해요. '성장'이라는 단어는 개인적인 성취 영역에서 써야하는 게 아닐까요.


연연 : 그런데 그게 완전히 분리할 수 있나요. 저는 일적으로도 어느 정도 잘 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나마 제가 욕심을 부렸을 때 긍정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직업을 택한거기도 하고요. 책을 많이 파는 직업이니까 제가 욕심을 부려서 책을 많이 팔면 좋을 것 같고 그런 면에서 봤을 때는 이것이 성장이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 같아요.


학곰 : 기준점이 다르지 않나요. 내가 이 분야에서 원탑이 되야겠다는 마음으로 뛰어드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욕먹지 않을 정도만 하면 된다는 등 기준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성장이라는 게 한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분야별로 구분을 짓는다면 내가 만약에 직업으로서는 어느 정도까지만 성장을 해서 레벨이 도달하면 그 이후부터는 적응이라고 생각해요. 반면에 제가 생각하는 진짜 성장은 그 끝이 없다고 생각해요. 더 하고 싶고 계속 올라가고 싶은 지점이 있어야만 성장이라고 생각해요.


박루저 : 저는 20-30대 때는 갈려서라도 그래서 시행착오를 끊임없이 겪어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당연히 일적인 얘기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공무원 같은 직업이 아니라면, 개인적인 성장과 일의 성장을 구분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개인적인 성장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학곰 : 저는 현재 직업에서는 이 정도면 욕은 먹지 않겠다는 경지에 오르고 나서는 그 외에 두 번째 세 번째 직업을 찾고 싶어요. 그래서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추어의 영역에서 직업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싶은거죠.


이주 : 저는 개인적인 성장과 직업에서의 성장이 구분될 수는 있다고 봐요. 이전 직장을 다닐 때는 직업적으로 성장을 하든 말든 저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상황이었기도 했고요. 그런데 저는 조직에서 일한다는 것이 문제라고 보고요. 그래서 발제문에도 교수자라는 부분을 지적하려고 했었는데, 나 혼자 하는거면 적당히 할 수 있는건데 위에서의 압박이 있을 때 나 혼자 '나는 이 정도만 할거니까 이정도만 할거야' 라는 스탠스를 절대 유지할 수 없다는거죠. 그 압박이 있을 때 그걸 못해내면 오히려 내 자존감이 갉아지는거죠. 그런 부분에서 성장은 좋은 단어이지만 그 성장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굉장히 좀 짜증나는 일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정 : 저는 학곰의 이야기에 공감을 했는데, 이전에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는 늦게까지 회의를 해도 좋았고, 돈을 조금 받아도 기분이 좋았어요. 갈리더라도 이것이 나의 성장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회사에서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 같은 글쓰기인데도 퇴근을 늦게해도 괜찮아, 이런 마음은 안되더라구요. 지금의 일이 저의 경험이나 커리어가 될 수 있지만 여기에 성장이라는 단어를 붙이기는 어렵더라고요. <위플래쉬>에서는 드럼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었기 때문에 '성장'이라는 단어도 어울렸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어쩌면 앤드류가 선생님이 되면 플래쳐와 비슷한 인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2. 다른 성장이 가능할까?


연연 : 제가 요새 느끼는 게 그거예요. 닮고 싶지 않던 상사와 닮게 될까봐 두려워요. 왜냐면 저는 계속해서 이렇게 일을 해왔으니까 나중에 내 밑의 사람이 이렇게 하지 못하면 화가 날 것 같은 거예요. 그게 제일 무서워요. 영화의 흐름을 보면서 느꼈던게 앤드류도 처음에는 플래쳐에게 기분 나빠하고 굴욕, 모욕감을 느꼈었는데 그 다음에는 상대를 향한 화가 아니라 본인을 향한 화가 더 크게 느껴지는 거예요. 앤드류가 플래쳐가 되어가는 과정이 보여서 소름 끼쳤어요.


다희 : 영화에서 말하는 성장이 굉장히 설득력있고 몰입감 있다고 느끼도록 연출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저렇게 그거 말고 다른 모든 걸 버리는 성장이 맞는건가? 저렇게 밖에 못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감독이 생각하는 성장 서사가 전 영화 <라라랜드>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하는 것 같아요. 사랑이나 소중한 것을 다 버려야만 성공한다는 스토리로 흘러가죠. 관객은 감독의 성장에 설득이 되느냐 다른 성장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가 두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요.


박루저 :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렇지만 높은 수준의 크리에이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밴드가 아니더라도 크리에이티브가 요구되는 집단이라면 이렇게 밖에 유지가 안 될 것 같아요. 어떤 잡지 만드는 사람이 했던 말 중에 '좋은 잡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말이 있었는데, 편집장과 아트 디렉터가 엄청 권력이 세고 그 밑에서 참여진들이 갈려나가기 때문에 뛰어나면서 개성있는 작품이 가능한 것 같아요. 책임자 한 사람이 전체 과정을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요. 그리고 이것에 합의가 된 사람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갈리더라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탓하게 되는 거죠.


연연 : 편집장의 힘이 세야 브랜딩이 유지가 된다는 건 저도 최근 편집자 수업을 들으면서 많이 느꼈어요. 탑다운식의 의사소통에서의 효과가 보이는 것들이 몇 가지 있으니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박루저 : 갈릴 걸 알면서도 버티면 기준과 실력이 바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들어가는 거죠.


다희 : 어쩌면 실력 있는 총책임자가 있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꼭 그런 방식만이 정답인 것은 아닐 수 있는 게 어느 기업에서는 위에서 억지로 시키지는 않지만 대신 밑의 사람들이 알아서 노력하고 성장해야 하는 곳도 있더라고요. 그래도 크리에이티브한 것들을 잘 제작하고 스스로 성장하는 분위기이긴 해요. 다만 그런 곳은 서로가 경쟁해야하는 시스템이니 알게 모르게 스스로의 압박이 클 수도 있겠죠.


연연 : 저는 <위플래쉬> 속의 성공이 일종의 '신화' 같기도 해요. '이거 가능해?'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반면에 이런 불가능한 성장을 완성시키려는 비슷한 폭력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불가능한 신화를 만들어내고 주입하는 거죠.


학곰 : 이거는 좀 다른 생각인데 그 폭력이 부당하고 힘든 것은 부정하지 않지만,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이 갈릴려고 들어가는 이유는 있다고 생각해요.


박루저 : 저도 반대로 '이렇게 안 하고도 가능한거긴 할까..?'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집단에 속한다는 것의 기본은 최고 수준의 멤버들 기준은 이미 높고 내 작업물은 형편이 없을 때, 그걸 직접 비교하면서 부딪히면 빨리 깨달을 수 있다는 것 같아요. 혼자 공부하면서 그 기준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한거죠.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는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3. 아프지 않고 성장하고 싶어요


연연 : 저는 기준이 문제가 아니라 의사소통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꼭 뺨을 때리지 않고 책상을 쳐도 되잖아요? 그리고 앤드류가 메인이 되었을 때 또 다른 연주자를 데려오는 그런 방식들이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높은 기준을 두고 꿈꾸는걸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타인이 불가능한 기준을 주고도 압박하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해정 : 저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회사마다 기준이 다 있고 신입사원이라면 항상 높은 기준을 겪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겪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물론 <위플래쉬>는 연주라는 세계라서 피지컬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마치 스포츠처럼요. 저도 어렸을 때 육상부 활동을 했는데 체육관에 있으면 운동하는 사람들 특유의 소리지르는 등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느날, 다른 학교에서 와서 훈련을 했는데 코치가 어느 학생의 가슴을 발로 찼었는데 아무도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는 거예요. 저게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스포츠계에서는 당연한 것이겠지 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뭐 어쩔 수 없지. 이게 제일 효과적이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도 '방식'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다희 : 저는 최근 스포츠계 사건도 그렇고 <스카이캐슬>도 떠올랐어요. <스카이캐슬>의 김주영 선생이 학생들을 명상실에 데려가 세뇌를 시키는데, 증오심을 통해 공부를 하게 만들잖아요. 열등감이나 증오심을 키우고 공부를 못하면 너는 존재가 없다고 까내리는 거죠. 군대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 지는 것 같고. 이런 폭력적인 방식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수단과 방식은 상관없이 일단 성공하고 보자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너무 쉽게 굴복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루저 : 제가 최근에 겪은 경험 중에서는 모두가 합리적으로 의견을 주고 받고 합리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 결과는 좋지 않은 상황을 많이 봐왔어요. 그 결과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과정만으로 공정하고 합리적이라면서 서로서로 자화자찬하면서 끝나는 거요. 저는 이게 요즘 흔한 젊은 세대가 갖고 있는 감수성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 방식이 중요한 분야도 있겠지만, 그러면서 전체적인 결과의 쇠퇴에 대해서는 구조적인 탓을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봐요. 연극이나 출판계가 이전보다 무너지는 것도 옛날만큼 잘 만들지 못해서 관객이나 독자들이 외면을 하는건데, 좋은 작품에 대한 고민보다도 그냥 사람들이 많이 안 보는 탓을 하면서 권위 자체를 잃어버리는 거죠. 물론 폭력적인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이런 경우에 대해서도 자각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학곰 : 욕심을 어디까지 부리느냐의 문제인거 같아요. 그게 신화라고 하더라도, 신화니까 아무것도 안할거야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주 : 저는 방식적인 면에서 얘기했던거에 덧붙이자면, 저도 성공을 하거나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갉아먹는 시간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해요. 근데 그걸 혼자서 하는 거면 그냥 혼자 하면 되는데, 윗사람-아랫사람이 있을 때는 좋은 리더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스포츠나 합주 같은 영역에서도 정말 좋은 리더가 있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있긴 하지만,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거나 강압적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성과를 끌어내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스스로가 모범을 많이 보여야하고요. 제일 싫어하는 논리 중 하나가 '지금 힘들고, 그걸 참으면 나중에 편해진다'는 건데 저는 위로 올라가도 그 자리에 맞는 어려움과 책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에서는 '나도 너 때는 갈렸어.' 라는 논리가 너무 팽배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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