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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Feb 05. 2019

성장은 언제나 늦되다

44. 바스티앙 비베스, 『폴리나』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매주 수요일 발제 / 월요일 녹취가 업로드됩니다.

*1월의 주제는 [성장]입니다.


*1월 주제 [성장] 업로드 일정표

- 1월 9일(수)  「위플래쉬」, 데이미언 셔젤(2014)

- 1월 16일(수)『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뮤리얼 스파크(2018)

- 1월 23일(수) 「보이후드」, 리처드 링클레이터(2014) 

- 1월 30일(수)  『폴리나』, 바스티앙 비베스(2018)



우리는 언제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어제보다 오늘 더 실력이 늘었을 때? 자신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때? 세상 일에 유연하게 대처하게 되었을 때? 아니면 내가 성장했음을 무심결에 깨달을 때? 나는 성장하고 있고 성장했다는 증거가 필요한데, 성장을 말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답하려면 두 가지 질문을 고민해야 한다. 첫째, 성장이란 무엇인가. 둘째, 성장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워플래시>부터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보이후드>를 통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리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답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내가 성장과 성공을 혼동하며 쓰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장은 성공 신화처럼 시간이라는 x축에 따라 실력이라는 y축이 오르내리는 함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성장이란 무엇이며 누가 성장했음을 말할 수 있는 걸까? <보이후드>에서 소년의 성장기를 보았으니 이번에는 한 소녀의 성장기를 따라가며 살펴보자.



예술과 성장, 그리고 스승


<폴리나>는 발레리나를 꿈꾸는 6살 소녀의 이름이다. 책 <폴리나>는 폴리나가 유명한 발레학원인 보진스키 아카데미 입학 테스트를 받는 장면부터 시작해 폴리나의 성장 과정을 따라간다. 폴리나에게 시큰둥하게 반응했던 보진스키는 예상과 달리 폴리나를 입학시키고 개인 교습을 시작한다. 하지만 어린 폴리나는 보진스키의 고된 훈련과 예술에 관한 말을 아직 이해할 수 없다.


힘들어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한 거야.
관객들은 네가 전달하는 감정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봐서는 안 돼.
이 무슨 해괴한 말인지. 폴리나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다.


폴리나는 보진스키의 가르침을 따르기도 하고 엇나가기도 하면서 실력을 키운다. 그 결과 성인 발레단에 스카웃되지만 발레단의 엄격한 분위기에 갑갑함을 느낀다. 폴리나는 다시 보진스키에게 돌아온다. 여전히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와 함께라면 발레 기술자가 아닌 발레리나 폴리나로서 성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통발레가 아닌 새로운 예술을 하고자 친구들과 함께 러시아를 떠난다. 보진스키가 폴리나만을 위해 짠 안무 공연을 앞둔 상태였음에도 말이다.

 

유럽에서 새로운 춤을 만난 폴리나는 주연의 기회를 잡지만, 발목 부상으로 무대에 오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진다. 좌절한 폴리나는 계속해서 춤을 출 수 있을지, 춤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다. 폴리나는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젊은 연극단을 만나고, 그들 앞에서 춤을 춰보인다. 화려한 동작은 없지만 힘 있는 그만의 춤을.

폴리나가 춤추는 장면에서 우리는 폴리나의 지난 시간을 짐작한다.

 연극단 앞에서 춤 추는 폴리나는 어릴 적 보진스키 앞에서 춤 춘 폴리나의 모습이 겹친다. 하지만 지금의 폴리나는 과거의 자신과 달라졌다. 평가 받기 위해 춤 추던 아이는 이제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춘다. 만들어진 무대에서 춤 추던 아이가 춤을 춤으로써 자신의 무대를 만들어낸다. 막이 오른지 20년이 지나서야 관객은 폴리나를 바라보는 연극단의 표정을 통해 폴리나가 지난한 수련과 방황을 통해 성장했음을 짐작한다.


시간이 지나 폴리나는 연극과 발레를 접목한 공연으로 유명한 무용수가 된다. 그리고 보진스키를 다시 만나 엄격한 스승에게 인정 받는 기쁨을 누린다.

언제나 그대로일 것 같던, 거대한 스승도 시간과 함께 늙더라는 사실.

그러나 기쁨은 이내 엄격한 스승도 늙는다는, 피해갈 수 없는 불문율의 슬픔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커 보이던 스승도 노쇠하여 다음next의 몫을 폴리나에게 남긴다. "선생님 안 늙으셨어요."라는 폴리나의 말에 "고맙구나"라고 답하는 보진스키. 이 매끄러운 대화 속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세대 교체를 본다.


<폴리나>는 예술인의 성장을 그리고 중간자로 스승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영화 <위플래시>와 닮았다. 하지만 <위플래시>가 기'술'적 성장에 집중하는 반면 <폴리나>는 기'예'적 성장에 집중한다. 보여주기 방식도 다르다. <위플래시>는 갈등을 직접적으로 짧고 굵게 보여주는 반면, <폴리나>는 주요한 장면을 과감히 생략하고 폴리나가 겪는 갈등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 결과 두 작품은 같은 제재를 다루면서도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위플래시>가 자신이 아닌 타인(스승)에 의해 주어진 기술적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사적인 영역(연애 등)을 버리고 자신 스스로도 파괴하는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성장은 옳은가?'라고 질문한다면, <폴리나>는 이미 성장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거부하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도 성장한다'는 하나의 답을 보여준다. 덕분에 두 텍스트는 기성 세대와의 관계를 그린 세대론적 이야기로도 읽힌다.



성장은 프리즘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유명한 연설,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점 잇기connecting the dots를 강조했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들이 나중에는 서로 이어져 어떤 결과를 불러온다는 말이다. 자퇴 후 무심코 들었던 캘리그라피 수업이 아니었으면 나중에 기존의 서체를 활용해 맥킨토시 퍼스널 컴퓨터를 개발하지 못했을 것이며, 윈도우와 별 다르지 않는 서비스가 되었을 것이라며. 이처럼 우리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또는 어떤 의미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지나쳤던 일은 모두 나중을 위해 점을 찍는 일이다. 스티브 잡스의 연설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말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열매를 맺은 후에야 과거를 돌아보고 '아, 그때 A를 한 후에 B를 배워 지금처럼 될 수 있었구나' 생각할 수 있다. 힘든 시간을 지나 그때의 미숙한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폴리나처럼.


보진스키가 보내온 옛날 비디오 속 자신을 보며 미소짓는 폴리나

인간이 윗 구멍으로 음식을 삼켜 아랫구멍으로 내보내기까지 평균적으로 꼬박 2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대변에 문제가 있다면 직전이 아닌 하루 전에 먹은 음식을 떠올려보라.) 하물며 음식 하나를 소화기키는 데에도 하루가 걸리는데, 인생의 사건을 체화하는 데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겠는가.


<폴리나>가 폴리나 인생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사건들(이를 테면 유명해진 계기가 된 무대 같은)을 생략한 이유도 소화 과정에 더욱 집중하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만약 인생의 주요한 장면을 모두 보여주었다면 독자는 과정(점을 찍는 행위들)에 집중하기보다는 소위 '레벨 업' 장면을 기점으로 폴리나의 성장을 이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시 스티브 잡스의  연설로 돌아오자.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지금 하나의 점을 찍고 있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그 점이 언제 다른 점과 연결될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으라고. 그 믿음은 힘이 크다고. 다소 시크릿(..)스러운 그의 말을 나는 믿는다. 멈추어 있는 듯 보일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점을 찍고 있으며 그건 곧 다른 점과 이어져 선이 될 것이고, 선은 다른 선과 이어져 면을 이룰 것이다. 면은 하나의 렌즈가 되어 우리가 보다 너른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도록 할 테고.


그러니까 성장은 비례 함수 그래프라기보다는 프리즘이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이다. 이런 저런 일을 이해하고 또 풍부하게 바라보도록 스펙트럼을 넓히는 일. 빛이 프리즘을 통과해야만 다양한 색으로 모습을 나타내듯 우리는 언제나 성장하고 있는 시점을 지나야만 그 일(점)의 의미와 성장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성장의 이러한 속성이 꼰대의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나보니 그게 다 도움이 되더라'는 말로 퉁칠 수 있는 일은 없다. 현재진행형으로 성장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다시 보진스키의 예술을 떠올린다 . "우아하고 유연해보이지 않으면 관중들에게 네가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만 보일 것"이라는 말은 달리 하면 곧 우아하고 유연해보이는 사람도 실은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가 물 밑에서는 열심히 발장구치듯이. 그러니 어른은 그저 "우아하고 유연해보이는" 자신들도 사실은 힘든 시간을 거쳐왔으며 거치고 있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성장은 딱 그 만큼. 성장도 아픔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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