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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02. 2018

1. 이광수 <무정> 읽은 척 가이드

문학? 읽지 말고 읽은 '척' 하세요  :)

* <문학 읽은 척 가이드>에선 상대의 몹쓸 문학 아는 척에 대응하는 읽은 척 스킬을 알려드립니다.

* 문학토크, 8할이 허세입니다. 기죽지 말고 허세엔 허세로 대응하세요!

* 프롤로그를 읽고 오시면 더 좋습니다.

https://brunch.co.kr/@neuvilbooks/2





0. 이광수 <무정> 읽은 척 가이드 INTRO


문학부심으로 뒤엉킨 아는 척 대화들에서 결국 한 번쯤은 마주하게 될 주제가 이광수와 그의 작품들이다. 흔히 문학 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근대소설의 시작은 이광수라고 할 수 있지이!”

“이광수가 100년 전에 제시한 민족의 미래는 어쩌면 현재까지도 유효할지도 몰라!”

등등의 아는 척 멘트들이 매우 익숙하다.     


이런 몹쓸 아는 척 앞에선 더욱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이광수의 작품은, 그 분량으로 보나 주제의 다양함으로 보나 결국 팩트보다는 각자의 의견으로 대화가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워낙 방대한 분량이라 내용에 대한 디테일한 팩트 체크가 어렵고, 그간 이뤄진 수많은 연구 때문에 감상의 결 역시도 매우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더불어, 이광수가 제시했던 당시 민족의 미래나 그가 계몽하고자 했던 방향, 그리고 이광수의 친일이라는 개인사까지. 여러 굵직한 콘텍스트가 이광수의 텍스트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애매모호한 아는 척도 매우 흔하며, 여기에 대응하는 읽은 척 역시도 다양해져야 한다.


결국 이광수의 <무정>에 대한 토크도 8할은 허세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데, 이때 상대의 아는 척 유형을 파악하고 여기에 적합한 읽은 척 대응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듣게 될 상대의 아는 척은 거의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유형이다.          



1. ‘분량 애써 무시’ 형 아는 척


보통 이광수의 무정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 두꺼운 책을 읽어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순도 높은 부심의 아는 척을 위해서는 지루함을 드러내선 안되기 때문에, 꾸역꾸역 읽은 티는 내지 않기 위한 다음과 같은 아는 척이 대부분이다.     


“두껍기는 한데, 그래도 술술 읽히지 않니? 아마도 연애의 서사라서 그런 것 같애. 민족이 처한 근대적 상황을 연애와 욕망의 서사로 대변시켰다니, 역시 근대 소설의 아부지 이광수야!”

등등이다.     


이럴 때는 역설적으로, 내가 진짜로 읽은 티를 내기 위해서 <무정>의 악명높은 두꺼움을 한번쯤은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은 술술 읽히지는 않던 걸? 특히나 책 곳곳에 등장하는 수많은 기생들의 이름들이나 당시의 고유명사들이 헷갈려서 자꾸 앞부분을 다시 보게 되는 거 있지? 하하하 아직 나는 조금 읽는 게 느린가 봐.”

정도로 솔직함과 겸손함과 읽은 척이 적절히 섞인 대답으로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내뱉을 자신의 읽은 척 멘트들이 어디서 대충 ‘이해와 감상’이나 ‘리뷰’ 정도를 스윽 읽고 와서 요란하게 터는 허접한 읽은 척이 아님을 미리 드러내기 위해선, 분량 언급과 함께 디테일한 내용 내용 묘사가 한 두 장면 정도 들어가 줘야 한다.


“그건 그렇고 당시의 과도기적 조선 사회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매우 인상적이더라. 더운 여름날 손님에게 대접하는 복숭아화채나, 혹은 기차에서 권하는 샌드위치들은 1910년대의 일상을 보여주는 데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음식들이었어! 그렇지 않니?"

"자기 인생의 전부였던 사랑을 잃고, 죽음을 결심한 영채가 처음 마주했을 샌드위치는 단순한 빵쪼가리가 아녔어. 앞으로 주인공들이 소설 속에서 만들어갈 ‘근대’의 한 단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정도의 디테일한 밑밥이면 적당하다.




2. '주제 파악’ 형 아는 척


<무정>의 주제와 핵심적인 요소들은 이미 상식 수준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현란하게 아는 척 하기가 매우 쉽다. 주제를 건드리는 아는 척은 흔히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낡은 전근대로부터 새로운 근대로 들어가고자 하는 명확한 메시지가 <무정>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인 거 같애. 특히나 전근대와 근대의 가치관이 혼합된 소설 속 상황은 매우 인상적이었어!”

정도로 떠들며 가장 쉬운 정답을 선점한 후,


“네가 생각하기엔 어떤 게 주제니?” “넌 어떤 장면이 좋았어?”

라는 질문을 눈에 가득 담아서 나를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스-윽 쳐다보는 게 몹쓸 아는 척의 정석이다.         


 

이런 경우엔, 상대의 아는 척을 인정하면서 문학 부심을 부추겨줌과 동시에, 상대가 생각하지 못했을 만한 협소한 주제를 그럴싸하게 현학적으로 말하면서 상대의 부풀려진 문학부심을 살포시 터뜨려주는 걸 추천한다. 이른바 ‘일보후퇴 이보전진 전략’ 혹은 ‘이건 몰랐겠지 읽은 척


“맞아 나도 동의해. 내가 어렴풋이 생각하던걸 너의 정리된 언어로 들으니 좋은걸? 근데, 나는 오히려 그런 전형적인 메시지보다는 근대적 개인의 연애와 욕망이 더 눈에 잘 포착되던데?"

정도로 운을 띄어놓고, 상대의 벙찐 표정을 확인한 후


특히 작품 곳곳에 퍼져있는 기생의 존재가 매우 특이했어. 기생들은 남의 욕망은 가장 잘 투영하면서도 자신의 주체적 욕망은 드러내기 어려운, 매우 전근대적인 캐릭터잖니? 그래서 기생을 통해 개인의 ‘욕망’ 혹은 그 ‘욕망’에 희생당하는 여성의 서사가 쉽게 떠오르는 것이지!
주인공들은 이를 뛰어넘는 근대적 개인이었던 것이구. 어쩌면 이광수는 이렇게 자유로운 욕망을 주체적으로 표현하는 근대적 개인을 ‘기생’이라는 존재와 대비시켜서 제시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정도의 질문이자 공격이면 알맞다. 이때 더욱 큰 효과를 보기 위해선 ‘순진무구한 표정’이나 ‘겸손한 말투’ 정도의 옵션을 추천드린다.





3. ‘이광수 친일파잖아!’ 형 아는 척


일반적인 상대방의 아는 척 스킬이 <무정>의 분량과 내용 정도에서 그친다면, 조금 더 허세가 가득한 상대의 아는 척은 작가 개인에 대한 언급으로 이어진다. 일상생활에선 이런 황당한 부류를 만날 일이 거의 없으나, 간혹 독서모임이나 인터넷 공간에선 출몰하기 때문에 대처법을 알아두는 게 좋다.


보통 이광수에 대한 아는 척은 ‘당시의 천재’나 ‘친일’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압축된다.


만약 상대가 "당시 이광수의 문학적 센스와 그 날카로움은, 지금의 감각으로 보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천재였지" 정도로 ‘당시 천재’라는 점에 대해서만 언급한다면, 애써 맞대응할 필요 없다. 친일이라는 것과 관계없이 이광수의 당시 천재성엔 논의의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맞아. 어머머 너랑 얘기하다 보니 문학사를 다시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 지는걸? 혹시 추천해줄 만한 책이 있니?”

등등의 질문으로 상대의 문학사 지식을 슬쩍 찔러보며 넘어가 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상대의 아는 척 스킬이 이광수의 친일까지 걸고넘어지면, 여기에는 조금 더 정교한 대응이 필요하다. 이러한 '친일 지적형' 아는 척 역시도 그 수준이 조금 나뉘는데,

 

“그래도 이광수는 결국 친일 했잖아.”

정도의 단순 지식형 아는 척


“그러나 결국 이광수가 그린 민족의 미래도, 자주적인 민족 독립보다는 친일이라는 형태 속에서 그려냈다는 점에선 분명히 한계야”

정도의 고퀄리티 친일 지적형 아는 척이 있다.



단순 지식형의 아는 척엔 '나도 알거든 이놈아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다. 상대의 아는 척에 굳이 이러저러한 각주를 덧붙이지 않고, '그 정도는 당연해서 내가 먼저 언급 안 했다'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하하 맞아. 근데 이광수의 친일이 그의 작품 주제와 서사를 결코 바꾸지는 않잖니? 그게 우리가 현재에도 여전히 이광수의 <무정>을 읽는 이유 아니겠어?"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조금 더 수준 높은 고퀄리티 친일 지적형 아는 척에는, 훨씬 더 현학적인 단계적 대응이 필수적이다. 예컨대


"하하 그렇지. 근데 내 생각에는, 이광수의 친일은 기회주의적인 부역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열렬한 친일이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쉽게 말하는 '친일'과 달라."

정도로 운을 뗀 뒤에,



"당시의 대동아공영권은 한반도 너머를 감각하던 지식인이라면 혹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였거든. 특히나 서구와 일본에게 이중으로 끌려다니던 조선의 당시 입장을 생각하면, 국가와 민족이라는 근대적 구분법을 뛰어넘는 사상이 이광수에게는 필요했던 것이지."
"따라서 그 유명한 '친일은 했지만 민족을 버리진 않았다'는 이광수의 변명은, 우리가 단순하게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안 했다' 정도의 우스꽝스러운 변명으로 치부해선 곤란해. 어쩌면 지금의 굳어진 근대적 감각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변명이기도 하지."

이와 같은 멘트 콤보가 적당하다.



이제, 몹쓸 아는 척 앞에서 기죽지 말고 다들 널리널리 읽은 척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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