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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09. 2018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읽은 척 가이드

문학? 읽지 말고 읽은 '척' 하세요 :)

* <문학 읽은 척 가이드>에선 상대의 몹쓸 문학 아는 척에 대응하는 읽은 척 스킬을 알려드립니다.

* 문학토크, 8할이 허세입니다. 기죽지 말고 허세엔 허세로 대응하세요!

* 프롤로그를 읽고 오시면 더 좋습니다.

https://brunch.co.kr/@neuvilbooks/2


마성의 오스카 와일드



0. 읽은 척 Intro


오스카 와일드의 장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대한 아는 척은 거의 대부분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일어난다.

‘예술과 도덕의 관계’ (혹은 ‘예술을 위한 예술’)라는 주제가 대화에 나왔다거나, 혹은 ‘유미주의’ ‘데카당스’와 같은 문예사조가 대화에서 언급되었을 때. 이럴 때 오스카 와일드나 그의 작품들은 아는 척의 도구로 쓰기가 매우 쉽다.


보통의 경우 이런 대화 속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스-윽 언급하며     


“하아. 예술에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인간들이 여전히 있다니! 믿을 수가 없군! 오스카 와일드는 이미 100년도 더 전에 그런 꼰대들을 훈계했는데 말이얏!”

과 같은 ‘깜찍한 투정형’ 아는 척을 하거나,          


“하-아. 추상화니 개념미술이니, 그게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설명은 웃기는 변명에 불과해! 오스카 와일드가 온몸으로 실현한 ‘유미주의’ 이런 어이없는 예술이 아니었다구우!”

처럼 ‘예술사조 쫌 알지롱 형’ 아는 척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대한 아는 척들은, 그 현란한 현학적 멘트에 비해 오히려 생각보다 대응하기가 쉽다. 아는 척의 유형이 매우 뻔하고, 해당 주제에 대한 의견의 팩트체크 따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 읽은 척의 기본 - 줄거리 요약


정교한 읽은 척을 위한 기초적인 줄거리 파악은 필수적이다. 간단히 요약하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은 화가 ‘바질 홀워드’와 그의 친구 ‘헨리 워튼 경’의 대화로 시작된다. 이때 그들의 앞에는, 방금 바질 홀워드가 완성한 개띵작 초상화가 놓여있고, 그 초상화의 주인공이 세상 잘생긴 훈남 ‘도리언 그레이’다. 이후 등장한 도리언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영원히 젊은 상태로 있고, 그림이 늙어 간다면! 그걸 위해서라면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줄 텐데! 내 영혼이라도 내줄 용의가 있는데!"


라는 나르시시즘적인 이불킥예약 멘트를 날리는데, 이 소망이 실제로 이루어지면서 소설이 진행된다.
즉 도리언 그레이는 말 그대로 전혀 변하지 않는 ‘방부제 외모’를 갖게 되고, 대신 그림이 늙어간다는 판타지적 이야기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주된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동경하는 철없는 도리언 그레이를 대하는 바질 홀워드와 헨리 워튼의 상반된 태도이다.     
쾌락적 YOLO 삶을 추구하는 헨리 워튼은 ‘도리언 군! 박보검급 ㅆㅅㅌㅊ 외모로 세상을 ㅎㅌㅊ스럽게 산다는 게 말인가 방구인가? 젋음은 빼박캔트 한순간이라네. 모든 걸 즐겨보세! 마약? OK! 매춘? OK! 살인? 음.. OK!’라고 말하며 도리언 그레이를 쾌락주의의 삶으로 유혹하는 몹쓸 아재이다.     
반면에 바질 홀워드는 ‘어머나앗! 나의 최애 모델 도리언 군! 헨리의 말 듣다가는 어느 순간 너의 손에 경찰이 선사하는 은팔찌가 철컹철컹 차여 있을 걸세! 예술과 삶을 구분하지 못하고 쾌락만 추구하는 것은 애바쎄바참치라네! 도덕적 삶이 중허지! 마약? NO! 매춘? 으악NO! 살인? 으아아악!’이라고 말하는 도덕적인 예술가(a.k.a 착한꼰대)이다.     
이 두 인물 사이에서, 도리언 그레이는 딱히 큰 고민 따위 없이 바로 쾌락주의의 삶을 살아간다. 온갖 범죄와 악행을 저지르며 퇴폐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초상화는 점점 더 추악해진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순수함에 대한 그리움과 그간 삶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된 도리언은 자신의 모든 죄악을 대신 뒤집어쓴 추악한 초상화를 없애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결국 도리언은 칼을 들고 초상화를 찾아가고, (과정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없이) 늙은 모습으로 죽어있는 도리언의 모습으로 소설은 끝난다.





 2. “영화 보고 책 본 척”형 아는 척


보통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줄거리를 언급하는 아는 척은 매우 드문데, 간혹 영화만 본 뒤 책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는 매우 용기 있는 상대가 출몰하기도 하니 적절한 대응법을 알아두는 게 좋다.


고전답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그간 약 5편 정도 영화화되었는데 그중에서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건 2009년 개봉한 올리버 파커 감독의 <도리안 그레이>가 유일하기 때문에, “영화 보고 책 본 척”형 아는 척은 거의 이 영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문제의 그 영화


이때 책과 영화의 결말이 아주 ‘살짝’ 다르게 표현된다는 점이 읽은 척의 핵심이다. 영화 <도리언 그레이>의 마지막 장면에선, 애매하게 표현되었던 소설과 다르게, 초상화 속의 추악한 도리언이 실제 도리언을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이를 모른 채 상대가


“하, 결말마저도 흠잡을 데가 없지 않니? 결국 죄악을 뒤집어쓴 초상화가 실제 도리언을 무참히 죽이는 서사라니! 그간 퇴폐적인 쾌락에 빠진 도리언에 대한 오스카의 서사적 처벌이 아닐까?!”

와 같은 허접한 틈을 보인다면,


이 패기 넘치는 아는 척에 기다렸다는 듯 깐깐하게 대응하여 상대를 민망하게 만들어선 안되고


“오잉? 혹시 너가 영화의 결말이랑 소설 결말이랑 잠깐 혼돈한 건 아닐까? 소설에선 초상화가 도리언을 죽이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하 명작들은 워낙 리메이크가 많이 되다 보니, 나도 가끔 그럴 때가 있더라! 아니, 어쩌면 내가 헷갈린건가...?? 헿"

정도의 ‘배려인 듯 배려 아닌 읽은 척’ 전략으로 살포시 넘어가는 걸 추천드린다.




3 “오스카 와일드-유미주의 오지지 않냐”형 아는 척


만약 상대가 줄거리를 넘어서 '예술을 위한 예술'과 같은 굵직한 주제들이나 혹은 작가 정보를 언급하는 아는 척을 시전하면, 이때는 상대의 현학적 멘트 수준에 따라 단계적인 읽은 척 대응이 필요하다.

보통 ‘유미주의’라는 사조를 꼭 말하고 싶어 하는 초보 수준의 아는 척은,     


“‘종교개혁보다 의상혁명이 중요하다’는 게 오스카가 했던 말이었던가?! 하하. 역시 오스카 와일드네!”

처럼 작가가 남긴 유명한 문구 인용으로 시작하여     


“오스카 와일드가 19세기 말 유미주의 사조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 아니었나?! 프랑스의 유미주의를 보들레르가 시로 완성했다면, 영국의 유미주의는 오스카 와일드가 소설로 완성했다고 생각해! 너의 생각은 어때?”     

정도의 질문형 멘트로 우리의 지식수준을 찔러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초보들의 질문형 아는 척에는,     

“그.. 프랑스 유미주의의 상징적 작품으로 꼽히는 게 보들레르 <악의 꽃>이었나..?”

정도의 조심스러운 멘트로 운을 뗀 뒤,


“근데 사실 영국 유미주의를 오스카 와일드가 완성한 지는 잘 모르겠어! 아마 지금은 유미주의라는 단어가 매우 많이 쓰이면서 오용된 것 같기두 하구..!”

와 같은 '밑밥 읽은 척'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때 멘트와 동시에 들릴 듯 말 듯 한 '풉'과 같은 효과음이나 혹은 옅은 미소가 필수적임을 명심하라.


마치 시험 전 급하게 1장만 공부했는데 1장에서마저 틀리면 매우 억울하듯이, 얕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아는 척일수록 아는 척에 대한 강박이 크기 마련. 따라서 '니가 아는 유미주의가 그 오용된 유미주의일지도? 훗?' 정도의 메시지를 슬쩍 전달만 할 수 있다면, 상대가 밑밥을 물 확률은 매우 높다. 아마도 상대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속 도리언은, 예술 그 자체를 위한 예술이 뭔지를 보여주잖아! 작품뿐만이 아니라구. 오스카 와일드는 삶에서도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둔 진정한 유미주의자였다고! 지금 생각해도 오스카 와일드 오지네 진짜. 하."


정도의 '난 유미주의 뭔지 안다고!!'스러운 멘트로 자신의  ‘예술사조 쫌 알지롱 형’ 아는 척을 이어나갈 텐데, 이쯤되면 성공이다.


이런 류의 아는 척들은 오스카 와일드와 유미주의, 그리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언급할 때 저지르는 매우 전형적인 오류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음... 미안한 얘기이지만, 내가 아까 오용된다고 했던 건, 이걸 말하는 거였어..;; 많은 사람들은 좁은 의미의 유미주의와 넓은 의미의 유미주의를 혼돈하더라구?"

정도의 멘트로 아까 던진 밑밥을 흐뭇하게 회수하면서, 당황한 상대를 향해



"너의 말대로 오스카 와일드는 삶의 세속적 가치와 예술의 구분을 주장하고, 예술을 도덕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걸 극혐했잖아. 따라서 작품 속의 도리안 그레이는 유미주의를 환기한다고 볼 수 있지만, 오스카 와일드 스스로는 자신의 작품과 자기  삶을 구분했다구. 그러니까 오스카 와일드가 보여준 태도는 도리언의 그것과 매우 달라! 좁은 의미인 사조로서의 유미주의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넓은 의미의 유미주의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음.. 하지만 너의 생각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어 :) 힛"     

이라고 하면 된다. 상대의 멘트에 대한 지적과 동시에, 그래도 그 정도면 뭐 괜찮았다는 이른바 ‘우쭈쭈 전략’.

이쯤 되면 상대의 아는 척은 갈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될 텐데, 이를 확인 후 돌아서면서


"아차차. 시간이 벌써 이렇게?! 나는 이제 집에 가서 월터 페이퍼의 산문이나 읽어야겠다! 아마 데카당스 문예사조의 선구자이자 오스카 와일드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비평가라지? 하하 나는 진짜 책을 안 읽은 채 어디 가서 겨우 리뷰나 영화같은 거 본 걸로는 내 지식으로 안되더라구! 그럼 이만 갈게? 안녕?"

라고 한 뒤 사라지면 확실한 마무리다. 벙찐 상대를 돌아보지 말고 사뿐하게 떠나시라!




어차피 문학 토크는 8할이 허세. 허세엔 허세로!

널리 널리 읽은 척 하시라!




지난 호 이야기.

https://brunch.co.kr/@neuvilbooks/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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