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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16. 2018

3. 윤동주 시집 읽은 척 가이드

문학? 읽지 맑고 읽은 '척' 하세요.


* <문학 읽은 척 가이드>에선 상대의 몹쓸 문학 아는 척에 대응하는 읽은 척 스킬을 알려드립니다.

* 문학토크, 8할이 허세입니다. 기죽지 말고 허세엔 허세로 대응하세요!

* 프롤로그를 읽고 오시면 더 좋습니다.

https://brunch.co.kr/@neuvilbooks/2



0. 윤동주 읽은 척 Intro


문학 읽은 척 스킬에서 반드시 마스터해야만 하는 분야가 있다. ‘시’이다. 애초 짧은 분량 때문에 ‘그까이꺼 모 그냥 읽고 말지 뭐하러 읽은 척을 해’라고 생각하다간 상대의 '<서시>에서 느껴지는 윤동주의 부끄러움의 미학이란!’이나 ‘기형도 시의 그로테스크함은, 어쩌면 현재 미래파라고 불리는 시인들의 감각을 미리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같은 몹쓸 아는 척 폭격 앞에서 할 말이 별로 없어진다.     


시에 대한 현란한 아는 척들이 매우 쉽게 내뱉어지는 건, 시에 대한 토크야말로 그 구체적인 내용과는 별개로 아무 말 아는 척의 향연으로 이루어지기가 쉬우며, 느낌적인 느낌으로 퉁치기가 매우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윤동주’에 대한 아는 척은 그 방대함으로 보나 그 뻔뻔함으로 보나 문학 아는 척의 베스트 소재라고 볼 수 있다. 2016년 영화 <동주>를 기점으로 해서 '영화 보고 책 본 척'형 아는 척이 매우 늘었고, 때 맞춰 나온 복각본 시집을 액세서리처럼 활용하는 '나 책 사는 사람이야'형 아는 척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가방 안에 든 시집을 스윽 보여주면서 '나 시집 좀 읽어'스러운 티를 낸다던가, 취미가 뭐냐는 말에 '저 집에서 가끔 시 읽어요 훗'과 같은 멘트들로 쉽게 문학부심을 get하는 사람들. "윤동주, 당신에게 취하는 밤"과 같은 황당한 멘트와 함께 시집의 사진을 sns에 올려놓으며 뿌듯해하는 사람들. 주위에서 쉽게 만나는 수많은 윤동주 아는 척에 대응하기 위해선, 실제 독서 유무와는 별개로 윤동주에 대한 읽은 척 스킬이 필수적이다.



흔한 북스타그램


1. ‘윤동주 – 옥사한 저항시인’ 형 아는 척


윤동주의 죽음 이후부터 윤동주는 민족주의 시인, 저항 시인이라는 강력한 패러다임 속에서만 재생산되었다. 한편에서는 윤동주를 민족주의 시인, 혹은 저항 시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일련의 노골적인 시도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거부하거나 폭로하면서 여기에 대응했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꽤나 오랜 기간 이 패러다임 속에서 윤동주를 만들어나갔고, 그렇게 윤동주는 어렴풋이, 혹은 어설프게 ‘민족주의 시인’이자 동시에 일본에서 옥사한 ‘저항시인’으로 박제되어갔다.


따라서 가장 보편적인 아는 척들은 보통 <서시>나 <별 헤는 밤> 정도를 언급하면서


"하아... 일제에서 옥사한 저항시인 윤동주의 시를 보고 있노라면, 어제 먹은 돈코츠라멘을 토해버리고 싶은 기분이라니까! "


"우잉.. 주권을 빼앗긴 시대에 우리말로 시를 써야 하는 시인의 삶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윤동주는 아마 부끄러워하는 시를 통해서 저항을 한 것이 아닐까 해.."

등의 황당한 아는 척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살아생전 윤동주는 결코 시인이 아닌 시인지망생에 가까웠으며, 그의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역시도 그가 죽은 뒤 3년이 지나서야 지인들에 의해 출간된다. 또한 지금 시중에서 판매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가 스스로 습작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시집에 넣지 않고자 했던 과거의 허접한 모든 시까지도 포함되어있다.

더불어 윤동주의 시에는 민족을 보는 윤동주의 안타까운 시각과는 별개로 뚜렷한 저항의식을 가진 시는 매우드물며, 이육사나 이용악과 같은 비슷한 시기의 시인들과 비교하면 민족의 비전이나 탈출구를 모색한 흔적도 흐릿하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일생 자체를 이미 '시인'이라는 관점을 전제한 채 바라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며, 윤동주의 모든 시를 쉽게 저항시로 해석하거나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라는 이미지안에 가두는 것 역시도 윤동주에 대한 제대로 된 감상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초보적인 아는 척을 마주한다면, 차근차근 그들의 단순함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윤동주의 박제된 이미지를 만든 과거의 분위기를 안타까워함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읽은 척 대응이다. 예컨대


“하하. 근데 윤동주를 여전히 민족시인이나 저항시인으로 보는 것은 지양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 해.”

정도로 운을 뗀 뒤에,


"윤동주가 민족시인이자 저항시인으로 되는 과정은, 해방 이후 국민국가를 매우 강조하던 맥락 속에서 기획된 측면이 있거든. 공산주의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이 윤동주를 주목하게 한 가장 큰 요소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실은 윤동주는 지금의 연변에서 태어났고, 살아생전 남한에 머물렀던 것은 연희전문대학을 다니던 기간밖에 없었거든! 그런 윤동주를 지극히 남한이라는 좁은 국가 안에 가두는 것은 어쩌면 너무 낡은 과거의 감각으로 윤동주를 왜곡시키는 일은 아닐까...?"

정도로 읽은 척을 해주면 적절하다. 


여기에 덧붙여서, 혹여나 <서시>를 인용하며 아는 척을 시전하는 상대를 만났다면

"하하, 너가 <서시>라면서 인용하는 그 시를 윤동주는 <서시>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니?! 윤동주는 대학생 때 자신의 시 몇 편을 골라서 직접 핸드메이드로 시집 3권을 만들었는데, 그 시집의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고, 시집 제일 앞에 서문을 대신하여 쓴 시가 바로 그 시야!"

정도의 디테일한 읽은 척도 유용하다.




아는 척 교과서 영화 <동주>



2. ‘영화 <동주>보고 책 본 척’ 형 아는 척


윤동주가 완전히 소비와 대중문화콘텐츠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동주에 대한 진지한 감상들과 평가들은 아주 극소수의 전유물이 되었고, 그 외 대다수에게 동주는 자신의 문화적 소양과 취향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편한 아는 척 액세서리가 되었다. 연구자나 일부 전공자가 아닌 대중에게 ‘동주’라는 콘텐츠는 자신의 고급스러운 교양(구체적으로는 ‘시’나 ‘문학’에 대한 관심)을 은근히 자랑하는 수단이자 기호일 뿐이다.


말하자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나 베스트셀러 책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적당히 대중적 수준의(그러면서도 교양 있는 소재의) 콘텐츠를 원하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영화 <동주>는 매우 매력적인 아는 척 상품이었다.

그 결과 영화 <동주>를 기점으로 윤동주에 대한 아는 척이 매우 흔해졌고, 여기에 대응하는 읽은 척이 꽤나 어려워졌다. 예컨대


"하아.. 결국 윤동주는 사촌 송몽규와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약물실험으로 죽었잖아.. 너무 가슴 아프지 않니?"

"으.. 창씨개명이라는 선택을 한 후 쓴 <자화상>이라는 시를 보고 있자면, 윤동주가 느낀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가를 알 수 있는 거 같아...힝.. "

같은 멘트들이, 과거에는 일부의 고급형 아는 척이었다면 이제는 영화를 본 누구나 할 수 있는 흔한 멘트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통 ‘영화 보고 책 읽은 척’ 형 아는 척에 대응할 때는, 영화와는 다르게 표현된 책의 맥락을 짚어주면서 읽은 척하는 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으나, 영화 <동주>를 보고 아는 척하는 상대에게는 조금 더 디테일하고 깊은 읽은 척이 필요하다. 예컨대


"맞아. 그렇기도 한데, 우리는 어쩌면 윤동주를 영영 잃어버렸는지도 몰라... 윤동주는 살아생전 국민국가라는 일본의 이데올로기에 끊임없이 동원되는 자신의 삶을 절망했던 것인데, 우리는 여전히 윤동주를 애국 뽕의 매개로만 쓰는 것은 아닐까 싶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

처럼 현재의 윤동주 생산방식을 지적하거나, 혹은


"으.. 어쩌면 우리의 이런 대화로 윤동주가 더 왜곡되는 것은 아닐까?! 윤동주의 삶과 시는 시인 이전의 인간 윤동주로 봤을 때가 더 정확한 감상일 텐데, 우리 모두에게 윤동주는 이미 스타 시인으로 박제되어 있잖아ㅜㅜ 그의 인간적인 고뇌는 우리에게 영영 닿을 수 없을지도....? 그래서 난 사실 최근 마구 생기고 있는 윤동주 담론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과 같은 소비방식을 개탄하는 읽은 척이 효과적이다.


만약에 이런 읽은 척에 대해서 상대가 '그럼 어쩌자는 거야!?'라거나 '그럼 윤동주를 즐기는 적절한 방법이 뭔데!'같이 질척이는 반응을 보여온다면,


"이미 죽은 시인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완벽히 재현할 수 없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건 누군가가 제시한 틀 안에 시인을 가두고 있는 현상들이야. 마치 영화 <동주>로 윤동주의 이미지가 굳어진 것처럼! 이미 (3)86세대는 윤동주랑 민족시인, 저항시인을 완벽하게 묶어버렸어."
"우리는 이제 민족, 국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윤동주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소비상품으로서의 윤동주는 늘 경계를 해야 한다구. 각각 개개인이 자신의 감각으로 그려내는, 다양한 윤동주가 필요하다구! "

정도의 마무리면 완벽한 읽은 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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