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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31. 2018

10. 상냥한 폭력의 시대의 도시 감각

정이현, <상냥한 폭력의 시대>

*느빌의 책방에서는 "예술"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도시"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도시" 3부작 중 첫 번째 텍스트입니다.





도시에 거주하는 예술가

지금까지 느빌의 책방에서는 "예술"이라는 키워드로 작품들을 읽어 왔다. <빌리엘리어트>에서 느슨히 넘어온 ‘예술’이라는 주제로 선택한 세 텍스트는 <시대의 소음>, <가수는 입을 다무네>, <버드맨> 까지었다. 세 작품의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예술가인 주인공(혹은 주요 인물로)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가 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꿈인 예술로 다수(기존의 가치들, 시스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나름의 움직임들을 보여주었다.


'시스템' 키워드의 마지막 텍스트였던 <빌리엘리어트> 
'예술'키워드로 읽은 텍스트들에서는 엄청난 예술가들이 주인공이었다


<빌리엘리어트>에서부터 시작한 네 개의 텍스트들에서 보이는 예술이라는 특별한 꿈을 향한 천재들의 열정은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감동으로 다가온다. 주된 서사를 이끌어가는 시선은 대체로 이 반짝거리는 ‘예술가’들에게 향해 있었다. 


하지만 토론을 하면서도 자주 언급되었듯 그 주변의 인물에게 마음이 쓰이고 더 눈길이 갈 때도 많았다. 예술이 사회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동안 예술가가 되지 못한 이들은 어디에 있어야 하나,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참고 견디는 생(빌리의 아버지나 형처럼)뿐인가 싶었다. 그들의 평범한 욕망이나 꿈은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딘가에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싶었다. 


지난 텍스트 <버드맨>을 떠올려보자. 영화의 대부분은 무대와 무대 뒤편에서 치밀하게 불안해하는 주인공을 쫓는다. 뉴욕 브로드웨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연극을 평론가에게도 대중에게도 인정받아야 하는 강박적인 주인공. 예술적 인정에 강박적인 집착을 보이는 그가 공연장 바깥으로 나올 때 카메라는 수많은 인파를 ‘지나친다’. 개인적으로 그가 거주하며 예술적 활동을 인정받고자 하는 공간이 ‘도시’라는 점, 그리고 도시의 수많은 이들(나를 포함한)을 어느 장면에선가는 조금은 비웃으면서도 이들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예술가의 모순적 태도가 흥미로웠다.


한편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도시의 모습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샘과 마이크가 진실 혹은 거짓 게임을 하던 옥상이다. 둘의 대화를 중점적으로 보여주지만, 그들 아래에는 그럴 거면 뛰어내리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 게임 벌칙으로 침을 뱉게 되는 대머리 아저씨,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들이 있다. 두 장면에서 나는 영화 속 인물들이 영화적 화면 그대로 옥상 위에 앉아 발 밑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느껴졌다. 


‘넌 정말 특별해, 그건 사실이야.’라고 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마이크의 그것은 과연 방금 옥상 밑을 지나쳤을 수도 있는 나 같은 인물에게도 하는 말인가?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심술이 조금 났고, 약간 초라해졌다. 그래서 주인공만을 쫓았던 카메라가 휙 지나쳐버린 수많은 이들, 그들에게 시선을 돌리면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까 궁금했다. 


그런가 하면, 빌리가 발레를 제대로 교육받기 위해 가는 곳도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가볼 일 없던 ‘런던’이다. 도시는, 예술로 인정받고 싶은 예술가의 욕망과 예술을 누리고 향유하고 싶은 자들의 욕망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곳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읽은 텍스트들에는 '도시'에서 예술이라는 특별한 가치에 대한 서로 다른 욕망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순간들이 포착되었다.  





그런데 정이현이 <상냥한 폭력의 시대>에서 그려낸 도시에는 그런 ‘욕망’이 없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거창한 목표도 갈등도 폭력도 없다. 그런데 특별한 욕망 없음의 상태에서도 끈질기게 생활은 이어진다. 이를 보면서 슬픔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나도 결국은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두려웠고, 나 또한 이미 조금은 느끼고 있는 감정들이어서 슬펐다. 


버드맨이 우스워 폰 카메라로 찍던 누구,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하는 취향으로 연극을 보러 온 누구, 길을 지나가다 별안간 가래침 세례를 맞은 누구, 예술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하면서 ‘부기 춤을 춰봐’를 들으며 청소를 하는 누구… 단지 ‘나’이고 싶었을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나는 그들이 결국 무엇도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외롭게 느껴졌는데, 그런 외로움을 정면으로 그려낸 이야기들이 바로 정이현의 <상냥한 폭력의 시대>였다. 



#도시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도시에서의 하루는 좀처럼 흐르지 않는 것 같지만 1년, 5년, 10년 큰 단위의 시간들은 오히려 눈 깜짝할 새에 흘러버린다. 소설 속에서는 ‘일일이 열거할 순 없어도 아이가 크는 동안 가슴을 쓸며 지나간 일은 많았(<아무것도 아닌 것>, 39)’던 것처럼 무언가의 흔적은 있다. 그러나 그냥 그건 누구나 지나왔을 평범한 세월로 말해질 뿐이다. 또한, 이들에게는 과거에 대한 회상도 없으며 추억도 없다. 이들은 자꾸만 10년 후, 5년 후를 상상한다. 


10년쯤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딸은 무엇이 되어 있을까. 10년 전에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었을까. 10년 전의 일에 발목이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삶을 살고 있으면 안 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61)


20년 후에는 남우도 나도 쉰 살이었다. 키우던 늙은 개는 죽었을 텐데 누구를 가족이라 여기며 살고 있을까, 남우는. 쉰 살의 헬스 트레이너는 없을 텐데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 남우는. 그러면 쉰 살의 나는, 나는….
(<우리 안의 천사>, 87)


두 손바닥을 높이 쳐들고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짝!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짝!
순식간에 20년이 지나버렸다. 침묵만이 남은 미래에서 나는 암흑과 뒤섞일 때까지 앉아 있었다.
(<영영, 여름>131)

그들이 선 곳을 지나쳐 승강장 쪽으로 걸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진은 저 문을 들어서는 10년 후의 시우를 떠올렸다. 아직 지구에 오지 않은 둘째 아이도 떠올렸다.
(<서랍 속의 집>, 167)


효율과 생산성으로 시간을 파편화시키고 그렇게 인식되는 시간들 속에서 우리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지만, 흐르는 시간을 지낸 후의 나는 ‘생기’를 잃어버리게 된다(<안나>). 


그렇다고 그들이 성숙해졌냐 하면 그것도 아닌 듯하다. 성숙과는 약간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인물들의 늙음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시간이 흐름과 함께 ‘성숙’한다는 것은 이렇게 계획적인 시간 개념 속에서는 어렵다.



갈등도 슬픔도 기쁨도 없는 생활



그런가 하면 <상냥한 폭력의 시대>의 인물들은 갈등을 회피하는 데 능하다. 이전의 정이현 작품들(<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참고) 속 인물들은 차라리 위악적인 스탠스에 가까웠다. 그들은 세계의 비밀을 자신의 손바닥에 놓은 듯 자신 있게 수작을 부리다가 무너지곤 했다. 작가는 위악적인 주인공들을 통해 이 세계가 굴러가는 질서가 감히 개인의 계산으로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그려낸 적 있다.


시간이 흘렀고 주로 이전엔 20대에서 30대 초반이었던 주인공들은 이제 30대 후반, 40대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더 이상 무언가를 간파하거나 깨트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미 도시 혹은 사회의 암묵적인 규칙들을 체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규칙은 웬만해서는 심한 갈등을 유발하지 않으며, 되도록 모든 갈등 상황을 회피하고 그러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지켜내는 쪽으로 발달되어 있다. 


진은 필사적으로, 코 대신 귀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랍 속의 집>, 189)


진에게 닥친 비극에 대처하는데 가장 본능적이고 일차적인 반응은 ‘코를 막는 것’이겠지만, 그녀는 코보다 귀를 막아야 함을 생각한다. 이제 일차적인 반응으로는 나를 지킬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잘 안다. 이미 문서화된 아파트 계약을 깨트리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원래 거주자의 불편한 진실들은 차라리 모르고, 잊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안다. 이런 대처들 속에서는 영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단죄는 항상 유예된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극적인 파국이 닥치면, 속죄와 구원도 머지않을 텐데. (<우리 안의 천사>, 97)


단죄가 영영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속죄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 도시의 단죄일까?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피해자이고 모두가 가해자인 도시의 풍경만이 남아 있다. 


난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뚜껑을 열어보지도 않았고, 가스 쪽으로는 가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죠. (<아무것도 아닌 것>, 51)

파란 빛깔의 돔형 지붕이 이 세계를 뚜껑처럼 덮고 있는 것 같았다. 거대한 뚜껑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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