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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27. 2018

9-1. <버드맨> 뒷담화

* <느빌>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록합니다. 느빌런(?)들의 열띤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겠습니다.

* 발제문과 뒷담화는 전담 에디터 없이 돌아가며 작성합니다.

* 이 뒷담화는 <시대의 소음>, <가수는 입을 다무네>에 이어 작성된 예술 키워드의 세번째 텍스트입니다.


1. 파-티가 끝나고 다시 가열차게


빅-느빌-파티가 성황리에 끝나고 한 주의 정비시간을 갖고 나서, 느빌 사람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예술 키워드의 마지막 발제를 진행했다. 


"몰락한 예술가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바라는 명예 회복"


발제자는 이전 발제에서 진행한 <가수는 입을 다무네>가 갖고 있는 특수한 주제와 닿아 있고, 큰 주제인 예술에 관한 이야기도 같이 할 만한 텍스트를 가져왔다.


<느빌> 그 아홉번째 모임에서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 다뤘다.


버드맨(2014)





*이번 모임엔 학곰박루저다희동석이주,  해정, 일벌레, 최생 님이 참여했습니다.

*본 녹취록은 이전 게시글인 '발제문'을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참고 링크 : 버드맨 파워 발제문


2. 뒷담화 - 《버드맨》


* 해정의 발제문을 읽고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예술과 비예술

  

박루저: 발제문에서 예술과 비예술로 나누는 것에 대해 부분적으로 동의해요. 제 생각은 무대와 무대밖이 예술과 비예술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무대 밖이 비예술의 세계라면 무대 위의 예술 안에서도 진짜 예술과 상업적 예술로 나뉜다고 보았어요. 총 세 가지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곰: 저는 예술과 비예술 구분을 고전적 예술(아버지)과 SNS에서 화제가 되는 것(딸)으로 구분한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최생: 저는 상업주의를 벗어난 자신의 동기와의 대립이지 예술과 비예술의 대립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박루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무대 위에서만 발기를 하는 마이클(에드워드 노튼)의 모습은 어떻게 보셨나요?

    

최생: 그사람은 무대밖에서는 자신의 삶을 찾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람인데, 무대 안에서는 뭔가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주인공 리건(마이클 키튼)과 비슷하다고 봤어요.


동석: 최생의 말에 동감합니다. 저는 예술과 비예술로 구분하기 보단 다른 관점으로 영화를 보았어요. <아바타> 같은 실사와 비슷한 컴퓨터 그래픽을 썼던 영화는 사람들에게 종종 "예술이다"라는 말을 들으며 꽤 괜찮은 평을 받습니다. 저는 이런 영화들 역시도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생의 말처럼 리건이 하고 싶은 연극과 그가 과거에 연기했던 버드맨은 상업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해정: 제가 예술과 비예술로 나누긴 했지만, 발제에서 비예술이라고 일컬은 것은 커다란 자본을 기반으로, 돈을 벌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업물 전반 이었습니다. 대체로 그런 것들은 예술이 아니라고 인식되는 경우가 꽤 다수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전제로 정의를 내렸어요. 예술과 상업적인 것(예술이 아니라고 불리는 것)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주인공 리건은 그 경계를 계속해서 나눕니다. 저는 영화 말미 그가 그 경계를 넘어설 때, 상업적이면서도 동시에 예술적인 비행의 순간이 온 것이라 이해했어요.     




* 자기 자신과의 포용?


일벌레: 주인공 리건은 자신의 한계에서 못 벗어납니다. 예술가로서 한 단계 넘어서거나, 연출가로서 연극을 잘 풀어간다거나 과거(버드맨)로부터 매여있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거나 하지 못하죠. 그런 것들 때문에 고뇌하고, 때때로 광기도 보이는 한 예술가가 한계를 깨려는 욕망을 잘 보인 것 같았어요.


해정: 가장 좋았던, 의미심장하다고 느꼈던 장면은 영화 말미 버드맨이 똥을 싸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버드맨은 주인공처럼 예술과 비예술을 나누고 예술에 더 가치를 두기보다는 '그게 예술이 아니면 어때? 인기가 짱이고 할리우드가 짱짱이야.'라고 말하는 인물이에요. 주인공과 전혀 다른 것에 가치를 두는 것 같지만 실은 그 두 가지를 철저히 경계짓고 있다는 점에서 주인공과는 실상 같지요.


그런데 영화 말미 버드맨이 신문을 보며 똥을 싸고 있어요. 그리고 주인공은 그런 버드맨을 지나쳐 창밖으로 비상합니다. 두 인물이 교차하는 이 지점이 그런 모습으로 그려진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매우 단순한 이해일 수 있지만 예술과 비예술이라는 프레임을 넘어서고, 그렇게 한 발 더 나아간 한 인물의 모습으로 보였어요.     


동석: 버드맨이 주인공에게 '너 옛날에 잘나갔잖아. 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목소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연극을 하면서 '심오한 예술, 철학적인 예술'을 좇으며 자기 과거를 계속 부정해요.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이 점차 자기 과거를 포용하는 것 같았어요. 과거를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써 가져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박루저: 포용이라기 보다는 저는 상업과 순수 예술의 구분이 있다고 믿는데, 영화에서 보여준 것은 실제로 그런 구분은 없고 그것을 구분하는 사람(주인공)조차도 구분이 안되는 상황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비평가가 나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상업/순수 예술로 구분을 하는데 순수 예술 조차도 비평가 한마디로 순수 예술이 되냐 안 되냐 하는 허상을 보여줘서 이 구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동석: 주인공에 집중에서 봤을 때를 이야기한 것이에요. 연극의 리허설을 진행할때마다 무대와 무대 뒷편에서의 그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코에 총을 쏘기 전에 대기실에서는 그는 관에 있듯이 누워 있었어요. 직전 장면에서 자신의 안에 있는 버드맨을 포용했기 때문에 담담해진 것으로 보았어요. 또 누운 자세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도 같았고요. 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를 포용했고, 이것이 박루저가 말한 것처럼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해정: 저는 한 인물이 한 인물을 포용했다고 보지는 않았어요. 두 사람은 실은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만 순수와 상업예술을 구분하는 모종의 태도를 놓아버린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선 둘의 결합일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 영화 말미 딸이 비상하는 주인공을 보는 표정이 순수예술을 볼때의 표정은 아닌 것 같았어요. 어린아이가 슈퍼 히어로 영화를 볼 때의 얼굴 같다고 느꼈는데, 어떤 사람이 한 단계를 넘어서 어디론가 갔다는 건 분명 예술적인 순간일 것이에요. 하지만 그걸 보는 사람은 또 잔뜩 흥분한 채로(마치 히어로 무비를 보듯이) 봅니다. 굉장히 아이러니한데... 예술과 상업, 이 경계가 허물어진 순간을 딸의 얼굴로 드러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주인공의 죽음인가 비상인가(+ 딸에 대해서)


동석'맞다 아니다'가 중요하진 않은 것 같지만, 주인공이 마지막 장면에서 병원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고 보세요?

     

최생: 죽은 거 아니었나요?     


해정, 박루저, 일벌레: 하늘로 날아갔다고 보았어요. 


최생: 사이렌 소리가 울리지 않았던가요? 


동석: 딸이 창을 열었을 때 새소리가 났었어요.


다희: 상징적인 영화적 표현으로 보았어요. 대중의 사랑도 받고 예술가가 된다는 걸 표현한 것 같았어요.


최생: 아빠는 죽었지만(단호), 그 전까지는 딸이 인정을 안하잖아요? 이전까지는 아빠가 그저 퇴물배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빠가 결국 이뤄냈다? 이런 느낌으로 긍정적인 화해가 된 것이 아닐까요.    


박루저: 이 영화는 전형적인 미국의 가족분리의 한 단면을 다뤄요. 인간적인 모습으로 억지로 연출되는 아빠와 딸의 화해의 모습이 아니고, 그런 방식(아버지 비상, 딸은 바라보는)으로 화해한 것이 되게 좋았어요.


해정: 저는 딸은 예술/비예술을 구분하지 않는, 혹은 그러한 구분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보았어요. 딸의 인정을 받았다라기보다는 딸이 평소에 “당신은 그저 인정받고 싶은 것이고 ‘예술’ 자체보다는 세간의 관심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잖아요? 주인공은 이 말을 받아들이기 싫어했을 것 같아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예술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위한 수단으로서의 예술이 되니까. 내 진심이 왜곡되기 싫고, 설령 그게 진짜여도 그걸 인정하기 싫은 것이죠. 마지막엔 딸의 인정이라기보단, 누구도 예상치못한 어떤 지점에 대한 암시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최생: 딸이 마약을 하니까 헛것을 본 것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웃음). 이 부분은 녹취할 때 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이게 정답입니다.     

•̀.̫•́)✧  최생님의 요청대로 빼지 않았습니다(하-하!).)



* 브로드-웨이의 욕망 그리고 도시의 사람들


최생: 그럼 마지막에 노숙자가 연극 연기를 하듯 연출된 장면은 어떻게들 보셨나요?

    

박루저: 도시의 한 장면이 아닐까요?

 

학곰: 브로드웨이는 도시 자체가 욕망의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하나의 비유로 노숙자는 등장했을 것 같아요. 삶과 예술의 경계가 무너지는 한 장면으로 욕망의 공간인 도시를 그 장면을 통해서 보여준게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는 다음 시간에 도시의 사람들에 대해 주목해보십시다(급-전개)


다희: 우리가 여태까지 봤던 텍스트의 인물들은 특별한 존재들의 이야기였어요. 도시 속 현실에 있는 비루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어가보는게 어떨까요?




* 다음 시간부터는 <도시>라는 키워드로 3개의 텍스트를 다룹니다.



휴- 이번 뒷담화도 파워-하게 끝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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