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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27. 2018

9. 예술과 상업, 그 사이에서 비상하기

영화 <버드맨>으로 보는 오늘의 예술 가능성

     


*느빌의 책방에서는 "시스템-개인"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예술"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버드맨>은 "예술" 3부작 중 세 번째 텍스트입니다.

(들어가기 전, 스포가 있다는 말씀을 먼저)






영화 <아이언맨> 시리즈 포스터들




0. 히어로 무비에 관한 소고



 할리우드.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다. 타이즈나 기계갑옷을 두르고 도심을 누비며 악을 물리치고 선(과 돈)의 힘을 재확인하게 만드는 히어로 무비. 그것들은 대다수 마블의 그것처럼,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기보다 집요하게 새로운 우주, 혹은 새로운 세계관을 갈망하는 것들이다. 현실이라는 질료를 가지고 전혀 다른 세계를 처음부터 창조하려는 할리우드의 큰손들은 뭐랄까, 어쨌든 문화 생태계를 학살하는 존재로 설명된다. 예술과는 거리가 먼 무엇으로―아마도 이때의 예술은 ‘예술은 관람자 사유의 새로운 확장을 가져와야 한다’든지, ‘감독의 예술적 열망이 열렬히 드러난 것이어야 한다’든지 하는, 뭐 그런 것일 테다. (한편, 거대한 스크린 너머 새로운 세계가 그려지는 현장만큼 ‘사유의 새로운 확장’에 가까운 것이 있을까. 새로운 세계에 그저 복무하는 감독의 태도만큼 열렬한 것이 있을까… 싶은 것이 내 생각이지만) 어쨌든, 히어로 무비를 관람하는 대다수의 관객들의 목적은 ‘예술 향유하기’보다는 현실 못지않은 CG 기술에 힘입어 더욱 견고해질 또 다른 세계관의 확장과 재현을 재확인하는 일에 가깝다. 그런건 대체로 예술의 대척점에 놓여있는 상업물로 이해되기 일쑤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 속 히어로는 그저 히어로이다. 종종 이 사람이 그래서 어떻게 히어로가 되었는가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히어로가 된 후로는, 자신에게 부여된 롤과 가치관을 맹렬히 따르는 히어로만이 존재한다. 자신의 기반을 흔드는 비밀을 마주하더라도 이미 히어로가 된 그들은 히어로이다. 영화는 대체로 거기까지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히어로 무비는 히어로와 그것으로 분한 배우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지만, 동시에 침범시킨다. 양방향은 아니다. 가상의 존재가 현실의 존재를 침범하는 것에 가깝다. 현실을 사는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 맨’으로 호명되기 일쑤인 것처럼. 그런 경향은 해당 영화의 후속작이 더해질수록 강화된다. 가상이 현실을 압도하는 경우겠다.


 하지만 그것의 역을 꿈꾸는 새로운 히어로 무비가 있다. 현실을 침범하는 가상이 아니라, 가상을 침범할 현실을 그리는. 영화 <레버넌트>로 더 유명할 이냐리투 감독의 작품, <버드맨>이다.  

     

   


영화 <버드맨>의 포스터들




1. 영화 <버드맨>

     

 영화 <버드맨>은 과거 ‘버드맨’이라는 슈퍼히어로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무비스타 리건의 지금을 그린다. ‘버드맨’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예술가’이고자 했던 리건은 ‘버드맨’ 후속을 거절하는데, 그 뒤로 맹렬히 추락한다. 다시금 재기하되 예술가이길 꿈꾸는 리건은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원작으로 한 연극을 제작하고 주연도 맡는다. 앞으로 3일 동안의 프리뷰가 끝나면 그의 첫 연극이 세상에 공개되는 상황. 그를 향한 세간의 평가가 시작될―대중의 사랑과 평단의 주목을 동시에 원하는 리건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상황인 셈이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은 자꾸만 이상하거나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런 리건에겐 화려한 스타 ‘버드맨’의 목소리가 내내 함께인데, 코앞에 닥친 미래를 앞두고 화려한 재기와 명백한 실패를 동시에 예감하며 갈등하는 한 배우의 초상을 확인할 수 있다.  

     



     


2. 떠오른 질문들

     

 이번 주 작품으로 <버드맨>을 선정한 이유는, 이전의 발제문에서 주요 쟁점으로 삼았던 ‘예술’과 ‘예술가’ 사이의 무엇을 화제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혹은 ‘과거의 영광과 지금 사이에서 초라하게 존재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이전 작품인 <가수는 입을 다무네>의 다음으로 좋지 않을까 했다. 실제로 영화엔 예술과 그것이 아닌 것 사이를 배회하는 대사들이 가득했다. 예술을 하고자 하는 왕년의 무비스타, 라는 기본 설정 자체가 그런 질문을 내포한다. 브로드웨이의 연극 무대와 그 변두리를 누비는 리건과 할리우드의 프랜차이즈 식 영화 산업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버드맨이 갈등하는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해서 리건이 닿으려는 예술은 무엇이며 그의 반대 인격 같은 버드맨은 예술을 어떻게 보는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또한 속옷만 입은 채 브로드웨이를 누볐던 리건이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 당시 영상으로 SNS의 스타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주목이라든지 관심이라든지, 리건이 외면하고픈 버드맨으로서의 욕망을 자비 없는 말들로 까발리는 딸의 대사는 “‘그것을 보는 이’와 ‘그것을 만든 이(혹은 만든 것)’ 사이의 권력구조”가 지금에 와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뒤집힌 권력 구조 안에서 과거와 같은 ‘예술’은 진정 가능한가를 묻는다. (평론가의 평을 신경 쓰는 리건에게 세간의 관심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딸의 말들은, 이제와 대중의 감각과 거리가 멀어진 비평의 세계를 돌려 까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건을 포함한 배우들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쫓는 카메라의 시선 역시 (리얼리티를 위해서였다는 이냐리투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오늘 날 무비스타를 향한 세간의 시선 같다. 공적이거나 사적이거나, 그 전부가 응시와 소비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향한 대중―또는 언론이나 SNS의 시선 말이다. 물론 그것들은 언제나 ‘편집’을 담보로 한다는 점에서, 편집되지 않은 (것처럼 찍힌) <버드맨>의 그것과는 분명 구별되겠지만. (일단 이 부분은 뒤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어쨌든, 버드맨은 세간의 평가와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며 추락하는 이의 순간을 담고 있다. 러닝 타임 내내 끊임없이 던지는, 예술과 삶에 대한 아이러닉한 질문들에 이냐리투 감독은 어떤 답을 내리고 있을까.         

     




3. 예술과 비-예술(상업), 무너진 경계 사이에서

     

 나는 왜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하지? 난 당신이 원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어. 매일 다른 남자가 되려 애를 쓰며 산다고. (영화 <버드맨> 대사 中)

     

 앞서 간략하게 언급했던 대로 영화 <버드맨>은 예술과 비예술(상업), 혹은 가상과 현실 사이를 끊임없이 은유한다. 더 정확하게는 그것의 경계가 무너진 지금을. 그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등장하는 인물들이 무대 위에서 수행하는 대사들은 묘하게도 각 인물들의 처지와 닮아있다는 점이다. 단지 영화 안의 극뿐 만이 아니다. 주인공 리건의 삶은 그로 분한 배우 마이클 키튼의 삶과 닮아있다―팀 버튼의 영화 <배트맨>의 주인공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만, 그 후 그럴싸한 흥행작을 내지 못했다. 특히나 버드맨이라는 망령은 환상이면서도 이따금 리건의 삶을 장악한다―이는 앞서 언급한, 현실에 침투하는 가상 그 자체를 은유하는 듯하다. 연극의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버드맨은 더욱 집요하게 말한다. “네가 있을 곳은 이런 시궁창이 아니”라고.

     

 이런 일련의 것들에서 유독 흥미로웠던 점은,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활보하는 영화가 그것을 명백하게 구분하려는 인물을 주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리건은 ‘어쨌든 예술은 다른 것이다’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포스트-모던이라 일컬어지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온 다소 낡아 보이는 관념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인물이다. 누군가에겐 촌스럽거나 누구에게는 숭고할 무엇을. 리건은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테지만, 버드맨의 목소리는 전자인 듯하다. “예술? 그게 뭐 대단한 거야? 인기가 짱이라고! 우리 그때 좋았잖아.” 얼핏 리건의 것과 영 반대에 놓인 듯 하지만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상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무언가를 촌스럽거나 숭고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은, 대체로 묘한 우월감을 두르고 있다. 그런 이들은 심지어 거창하기까지 한데, 극 내내 리건을 괴롭히는 버드맨의 목소리를 떠올려보자. ‘대중은 어려운 영화 안 좋아해~ (거대한 용을 등장시키며) 이런 걸 좋아하지. 별 생각 없는 것들이거든.’이라고 말하는, 그래서 사람 묘하게 열 받게 하는(...) 그의 경건한 목소리를.


 

 그런 리건은 극 내내 이상에 닿고자 한다. 예술이 아닌 것이 자신의 연극에 간섭하지 않기를 바라고, 자신의 연기가 새로운 의미로 다시 시작되길 바란다. 하지만 그를 따라다니는 건 비단 버드맨의 목소리만이 아니다. 왕년의 무비스타기에 따라다니는 대중의 (천박하다면 천박할) 관심과 플래시 세례. 그리고 그런 그를 고깝게 보는 평론가가 있다. 그것들은 이제와 고전적 의미의 ‘예술’이 더 이상 불가능한 지금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은, 도무지 그런 관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건 그 자체로 신화적인 무엇이 됐다. 리건이 추구하는 가치와 리건이 사는 세계는 불화한다. 그럼 이제와 예술은 무엇이 되나.     

     

 “리건은 끊임없이 자신이 끝내 되지 못할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걸 입증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는 게임의 룰을 깰 수 있게 된다. 리얼리티에 굴복함으로써 리건은 무지의 예기치 못한 미덕(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버드맨>의 부제이기도 하다)을 얻게 된다. 거기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천박한 대중이든 고귀한 평론가든 세간의 평가는 이제와 디폴트가 되었다. 평가의 주체가 너무나 많은 것이 지금이다. 게다가 그 대다수는 대상을 향한 권력욕이 도사린 채 뒤틀려있기 마련이고, 그런 방식의 쉬운 소비는 언제나 수행된다. 예술적 열망을 가득 안고 있는 이의 사투가 몇 천원에 소비되는 게 지금의 삶이다. 영화 말미, 무대 위에서 자신의 얼굴―실은 코에 총알을 박아 넣은 한 인물의 명백한 추락. 그것을 향한 세간의 집요한 관심은 그래서 다소 씁쓸하다. 한 인물이 어디까지 가든 플래시는 언제고 터지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얼굴에 총알을 박아 넣은 리건은 가면을 벗는다.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이 거울 안에 있다. 그 옆에는 내내 거창하던 버드맨이 똥을 싸고 있다. 밖을 내려다본 리건은 비상한다. 도무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프레임을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리건 혼자만의 환상이었던 염력은 더 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현실을 닮은 가짜는 높은 가치를 담보한다. ‘리얼을 추종하는 페이크’의 적나라한 예는 영화일 것이다. 흑백무성으로 시작됐던 영화는 칼라가 되었고 목소리가 생겼다. 물론 그 이상이 된지는 오래된 일이다. CG 같은 최첨단 기술을 통해 현실 너머의 가상을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것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둘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매일 겪는 것이 지금 우리네 삶이다. 그리고 현실을 침범하는 가상이 무수한 삶이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현실―그러니까 가상 위로 드리워진 ‘리얼’은 ‘무엇’이 된다. 몇 차례 자살 시도가 있던 것으로 보이는 리건의 진짜―한 인생의 가장 첨예했을 순간 그 자체가 무대 위로 현시했을 때의 충격 같은 것 말이다. 리건에게 내내 회의적이던 평론가가 거창한 평을 남긴 것은 아마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마지막, 창밖을 올려다보는 딸의 얼굴은 ‘예술이 불가능한 시대에 가능할 예술’의 탄생과 그것을 목도한 이의 얼굴처럼 보인다. 그 얼굴은 경건하다기 보다, 마치 히어로 무비를 보는 어린 아이의 얼굴에 가깝다. 끝까지 의미심장한 것 투성인 영화다. 아무튼, 영화 <버드맨>은 굴종하되 굴종하지만은 않는 어떤 이의 추락과 비행을 통해, 21세기 혹은 그 이후에 있을 예술을 예감케 한다.

   

  



4. 번외 / 원 테이크

     

 영화를 보는 내내 흥미로웠던 건 원테이크(처럼 보이는) 방식을 고수한 것이었다.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모든 이들의 삶은 연속적인 스테디캠 촬영 같은 것이라고.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삶을 편집 없이 유랑한다. 우리가 시공간을 ‘편집’하는 유일한 순간은 우리 삶에 대해 타인에게 얘기할 때, 또 어떤 기억을 끄집어낼 때뿐이다. 나는 도망칠 수 없는 리얼리티 속에 <버드맨>의 등장인물들을 놓아두고 싶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리건이 겪는 순간을 ‘리얼’이 아니라 ‘연극’ 그 자체 같다고 느꼈다. 앞으로의 모든 동선이 유려하게 직조되어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유려한 카메라 워크는 인물을 한 공간에 붙잡아 두거나 혹은 가두는데, 그것이 도리어 리얼리티를 상실케 한다. 프레임 바깥의 공간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 어떤 공간이든 벽을 허물고 넘나드는 어떤 영화들과 달리 한 장소에만 정박해 있는 <버드맨>은 공간적 제약이 명백한 연극, 혹은 브로드웨이라는 공간 그 자체를 강력하게 환기한다. 인물은 늘 같은 곳에 있지만, 극에 따라 배경이 (인위적으로) 바뀌는 연극 말이다. 이런 카메라 워킹을 통해 가능할 리얼리티라면, 말 그대로 ‘삶 그 자체’라기 보다, 어떤 관념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물의 집요한 사투기, 그 자체일 것이다.

     

     

     



*, ** : (참조)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9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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