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슨한 빌리지 Feb 04. 2018

11. 자기혐오와 새로운 연대

이와이 슌지, <립반윙클의 신부>

*느빌의 책방에서는 "예술"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도시"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립반윙클의 신부>는 "도시" 3부작 중 두 번째 텍스트입니다.






# 들어가며


지난 모임에서는 <상냥한 폭력의 시대(이하 상폭시)>의 소설들을 통해 도시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을 엿보았다. 각 단편의 인물들에게서 이전 발제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체화된 도시의 감각을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를테면 5년 후, 10년 후의 목표는 존재하나 현재와 과거에 대한 인식은 부재하는 시간 감각, 구타나 욕설은 나타나지 않지만 교묘한 방식으로 사람을 압박하는 일상의 폭력들 그리고 문제 상황에 마주했을 때 해결하거나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가급적 갈등을 회피하고 묵인하는 태도들을 말이다.  

   

하지만 비겁해 보이고, 위선적인 것 같은 도시의 사람들의 태도에도 그들 나름의 당위성은 존재한다. <상폭시>의 인물들은 가정이 있거나 혹은 가정을 꾸리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라는 공간이다. 자신과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혹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그 폭력은 교양 있고 정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상폭시>의 단편들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리는 보통의 삶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정상가족의 범주에 있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정상가족은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이성애 부부와 한두 명의 자식으로 이뤄진 3-4인 가족을 말한다. 이를 정상의 기준으로 삼고(혹은 아이는 없을 수도 있다.) 언젠가 평균이 될 미래를 위해 아등바등 현재를 눈감고 버텨오는 군상들이 도시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지만 도시에는 정상가족 혹은 정상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특수한 현상으로도 볼 수 없는 이혼/재혼 가정(한부모 가정), 비혼 등 삶의 형태는 혼인이나 가족이라는 틀에 구속되지 않고 다양해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번 발제에서 정상가족의 붕괴와 자기혐오라는 도시의 다른 단면을 살펴보고자 <립반윙클의 신부>라는 책과 영화를 살펴보았다.     




# 정상가족의 붕괴와 자기혐오


주인공 나나미는 기간제 교사다. 그녀는 항상 주저하고 자신감이 없으며 타인에게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 그 배경에는 부모와의 관계가 트라우마로 깔려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음식점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가게가 노로 바이러스로 인해 위기에 처했을 때, 체인점 지점장과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다. 어머니의 외도의 기억은 나나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성장기(고3)에 버림받은 기억은 나나미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쓸모 혹은 가치에 대해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놈과 눈이 맞아서 집을 나간 거였군.”
아빠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버림받은 거야. 나뿐만이 아냐. 나나미, 너도 버림받았어.”
나도 버림받은 건가, 나나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p.21 아버지의 말)     



나나미는 끊임없이 "나 같은 사람은 무리야" 같은 진술을 통해 스스로를 저평가하고, 타인들 앞에서 낮은 자세를 취한다. 그 와중에 딸에 곁에 있던 아버지마저 “나나미가 유흥업소라도 가면 자기는 못 살거라”는 말을 함부로 하는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이었기에 나나미의 자존감은 더 바닥을 칠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 대한 부연설명을 하자면 나나미는 유흥업소의 성노동자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그 원인은 불륜이라는 이유로 가족을 떠난 어머니로 참작할 수 있다.      



"초혼이라더니 배에 애를 난 상처가 남아 있었다고."
“그만하시라니까요.”
“근데 딸린 애도 없었어. 있었으면 나나미의 오빠나 언니가 됐겠지? 혈통도 모르는데, 난 그 여우 같은 년을 우리 집에 들인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다.”(p.22 할머니와 아버지의 대화)     



버림받은 가족들은 나나미의 엄마를 부정한 여성 혹은 창부로 묘사한다. 때문에 나나미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어머니를 부정한 여성이라는 이미지에 대응하게 되고 아버지가 상정하는 부정한 여성들이 일하는 공간인 유흥업소에 자기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나미 ≒ 부정한 여성 ≒ 어머니 ≒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라는 맥락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교 동창 니타도리가 룸싸롱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말이나 AV를 찍은 적 있다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동시에 두고두고 생각하는 지점이 된다.)     


낮은 자존감 형성에 기여한 부모가 트라우마가 되어 나나미의 인생을 계속 따라다닌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체화하여 자기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방식은 교묘하게 “나는 무리야. 나는 안 될 거야.”하는 식으로 스스로 웅크리는 모양새이기에 자신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을 파괴하는 가장 큰 적인 셈이다.


나나미는 정신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되었다. 대신에 자기혐오라는 평생의 동반자를 얻었다. “3-4인 가족 =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붕괴된 자리엔 자신이 평균에도 못 미치는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유년을 보냈다고 평가하는’ 인물만 남은 것이다. 




# 나나미의 SNS 자아




그녀는 자신이 혐오하는 현실의 나나미와는 다른 새로운 자아들을 SNS에 형성한다. 그렇다고 플래닛이라는 SNS에 그녀가 등록한 @클램본과 @나나가와 미나미가 나나미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클램본은 <야마나시>라는 동화에 나오는 커다란 뿔테를 쓴 문학소녀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이 계정은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이나 본심을 드러낼 수 있는 나나미다. 호기심이 많고 활달하고(팔로워가 많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현실의 나나미가 자신의 의사표현을 잘 못하는 것과 상반된 모습으로 그려지기에 그녀가 거짓으로 자아를 꾸미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거짓은 현실의 나나미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나 따위가...’ 하는 식의 제약을 두고 통제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가 성장하면서 체득한 ‘자기혐오’라는 생존법에 불과하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면서도 역설적으로 자기혐오가 없으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할 수 없기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버릴 수가 없다.   


  


(*부연설명: 자기혐오의 메카니즘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자기를 인식하는 시선의 방향이 일반적이지 않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대하는 방식이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자기혐오를 하는 사람의 중심은 항상 타인에게 있다. ‘타인이 생각하기에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이 모든 생각의 출발점이다. 남들이 하는 만큼, 적당히 해서 중간만 가는, 조용히 집단이란 울타리 안에 스며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나나미 같은 자기 혐오자에게는 ‘자기 자신’이 처음부터 없기 때문이다.  타자는 있고 자신은 없는 자아를 가진 나나미의 시선의 방향은 '남이 보는 나' 한 방향뿐이다. 


이와 중에 나나미는 부모로부터 생긴 트라우마까지 있다. 그녀는 어머니가 집을 나간 후 스스로를 버림받을 만한 사람으로 규정한다. 때문에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이고, 그런 자신에게 타자의 위치에서 벌을 가한다.(나나미는 항상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보기 때문에, 타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벌을 받는 순간은 자신의 자아가 존재함을 느끼는 유일한 시간이 된다.(혼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무리야, 별로야.라는 자기혐오 말을 던질 때만 자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나나미에게 거짓은 현실 속 자신의 모습이고, 그녀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SNS의 익명 계정은 생각의 출발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뤄지기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공감하고, 화를 내고, 요청할 수 있는 진심을 드러낼 수 있는 나나미의 모습이다. 그 역시도 나나미의 한 부분이다. @클램본이 그녀의 감정을 담당했다면, @나나가와 미나미는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위해 절대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 “내가 행복해도 될까?”를 실현하는 자아이다. 

    

하지만 이런 나나미의 생각 메카니즘을 남편 데쓰야는 알 수가 없다. 왜 그녀가 플래닛을 통해 연인을 만나게 되었는지, 왜 계속해서 거짓을 말하는지, 왜 사람을 의심하고 경계하는지 말이다. 데쓰야는 나나미의 아버지와 비슷한 부류다. 그에게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가 체화되어 있다.      


결혼식에서 메모리얼 서비스를 신청하는 대목에서 먼저 그의 성장배경을 엿볼 수 있다. 잠자리채를 들고 다니며 유년을 보내고, 야구부로 중고등학교를 보냈으며, 수학교사로 안정적인 직업도 갖고 있다. 그는 숨길 과거가 없기에 당당하게 메모리얼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다. 그는 진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와이프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자신이 진실하고, 정상적으로 살아왔기에 친척의 수도 어느 정도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기억할만한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성장과정이 당연히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당연한 것들이 나나미에게는 부재한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거짓으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혹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면 파혼에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혼식날 데쓰야가 @클램본의 계정을 보면서 "이런 여자와는 결혼하는 남자가 불쌍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당연의 범주에 벗어난 것들은 비정상으로 간주한다. 그는 진실을 잣대로 배우자의 도덕성을 비난하지만 애초에 상대의 맥락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습게도 나나미의 아버지와 맞닿아있다.     



@클램본
예식장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사실 굉장히 한정되어 있다.
이상적인 가정, 이상적인 가족.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삼가 주세요.
그것이야말로 거짓입니다.(p.81 @클램본의 SNS)


     


# 새로운 연대의 방식 나나미의 거리 그리고 마시로     


나나미는 이야기 내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거리를 둔다. 그녀가 거리를 두는 것은 어릴 적 경험(어머니의 불륜) 때문에 타인을 신뢰하지 않고, 타인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본능적인 행동이다. 한편 그녀는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잘 믿는다. 자기 자신이 바로 서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나미에게는 나나미만의 특별한 거리감이 있다. 매우 가까운 사람일지어도(한 침대를 쓰던 남편 데쓰야 일지어도) 그녀에겐 거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SNS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어도 쉽게 대화할 수 있고 그의 말에 신뢰를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상대의 말에 신뢰를 가진다는 것이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정한 경계선으로 상대가 들어왔다는 것을 인식하면 흠칫 놀라 거리를 벌린다.



나나미(중앙 빨간 휴대폰)와 마시로(오른쪽)

     

SNS 속 연대는 항상 일정한 거리가 있다. 특히 익명 계정은 내가 상대를 모르고, 상대도 나를 모른다는 점에서 일정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내가 상대에게 주는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은 상대와 내가 덜 결속된다는 의미보다는 불필요한 얽매임을 피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로 구속하지 않는 것.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 이해관계가 안 맞으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는 것 등 기존의 공동체 개념과는 다른 이점들이 있다.


나나미와 마시로의 동거는 가족이기보다는 SNS 속 연대에 가깝다. 둘은 자신의 본명 빼고는 많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숨기면 숨겼지 애써 드러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둘을 잇는 것은 공동의 목적인 메이드(가정부) 활동뿐이다.(물론 그 이면에는 돈과 계약이 얽혀있지만) 서로 알고 싶지도 알려주려 하지도 않은 채로 거리를 두고 몇 개월간의 동거는 지속된다. 서로가 동거인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은 두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서있을 때, 그리고 나의 입장에서 상대를 재단하지 않고, 상대의 맥락을 생각하는 배려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서로 환경은 다르지만 나나미와 마시로는 둘 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멀어진 환경에서 자랐고, 각자의 어머니로 인해 자신을 부정한 여자로 상정하고 살았던 기억이 있으며(나나미는 외도한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 마시로는 AV배우를 한다고 밝혔을 때 어머니에게 맞은 경험) 무엇보다도 자기혐오의 경험이 있던 사람이었다. 


아마 둘은 서로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일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나나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과의 거리를 좁힌 것은 마시로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마시로가 함께 죽자는 제안을 했을 때 나나미가 그러겠노라 하고 답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현실에서 거짓 없이 진실을 말해도 괜찮은 순간을 맞이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 따위를 위해서.
그 점원이 부지런히 봉투에 물건을 담아 준다고. 
이런 쓰레기 같은 나를 위해서.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꽉 조여 오면서 괴로워져서 울고 싶어져. 
나에게는 행복의 한계가 있어. 
더 이상은 무리다 싶은 한계가 그 누구보다 더 빨리 찾아와.
그 한계가 개미보다 작아.

이 세상은 사실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
모든 사람들이 잘 대해 주거든.
택배 아저씨는 내가 부탁한 곳까지 무거운 짐을 날라 주지.
비 오는 날에는 모르는 사람이 우산을 준 적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쉽게 행복해지면 나는 부서져 버려. 

그래서 차라리 돈을 내고 사는 게 편해.
돈은 분명히 그런 걸 위해 존재할 거야.
사람들의 진심이나 친절함 등이 너무 또렷이 보이면
사람들은 너무 고맙고 또 고마워서 다들 부서지고 말걸?
그래서 모두 돈으로 대신하며 그런 걸 보지 않은 척하는 거야.

나나미,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부서져 버릴 것 같아.(p.266~267)





쿠로키 하루가 최고야!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철 별미가 등장하는 소설 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