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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Feb 08. 2018

헬조선을 위하여 -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의 터무니없는 결론에 대하여

*느빌의 책방에서는 "예술"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도시"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한국이 싫어서>는 "도시" 3부작 중 세 번째 텍스트입니다.





0. ‘지옥이 된 도시


우리는 ‘도시’에 대해서 얘기중이었다. 각자가 감각하는 도시는 달랐다.


누군가는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통해서 교묘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포착했다. 말하자면, ‘나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내가 수없이 해오고 있었던 점잖은 폭력들을.


또 다른 누군가는 <립반윙클의 신부>를 통해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상가족’의 붕괴와 개인소외를 말했다. 그 속의 주인공들은, ‘자기자신’을 잃은 우리들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었다. 타인의 시선이 전부가 된 SNS시대에 우리 모두는 자기혐오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확인했다.


나는 ‘지옥’으로 변한 ‘도시’를 말한다. 공공연한 지옥이 된 ‘헬조선’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솔직하게 말해보고 싶었다. 나는 지옥을 만드는 데 동원되고 있는가, 혹은 탈출을 모색하고 있는가. 나는 탈조선을 원하는가, 아니면 헬조선 속의 기득권을 원하는가.

 


1. 셀프-헬조선


소설 속의 계나는 한국을 떠나는 이유가 단순히 ‘한국이 싫어서’라고 한다. 이때 소설 속의 한국의 모습은 이렇다.


위계와 양극화가 너무나 뚜렷해서 모두가 ‘거대 톱니바퀴’처럼 소모되고 있는 사회이다. 그래서 이 위계의 하층에 속하는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이고 뭐고가 없는 지옥철을 매일매일 타야하’고,  ‘길거리 보도블록처럼 흔한’ 존재가 되어버렸으며, 따라서 ‘힘들지만 재밌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닌’ 회사를 상사들의 ‘음담패설’을 참아가며 꾸역꾸역 다녀야만 한다.


이 지옥같은 풍경이 단순히 소설 속의 황당한 배경이 아니라, 내가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는 사회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은 문득 불편하고 답답해진다. 그러나 소설이 진짜 불편해지는 순간은, 이 헬조선을 이미 내면화한 채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계나(이자 우리)를 발견할 때이다.


‘거대한 톱니바퀴’라고 쉽게 비판하면서도 ‘안정적인 직장인’이라는 이유로 직장을 가진 남성들에게 끌리고, 줄 세우는 학벌사회를 욕하면서도 ‘지잡대’인 재인과 ‘홍대’인 자신을 기어코 구분한다. 자신이 받는 인종차별에는 예민하면서도, 스스로도 서양인에 대한 태도와 동양인에 대한 태도는 다르다. 가난하면 애초에 수많은 기회부터 박탈당하고 발붙일 곳이 없는 ‘가난이 죄인 사회’라고 툴툴대지만, 내가 돈이 있을 땐 결국 청소부터 잔심부름까지 편하게 누군가를 부려먹을 수 있는 ‘돈 있으면 다 가능한 사회’로 바뀐다.


소설 속 계나의 이중적인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헬조선’을 쉽게 욕하면서도 동시에 적극적으로 헬조선을 내면화해오던 우리의 아이러니한 모습에 갸우뚱하게 된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했다.

나는 헬-조선을 어떤 방식으로 욕하고 있는가. 내가 욕하는 대상은 무엇이며 바라는 변화는 무엇인가.




2. 도피인가모색인가


답답하고 잔인한 헬조선을 떠나 호주에 간다 해도, 이상적인 희망 따위가 없다는 것은 작가는(독자도!) 잘 알고 있다. 단순히 ‘탈 헬조선 = 답’이라는 낭만적인 미래를 무책임하게 제시하지 않기 위해 작가는 호주 곳곳에 있는 한국인들의 상황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기본적인 영어조차 못해서 한국가게에서 최저도 받지 못하는 채로 일하게 되는 계나, 닭장같은 집에 살며 서로의 인생을 갉아먹는 학생들, 삶의 목적은 잃은 채 겨우 교회활동이 자신의 전부가 된 형서, 백인남자친구를 꿈꾸는 유학생, 인종차별과 호기심을 바탕으로 아시아인을 만나는 백인들, 이 인종차별을 고스란히 다른 중국인과 남아시아인에게 돌려주는 한국인들까지. 호주의 이런 모습들이 날카롭고 사실적으로 그려지게 되면서 계나의 적극적이었던 ‘모색’은 겨우 전형화된 ‘도피’와 크게 달라질 게 없어지는데,


그럼에도 작가는 이 선택지에서 ‘도피’가 아닌 새로운 ‘모색’의 손을 들어주며 ‘탈-조선’을 기어코 그 해답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한국식 성공신화와 닮아있다. 가진 게 없으니 노력을 해야하는 현실. 바닥부터 시작해서, 틈틈이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고, 남들 놀 때 안놀고, 그래서 조금조금씩 나아지는 삶이다. 한국과 유일하게 다른 게 있다면, '변화가능성'이다. 

계나가 그렇게 7년이라는 기간을 고생하며 영주권에 이어 시민권까지 따서 한국에 잠시 돌아왔을 때, 한국은 잔인하리만치 똑같다. 여전히 계나의 친구들은 헬조선을 욕하기 바쁘고, 계나의 집은 가난하며, 계나는 취직이 불가능하다. 결국 한국에서 계나가 할 수 있는 건 ‘안정감’과 ‘예측가능성’을 가진 지명이와 결혼해서 그 지분을 조금 나눠 갖고, ‘호주의 시민권을 딴 것’을 가장 큰 자산이자 자랑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한국과는 다르게, 호주는 그나마 ‘신분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 나라로 제시되고 있다. 분명히 계나는 평생 죽어도 빠른 영어는 못 알아듣는 2등 시민일 테고 어딜 가도 여전히 ‘헬’ 임은 비슷하겠지만, 2등 시민의 삶의 질이 보장되는 사회가 호주(선진국)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매우 전형화된 뻔한 외국행은, 여전히 유효한 하나의 현실적인 모색으로 기어코 제시되고 만다.




뻔뻔한(?) 장강명 작가님

3. 기만적인 자위는 그만하고솔직하게


그러나


쯧쯧. 지금 한국은 알다시피 헬이야. 그렇다고 외국 가면 다 해결된다는 건 아냐. 그러나 여전히 쪼금 더 나은 건 외국일지도?

라고 편하게 말하는 작가의 게으른 결론에 결코 동의해줄 수가 없다.


이쯤에서 처음 물었던 스스로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우리가 ‘헬조선’이라고 욕할 때, 그 대상은 무엇인가. 양극화가 되어가는 ‘사회구조’에 분노하는가, 그 구조 속에서 하층이라는 우리의 ‘위치’에 분노하는가.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욕하는가, 혹은 그 자본주의에서 자본을 가지지 못하는 우리의 ‘처지’에 분노하는가.


작가는 ‘모색’의 방법으로 탈-헬조선이라는 현실적인 선택지를 환기시켜 주었지만, 동시에 사실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은 없이 겨우 말로나 헬조선을 욕하고 있었던 내 자신도 환기시켜 주었다. 말하자면, 작가의 친절한 설명과 날카로운 비판 덕분에 (작가는 비판하고 떠나라는 의미로 제시하였던) ‘자산성 행복’(안정적인 미래를 상상하며 만족하는 것)에 목매는 우리 스스로를 분명하게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강명은 틀렸다. 우리가 한국을 욕하는 이유는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고, 그런 한국을 사랑하는 스스로를 기만하며 자위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나처럼 한국을 떠나지 못한다. 아니, 결코 떠나지 않는다.     


돈이면 다 되는 ‘지랄’ 같은 세상은(소설 초반의 계나), 내가 돈 버는 순간 돈이면 청소부터 장보기까지 다 남을 부려먹을 수 있는 행복한 세상(소설 후반의 계나)이 될 테니까. 이 헬조선 안에서 죽어라고 기득권을 욕하지만, 나는 그 기득권의 지분을 조금이라도 나눠 갖기 위해 내 인생을 바치고 있으니까.

실은 겨우 당위적인 말과 얄팍한 사회의식을 보여주려고나 ‘헬조선 타파’를 외치는 것이지, 실은 이 헬조선 안에서 기득권이 되기를,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기를, 좋은 대학에 가기를, 좋은 직장에 가기를 누구보다 열심히 실천하고 있는 게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러니 결코 자신의 얘기는 아닌, 타인(우리)의 얘기를 하는 작가의 생각에 무심코 끄덕이지는 말자. 작가의 말에 기대어 헬조선을 쉽게 욕하는, 그러면서도 남들보다 좋은 직장과 연봉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가는 기만적인 자위들은 이제 그만하자.


진짜 모색을 위해서 우리의 얘기들을 스스로 시작하자. 매우 비참하고 비인간적일지라도, 솔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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