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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Feb 26. 2018

8. 나의 탓이 아니에요.

정문정,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읽고

* <느슨한 빌리지>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neuvill.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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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임-팩트 있었던 일부만을 차용합니다.


1. 지난 이야기

지난 글에서, 오직 나만 갈 수 있는 길을 찾고 걸어가겠다고 마음먹은 학곰. 킾 고잉 & 킾 마감은 앞으로도 지켜질 것인가? 



2. 뜬금없이 시작은 겨울왕국으로


엘사는 왜 왕좌를 내려놓고 렛잇고를 하러 산으로 간 걸까?


나는 이따금 사람들에게 겨울왕국(2013)을 보았냐는 질문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엘사가 좋니 안나가 좋니 그도 아니면 울라프가 좋으니 하는 캐릭터에 대한 호불호를 드러내는 답변을 한다.  그러면 질문을 정정한다. 엘사는 왜 왕좌를 내려놓고 렛잇고를 하러 산으로 간 걸까요?


영화에서는 엘사의 방황을 넌지시 어릴 적에 동생 안나를 다치게 한 자신의 마법에 대한 트라우마로 제시한다. 자신의 힘이 사랑하는 이를 해할지 모른다는 강박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양 손을 장갑에 봉인하게 만들었고, 스스로를 방 안에 고립시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게 되었으니 성문은 닫히고, 타인과의 소통은 더욱 단절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21세가 되어(성인이 되어) 대관식을 여는 것은 자신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해야만 하는 과업이었고, 엄청난 중압감과 스트레스 속에서 행사를 잘 치러낸다. 성문이 열릴 때 안나가 성의 이곳저곳, 마을을 날뛰며 "태어나서 처음으로"라는 노래를 부를 때, 엘사는 성에서 이렇게 읊조린다.(디즈니 공주들은 노래는 타고난 것 같다.)


마음 열지 마 들키지 마
착한 모습 언제나 보여주며

태연. 하게. 잘 해야 해
작은 실수라도 해서는 안 돼


엘사의 강박은 '자신의 실수'가 나와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 기저에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자리한 것이고. 하지만 나는 그녀가 렛잇고(a.k.a. 흑화)를 하러 간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이 양반 때문이다.


그는 중요한 대사를 날린다. "몬스타! 몬스타!"

표면적인 이유는 안나가 실수로 엘사의 장갑을 벗겨 엘사가 멘붕이 왔고, 자신도 모르게 얼음이 발사되어서 혼란에 빠진 엘사가 산으로 도망가는 것으로 보인다. 안나는 자신 때문에 언니가 사라졌다고, 엘사는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매는 모든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내면화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둘에겐 잘못이 없다. 문제는 바로 위즐튼에서 온 공작에게 있다. 그는 혼란에 빠져 얼음을 난사하는 엘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괴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 번 더 말한다. '괴물이야!' 타인의 맥락을 모른 채 던진 그 한 마디는 같은 공간에 있던 아렌델 왕국의 주민들로 하여금 베일에 가려있던(성에 짱박혀 나오지 않던) 여왕 엘사를 괴물로 보게 만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위즐튼에서 온 공작의 무례한 낙인찍기를 단번에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매혹적인 엘사와 매력적인 안나의 캐릭터성이나 크리스토푸와 안나의 러브라인, 한스의 임-팩트(스포 방지)등 다양한 이유로 기억에서 잊히고 만다. 하지만 일상 속의 무례함도 다를 것이 없다. 교묘한 방식으로 상대에게 가해를 하지만 남는 것은 피해자의 상처뿐이다. 피해자는 때때로 자신이 피해를 당한지도 모른 채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3. 신경 쓰지 마요. 그렇고 그런 얘기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2018)

나는 자책을 많이 하는 편이다. 성당에 다니지 않지만(물론 핫도그에 홀려서 군대에서 세례를 받긴 하였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전부 나의 탓이옵니다. 하며 스스로에게 잘못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자기반성적인 태도는 미래의 '나'를 위해 꼭 필요한 자세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스스로를 갉아먹는 독이 된다. 어떤 문제든지 결국 나의 탓이기에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실수하지 않아야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슬프게도 나는 여기에 '착한 아이 콤플렉스'까지 더해져 실수하지 않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며, 거짓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을 갖고 살았다. 그리고 그 삶은 꽤 피곤했다. 수도승이나 구도자(도를 구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깎아가며 사는 일은 항시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스트레스를 풀어낼 도리가 없다. 엘사처럼 "착한 모습 언제나 보여주며 태연하게 잘 해야 하기"때문이다.


어느 순간 나의 삶이 재미가 없다고 느꼈다. 과거에도 재미없었고, 지금도 재미없으며, 앞으로도 재미없을 것인 말 그대로 빅-노잼 인생을 살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 영적인 계시를 받았음에도 나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잘나지 못했고, 내가 별로이기에 나는 계속 재미없을 것이라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나는 해마다 올해의 키워드를 선정한다. 기억나는 것을 읊어본다면 2014년의 '매스터피스(이땐 내가 천재적인 작가가 될 줄만 알았다. 스물일곱 넘어까지 살아있는 것을 보니 애석하게도 천재는 아닌 것 같다.)', 2018년의 '치-명, 세-련, 임-팩트, 셀럽' 같은 것들이다. 단어 선정의 기준은 따로 없다. 한 해동안 많이 쓴 말이나, 많이 쓸 말을 혼자서 정한다. 생뚱한 타이밍에 키워드 얘기를 꺼낸 것은 바로 2017년의 키워드가 '자존감'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자존감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왜 자존감이 낮은가.
나는 왜 상처를 많이 받는가.
나는 왜 이렇게 노잼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가.
나는 왜 하고 싶은 것이 없는가.
나는 왜 잘하는 것이 없는가. 


무의식 중에 던진 질문들을 지금 다시 살펴보면 당시에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자존감이 낮고, 상처를 많이 받으며, 노잼 인생을 살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는 인간이라는. 나는 나를 박하게 평가했다. 그리고 저평가된 나 자신은 나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가슴 아픈 저 질문들을 갖고 내 안의 나와 대화를 하다 보니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지금의 저평가되는 나로서 살게 된 것은 온전히 나의 탓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에 전학을 가서 움츠러들었던 '나'는 내가 잘못해서 소심하게 변한 것일까.

'너는 말은 잘 못하잖아.'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나'는 내가 앞으로도 '말'을 버벅거리며 살아야 하는가.

주변 사람들에게 '노잼'이라는 평을 들으며 살아온 '나'는 내가 앞으로도 쭉 '노잼'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에피소드를 일일이 다 나열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인생에는 '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를 평가하고, 낙인찍고, 단정 지어버린 수많은 타인(가족이나 친구나 선생이나 때로는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까지도)들이 함께했다. 타인의 시선이 지금의 나로 키워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나의 전부 인 줄만 알았다.


정문정의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은 나를 지키는 방법서다. 그녀의 에세이들은 다양한 주제, 다양한 상황을 제시하지만 제목처럼 '웃으며 대처하는 법'은 한 가지로 수렴된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할 것.


내가 느끼기에 불쾌하다면 불쾌하다는 의사표현을 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불편하면 불편하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다만 위트 있게, 그리고 상대가 자신이 '가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말이다.(자세한 내용은 직접 읽어보시라고 적지 않겠다.) 물론, 이 말이 남 탓을 하고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라는 말은 아니다. 예의를 갖추되 '나'의 존엄을 깎는 말, 행동에는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의미다.


'나' 자신이 서있는 사람은 존재 자체로 치명적이다. 타인의 평가에 맞춰 자신을 낮추지도, 남 탓을 하면서 자신을 고평가 하지도 않는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은 역설적으로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치명 포인트 8
예의를 갖추되 나의 존엄을 깎는 말, 행동에는 단호하게 대처하자.
항상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자.



* 이번 주는 월, 수 2회 연재됩니다.


치명적이어서 미안해요. 나도 통제할 수가 없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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