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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둥두 Jun 15. 2024

청사진

어렸을 때부터 말이 참 많았다. 뭐든 많이하면 늘기 마련이던가 어느새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중학교 국어선생님은 나의 그런 재능을 알아보시고는 일찍이 토론을 시작해볼 것을 권유하셨다. 그 이후로 줄곧, 토론은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 중 하나가 되었다. 중학교 떄도,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잘 하고 싶었고 잘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학교는 사뭇 달라져있었다. 코로나가 헤집어 놓은 캠퍼스 위로 다같이라는 미덕이 슬며시 고개를 들던 시절이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코로나학번인데다 갓 전역한 내향형인간인지라 같은 과에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동아리에서라도 답을 찾고 싶었다. 이번에도 내가 선택한 건 토론이었다. 그 많은 동아리들 중에서 토론동아리는 고작 하나. 유일무이하다는 점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기대와는 달리 우리 동아리의 첫 인상은 그닥이었다. 처음 동아리방을 방문하던 순간의 꼽꼽함과 허름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여기 적응해도 되는걸까하는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동아리에서 보내는 시간은 즐거웠다.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레 발길을 돌릴 곳이 있고, 학교를 거닐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시험기간에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모여 밤새 수다를 떨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배를 잡고 웃는 그런 하루하루. 꿈에만 그리던 캠퍼스라이프가 눈 앞에 있었다. 나에게 있어 대학생활의 모든 즐거움, 슬픔, 보람, 좌절, 성장, 실패는 토론동아리 논함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처음이 주는 설렘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적응해버렸고 때로는 일종의 매너리즘마저 느꼈다.본인이 아쉬울 것 없다고 이제는 불평만 늘어놓는 꼴이라니. 부끄러웠다. 나 자신의 부끄러운 점을 돌아보고자, 내가 사랑하는 우리 동아리를 더 아름답게 가꿔보고자 나는 회장이 되었다. 작년 3월에는 하루종일 동아리방에서 살았다. 오전 9시에 등교하여 저녁이 다 되어서야 하교하는 생활을 한 달 내내 했던 것 같다. 신입부원 면접은 하루에 6-7건씩 보기도 했고 노트북은 온통 동아리 업무 관련 자료로 가득차 있었다. 나름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20명이던 동아리 회원수는 120명으로 껑충 뛰었고 매주 열리는 정기활동은 자리가 모자라 도서관 스터디룸을 두 개나 빌려야했었다. 뿌듯했다.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서. 학기초처럼 언재까지고 사람들로 북적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이런 착각은 얼마 안 가 깨지고 말았다.


중간고사를 즈음하여 활동 참여율이 저조해졌다. 한 번에 40명까지도 나오던 정규활동은 네다섯명이서 진행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아무도 참가의사를 밝히지 않아 활동이 통채로 취소되는 일도 허다했다. 불안했다. 나의 기획력이, 나의 진행능력이 부족한 탓에 우리 동아리원들이 활동을 등한시하나 싶어서. 사실 내 잘못은 아니었다. 우리 동아리뿐만 아니라 어느 곳이든 학기 초를 기점으로 사람이 북적북적하다 점차 시들해지는 게 일반적인 흐름이었으니까. 그때의 나는 파도로부터 튕겨져나온 채 한없이 휩쓸려만 가고 있었다. 오롯이, 나에게서만 원인을 찾고자 했다. 내가 회장으로서 이 사람들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일까하고 고민했다. "관계"라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했던 그때의 동아리처럼, 모두가 한 데 모여 어울리는 그런 조직을 원했다. 이때를 즈음하여 많은 변화를 시도했다. 없었던 친목활동을 새로 만들고, 친목만을 위한 직책을 도입하고, 누가 누구랑  친한 지 따위의 문제들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만큼 나는 절실했다.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새로이 맺어지는 인연이, 쌓여가는 추억들이 있었다. 동아리 사람들하고 노는 게 재미있다는 둥,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덕에 앞으로도 자주 나오고 싶다는 둥의 이야기가 들려올때면 흐뭇했다. 내 뜻대로 일이 풀린다는 건 생각보다도 더 달콤했다. 거기에 취해선 안 됐었는데. 정규활동은 점차 그 색깔을 잃어가고 주객이 전도되고 있었다. 지적인 성장이니, 부원들의 자기계발이니 하는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사실 쉽고 재밌어보이는 주제로 가급적 많은 사람들을 활동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게 정말 유익한지 어떤지보다도 사람들이 이걸 좋아해줄지가 걱정이었다. 이런 방식이 맞는거라고 믿었다. 고리타분하고 어려운 건 학원선생님이나 인강강사들에게서 따로 배우면 그만이었으니까. 재미로 하는 대학교 동아리에서 뭘 그렇게 대단한걸 바라냐며 코웃음치기도 했다.  그래, 나는 스스로 우리 동아리를 우스운 꼴로 만들고 있었다. 야심차게 준비한 친목활동도, 기껏 하향평준화해버린 정규활동도 모두 뜨뜬미지근한 반응이었다. 모두의 니즈를 만족시킨다는 명분 아래 벌인 일들이었지만 진정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나는 단지 모두와 잘 지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는데. 휘몰아치는 모순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금 으스러져 가고 있었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 올해 들어 친해진 후배와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후배는 부원으로서 느끼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는데, 스쳐지나가듯 사라진 이 한 토막의 대화에서 나는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저는 서로 완전히 대립되는 그런 토론을 원했거든요. 깊은 주제로 머리 싸매면서 대화하다보면 좀 어렵고 때로는 껄끄럽기도 하겠지만 대충 맞춰주면서 서로 허허하는것보다는 강렬한 갈등이 있을 때 사람들은 더 끈끈해진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우리 동아리의 토론주제는 아쉬운 점이 많죠." 


충격이었다. 


내가 기어코 외면하던 토론의 속성, '난감함'은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매개로 기능할수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의미있는 관계들에는 무릇 난감함이 서려있었으니. 소화하기 어려운 일일수록 의미는 깊어지는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일들엔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분위기 띄워가며 학과, 나이, 학번, MBTI, 고향 따위를 물어보는 행위는 단지 어색함을 건너뛰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뿐 진정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대화부터가 피상적인 수준에서 머물다보니 관계도 그닥 깊지 못 했다. 오히려 남들이 꺼려하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일지언정 깊고 격렬하게 이야기한 사람들하고는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정말로 동아리의 본질이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더욱 내실 있는 활동을 꾸렸어야 한다. 


논함과 함께한 지난 3년, 매해가 도전이고 혁신이었다. 다음 학기에는 또다른 변화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친해지는 일과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일 사이의 병렬적 구분을 타파하려고 한다. 친목활동과 토론활동의 엄격한 구분 없이, 친목이 곧 토론이 되고 토론이 곧 최고의 친목이 되는 그런 동아리. 모두가 터울 없이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성장할 수 있는 그런 동아리로 키워나가고자 한다. 네트워크는 더욱 촘촘해질 것이다. 같은 시기에 활동하는 구성원 사이의 수평적 연결도. 예전에 활동했던, 그리고 앞으로 활동할 구성원들과의 수직적 연결도. 동아리와 동아리, 내지는 학교와 학교 사이에 이뤄지는 확장적 연결도.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꾸려갈 나날들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빈 틈 없이 행복한 순간이다. 오늘의 글을 마치며 우리 동아리의 슬로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같이 "논함"으로써 발전하는, 우리는 "논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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