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기회비용이 극대화되는 분야가 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일을 하는 것이 대단한 손해로 돌아오는, 다르게 말하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해야만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다. 내게 있어선 말하기가 그랬다. 학교 수업시간에 앞에서 이야기하는 친구들부터,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 심지어는 텔레비젼에 나오는 연사들까지. 하나같이 날 궁금케했다. "왜 저렇게 밖에 이야기하지 못 할까?". 그들의 발표가 끝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어김없이 감탄하곤 했다. 따돌려지는게 두려워 본심을 삼켰지만 사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라고. 해당 분야 종사자들의 퍼포먼스를 보고도 심드렁했던 걸 보면 확실히 나에게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나보다. 말하기가 어렵다는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연습하고 강의를 들어야만 깨닫는 요령들을 나는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있었으니까. 사람들 앞에 설 때 가장 빛이 났다. 누군가는 연신 혀를 내둘렀고, 누군가는 비결을 물어왔으며, 누군가는 눈을 반짝였다. 그만큼 내 스피치는 선명하고 강렬했다.
요즘에야 느끼는거지만 나는 차라리 내가 말을 못 했으면 어떨까싶다. 말에는 힘이 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분위기를 압도하는 무형의 힘이. 그렇기에 사람들은 기대한다. 저 사람이라면 잘 해줄거라고. 사실 나는 그렇게 곰살궃은 사람이 아닌데도 말이다. 닭집에서 알바한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찜닭 위에 참깨를 뿌리는 것을 잊어 허겁지겁 마무리하기 일쑤고, 임원진 회의에서 다같이 했던 얘기도 어느새 까먹어서는 되물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원래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덤벙댄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첫인상이 쌓아올려지고, 또 무너지는 모든 일들이 결국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곤 한다. 새로운 사람이 나에게 거는 설렘이 어느새 실망으로 번져가는 모습을 보고서는 또 한 명과 멀어진다는 느낌에 하염없이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아있기도 했다.
빛이 밝을 수 있는 건 그만큼 그림자가 어둡기 때문이다. 마냥 좋은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말을 잘하기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나도 컸다. 내 딴에는 담백하게 생각을 전했을 뿐이지만 나는 어느새 허풍선이가 되어있었다. 내 딴에는 상황을 수습하고 싶었을 뿐이지만 입만 살았다며 외려 핀잔으로 돌아오기 십상이었다. 말만큼 일도 잘 하고 싶었다. 애초에 변명할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근데 그러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결국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로 돌아와야만 한다. 무어라 진전된 것 없이 엉망이 되어버린 현실을 세치 혀로 휘적거리며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있었다. 나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내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남자셨다. 슬픈 일이 있어도, 좋은 일이 있어도. 티 내거나 으스대는 법이 없었다. 같은 가족이라면 털어놓고 상의할 법한 일도 당신 혼자 속으로 삭히시는 모습을 보며 답답하다는 생각도 했다. 이제사 느끼는거지만 아버지는 진작에 깨달으신 게 아닐까 싶다. 말에는 힘이 있다. 힘은 질량에서 비롯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충격적인 것은 저들이 그만큼의 무게를 지닌 까닭이다. 내 혀가 그리는 궤적이 누구와 충돌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만히 그 자리에 묶어두고 생각을 해야한다. 진정 움직여야 할 때가 언제인지, 나는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