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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둥두 Jun 21. 2024

파도타기

유독 그런 날이 있다.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서 공부를 하고,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피곤하지 않은 그런 날. 이런 날엔 어지간한 일로는 동요하지 않는다. 다소 무례한 다른 이의 언행에도, 숨가쁘게 돌아가는 일정에도, 생각만큼 나와주지 않는 성과도 다 헤실거리며 넘어갈 수 있다.


정확히 반대인 날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하루종일 널브러져 있어도 아무런 의욕도 상승욕구도 생기지 않는 그런 하루. 성공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강조한다. 내가 어떤 기분인지와 내가 무엇을 하는지는 엄격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고. 요컨대 일 할 기분이 안 난다고 쉬어도 되는 건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강조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그만큼 그것이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천성이 게을러서 그런건지, 유달리 힘들어서 그랬던건지, 극복하는 요령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힘든 날엔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아무런 시도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몸상태가 좋으면 자연히 컨디션도 좋아질까 싶어 관리도 열심히 해봤고, 벌인 일이 너무 많나 싶어 의도적으로 업무를 줄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듯 싶었다. 딱 처음에만 효과가 있었다. 예전보다 몸은 튼튼해지고 외려 할 일은 줄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열심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 빼고 다 잘만 살아가고 있었다. 내 주변엔 대단한 사람들이 참 많았으니까. 학부연구생과 학과공부를 병행하며 과수석을 따낸 후배도, 시험기간이면 도서관에 살며 일주일씩 밤을 새며 공부를 하는 선배도, 이미 자기 분야와 관련된 기업에서 기획업무를 보는 동기도 있었다. 그들의 삶은 매일매일이 치열하고도 강렬했는데, 나는 그냥 제자리에 고여 썩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같은 인간인데 삶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다를까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지 나의 의지력이 부족해서, 내가 자꾸 엄살을 부리는 탓에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성공을 위해서는 더더욱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어떤 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철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전제 자체가 틀린 발상이었다. 감정은 마냥 눌러놓는다고 해소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진정 감정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면 나는 더더욱 적극적으로 감정을 이해하려 했어야했다. 어디서 들은 말이지만 감정을 이해하는 과정은 마치 파도타기와도 같다고 한다. 우리의 기분은 하나의 바다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고 잔잔한 날도 있지만 때로는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도 있는 법이다. 파도의 흐름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부닥치는 바닷물에 쓸려갈수도 없는 노릇. 우리가 궁리해야 할 건 파도를 없애는 방법이 아닌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잡는 법이다. 지금 내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차분히 지켜보기. 그런 흐름에 휩쓸리지 않게 중심을 유지하기. 감정으로부터의 독립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앞으로도 축축 쳐지는 일은 잔뜩일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더 이상은 외면하지 않는다.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차분히, 또 꼼꼼히 톺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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