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빛의 과거>를 읽고
<빛의 과거>는 1977년 여자 기숙사가 배경이다.
동시에 2017년을 살아가는, 나, 김유경이 있다.
그녀에게는 대학 동창 김희진이 있다.
둘은 간간이 만나서 낮술을 즐기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김희진의 낭독회에 참석했다가 삼십대초반의 젋은 여자가 그녀의 대표작이자 첫번째 소설인「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 낡은 책을 내밀며 '엄마 책'이라며 싸인을 받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 유명한 작가도 아닌 그녀의 소설을 누가, 저렇게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딸까지 와서 싸인을 받을 정도라면.....
김희진은 분명 자신을 아는 누군가 일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김유경으로 하여금 소설을 들게 된 계기가 됐다. 그러면서 소설은 우리를 1977년 3월 기숙사로 끌어당긴다.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는 7명의 공주들,
322호 룸메이트의 최고참 선배인 최성옥, 그녀의 가장 절친인 417호 송선미
2학년 양애란, 주인공과 함께 입학한 오현수, 그리고 417호의 룸메이트 곽주아, 신입생 이재숙, 김희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들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전혀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생활하고 있었다.
'예향'이라는 지방 소도시에서 산 주인공은 서울로 상경한 것이 일종의 탈출구였다.
여자에게 특히 엄격했던 도시, 여자 혼자는 극장도 갈 수 없었고,
여자의 최고 목표는 그저 정숙해서 시집을 잘가는것이라는 곳.
주인공은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약점을 잘 감추는 법을 길러갔다.
말을 더듬는 것을 감추기 위해 말없는 모범생이 되기를 자처한 것.
그리고 튀기 보다는 중간 정도가서 수긍하며 감춰지는 걸 택한 것이다.
사회문제와 정의에 대해 고민하는 최성옥, 그런 그녀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친구 송선미
하지만 최성옥은 학비, 고시생인 남자친구 등 자신의 삶만으로 힘든 그녀였다.
모든 관심사가 '연애'에 꽂혀있는 양애란, 그리고 보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넉넉한, 하지만 푼수인 이재숙. 부산출신에 세련됨이 베어있는 하지만 혼자있기를 즐겨하는 오현수까지.
그녀 주변의 기숙사 공주들이다.
그리고 학보사 수습기자인 그녀에게는 학교에서 만난 또다른 공주들이 있다.
학보사 3학년 선배 오지은. 그녀의 기억으로 현실에서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우아하다는 표현을 썼다. 그도 그럴것이 청파동에 위치한 2층 양옥집에 살고 아빠는 변호사 엄마 직업은 교수였으니.
누군가에게는 용돈을 아끼고 모아서, 기숙사비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으로 큰 맘 먹고 산 옷이 그녀에게는 일상인, 그렇게 세련된 그녀였다. 그녀의 태생적인 여유. 그러기에 그녀의 감성은 더욱 촉촉하고 달콤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학보사의 선배가 칠판에 "한 사회의 대중을 깨우쳐야 하는 것은 언론과 지식인의 최고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구절을 적으면, 그녀는 "당신은 혹시 보았는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잘 익은 별을. 혹은 그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때 나지막이 발음해보라. '청춘'. 그 말 속에 부는 바람소리가 당신의 영혼에 폭풍을 몰고 올 때까지"라는 글귀를 썼을것이다. 누구에게나 상냥한. 지방 학생들이 부럽고 집을 떠나사는 것이 소원이라는 또 한명의 공주.
이 열명 남짓한 공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청춘의 에피소드와 독재정권 아래 어두운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이 안에서 누군가는 불평등한 사회와 차별, 또다른 욕망을 보았고, 박탈감을 느꼈다.
'공주'라는 명사가 발랄함과 해맑음, 아름다움을 연상시킨다면, 그 이면에는 공주가 아닌 이가 느껴야하는 차별과 박탈감도, 공주가 되고자 하는 욕망도 연상할 수 있다.
'상경'이라는 단어가 내게도 낯설지 않다.
대학교부터 결혼전까지 근 9년의 시간을 '상경'이라는 말을 쓰며 살아왔다.
서울의 첫인상은 세련됨과 동시에 차가웠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나이스했다. 마치 소설 속 오지은 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남쪽 평야지대에서 올라와서 그런걸까. 유난히도 춥고 오르막길과 골목길도 더 많아 보였다.
그 안에서 나 역시 욕망했다.
어둡고 좁은 한칸짜리 원룸이 아닌,
서울에 번듯한 내 집을 갖기를,
서울에 가족이 있기를,
서울사람처럼 세련되기를,
서울사람이 되기를......
소설속의 또다른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는 다소 주관적이고 비약적이지만,
그런 감정을 잘 드러낸 거 같다.
그리고 '빛의 과거'는 1970년대 독재정권아래 동시대를 살고있는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다름'이 어떻게 '섞임'이 되는지를 말이다.
우리 모두는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지'하는 자신만의 삶의 잣대를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런 모범에 맞춰인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결코 그래 그때는 이렇게 살았어야 돼! 라고 말할 수 없을것이다. 아니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다르기에.
소설에서는 호기심이 발동한 김희진이 대학동기들이 30년이 지난 지금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검색해서 알아낸다. 그들의 현재 모습은 ~ 카더라 통신으로 김희진의 입을 통해 주인공에게 들리게 된다. 반전도 있었고, 안타까움도 있었다. 특히 최선옥과 송선미는.......
나도 내 대학동창,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면 끊임없이 "걘 뭐하고산데?"를 물어봤던것 같다. 왜? 그냥 단순한 호기심을까? 지금 내 삶에 우월감을 갖기 위해서일까? 이젠 그런 질문도 하지 않기로 다짐해본다. 그들의 삶에 대해 평가할 자격이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저 다른것이므로.
하지만 우리 사회는 다른 삶들이 한곳에 모여 섞이라고 강요한다. 답답함이 느껴진다.
내가 경험해온 사회를 생각하면.
그렇게 느껴지는 날에는 주인공처럼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 이불뒤에 숨어 소리내 마음껏 울고 싶다.
여고를 나와 서울에 상경에서 기숙사를 경험한-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인- 나는 소설을 읽으며 많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언젠가는 나도 나의 언어로 그런 이야기를 말할 수 있었으면. 그러기 위해 나의 이야기를 고이 접어서 접힌곳을 관통하는 렌즈를 끼우고 있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빛의 과거>의 문장들
P161
인간에게서 떠나 가장 멀리까지 간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1977년 우주로 떠난 쌍둥이 탐사선 보이저호이다. 긴 시간동안 그것들은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의 곁을 차례로 지나가며 그 별들의 사진을 지구로 전송했다. 지금은 태양계를 벗어나 2백억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인터스텔라를 비행하고 있다. ...... 올해 초 NASA는 보이저호 발사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포스터를 제작했다. 거기에는 이런 제목이 붙었다. "The Farthest" 가장 먼 곳.
P178
익숙한 이야기였지만 읽기 쉬운 글은 아니었다. ....... 그저 내 청춘의 무위한 열기와 어리석음에 염증이 들었다.
P180
그녀는 한승우에게로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이 제한된 조건 아래에서만 작동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은 내가 읽었던 세계문학전집의 세계보다 훨씬더 견고하고 세속적이었다. 귀족에게는 그들만의 가계도가 있다. 그리고 진짜 공주들은 결코 어리석은 비련에 빠지지 않는다.
P181
약점을 숨기려는 것이 회피의 방편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태도가 되어 내 삶을 끌고 갔다. 내 삶은 냉소의 무력함과 자기 위안의 매커니즘 속에서 굴러갔다.
P193
그녀는 언니가 꼭 끼는 스커트와 조끼 유니폼을 입고 퉁퉁 부은 종아리로 어떻게 하루 종일 미소를 지으며 서 있을 수 있는지도 알았다. ... 여관집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일주일에 두번 씩 남산 밑 골목 깊숙이의 여관을 드나드는 동안 그곳에서 장기 투숙하며 점을 치는 사주쟁이와 뒷방에 숨어 사는 빚쟁이의 사연도 알았다. ...... 그리고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자신은 다른 기숙사생 공주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그 시절 내가 겪어야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다름'과 '섞임'의 세계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나마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P195
그녀의 소설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봄 감기와 함께 기억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벌써 두 계절 전의 일이다.
P233
참되고 아름다운 문학은 작가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P245
오로지 내 게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과 성적을 올리는 것, 두가지에만 의미를 두던 고등학교 시절 훈육의 틀과 그리고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세상의 모범생이라는 모순된 자리. 거기에서 시스템의 눈치를 보며 적응한 척했던 것이 단지 임시방편이었을까. 혹시 그대로 내 삶의 태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훈육과 세뇌에는 털출구가 없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언하는 모습으로 바뀔수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그 틀의 궤적에 부딪히고 상처입고 위축되며 계속해서 눈치껏 나를 속이며 살아야 하는 걸까.
P264
그동안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가지 않고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오현수는 모르는 것이 거의다라는 생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
P277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일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P281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
과거의 빛은 내게 한때의 그림자를 드리운 뒤 사라졌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뭔가를 욕망하거나 탄식할 나이도 지났으며 회고 취미를 가질만큼 자기애가 강하고 기억을 편집하는 데에 능한 사람도 못 되었다. 뜨거움과 차가움 둘 다 희미해졌다.
P319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 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 되라는 뜻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관을 일삼는 사람이야말고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자신같은 비관론자도 설득될만큼 강력한 긍정과 인내심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유일하게 그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
P325
'술과 장미의 나날'시절에 김희진과 나의 처지가 양극으로 나뉘었다면 그 이후 20년 동안 우리의 인생 포물선은 둘다 큰 굴곡 없이 느린 속도로 하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크고 작은 시간의 구비를 돌 때마다 김희진은 마치 키를 재듯이 우리 둘의 인생을 나란히 세워보기를 좋아했다. ......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의 첫 부분에 쓴 것처럼 김희진은 여전히 욕망과 그 박탈에 예민했고 깨어지는 순간에도 소란스럽게 남에게 고통을 전시하며 에너지를 얻었다. ...... 이 나이가 되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젊지만 생각보다 가진것이 없다는 게 입버릇이었고 나도 그 말에는 이의가 없었다.
P329
"정확한 관찰력은 그게 결여된 사람들이 흔히 냉소주의 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P334
"내가 소설 왜 쓰는 줄 아니?"
"외로워서 그래. 그래서 나를 주인공으로 해서 편집한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우겨서 내 편을 많이 만들려고 쓰는 거야. 진실이 어디있어. 각자의 기억은 그 사람의 사적인 문학이란 말 못들어봤니?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P 343 (추천의 말)
이 소설은 삶을 아름답게 접어, 접힌 곳을 관통하여 렌즈를 끼운다. 그리하여 삶에서는 좀처럼 할 수 없는 입체적인 투시로 개인과 개인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P 344 (추천의 말)
은희경 문학의 힘은 '무엇을'에도 있지만 '어떻게'에 더 있다. 관념어를 적재적소에 투입하고 빈틈이 없게 구문을 압착하여 서술 대상을 틀어쥐는, 특유의 악력 넘치는 문장이 매력적일 것이다. ...... 은희경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은 뉴스가 되지만 그 작품이 '좋다'는 사실은 뉴스가 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