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의 <아몬드>를 읽고
2022년 1월 9일 병원에 입원했다.
이 책은 수술 전까지 내가 놓지 않았던 책이다.
그만큼 재미있었던 책. 끊임없이 그다음을 궁금하게 만들었던 책. 소설을 읽고 잠깐 눈물이 났던 책.이다.
책이 출간되고 영화계에서 영화화 자고 러브콜을 보냈는지 알만한 책이었다.
청소년을 타깃 해서 써졌기 때문일까.
일단, 문장이 쉬웠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문장이 영상으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사족이긴 한데, 나는 이 책을 읽고 사춘기 청소년에게 친구라는 존재가 얼마나 영향력이 큰지 새삼 느끼게 됐다. (나도 겪어온 시절인데 벌써 17년이 지나니 잊어버렸다. 그때 친구라는 존재가 얼마나 절대적이고 절실한지 말이다.) 그래서 우리 아들을 위해서 좋은 친구를 만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 표지 관련해서는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래서 윤재는 어떻게 생겼을까. 윤재의 무표정함이 어떤 무표정함일까. 차가울까? 아니면 평범할까? 아니면 섬뜩할까? 표지에 그려진 소년의 모습을 통해 윤재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표지 속 인물을 통해 이 책의 주인공들이 더욱 현실감 있고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책 표지는 독자 투표를 통해서 정해졌다는 사실)
소설은 감정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소년 윤재가 할머니가 죽는 비극적인 사건을 겼고,
그 이후 곤이라는 친구를 만나 성장하는 이야기다. 소설의 제목이 아몬드인 것은 윤재의 뇌에 아몬드(아미그달라, 편도체)가 고장 나 그가 겪고 있는 감정 표현 불능증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윤재는 할머니의 죽음과 엄마의 사고 앞에서도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할 정도 병이 있었다.
오히려 윤재의 환경에 감정표현 불능증이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줬던 순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친구들이 따돌리는 상황에서는, 그리고 가족이 눈앞에서 죽는 그 사고 앞에서는 그의 질병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거다.
우리 평범한 사람처럼, 아니 나처럼 MBTI에서 feeling이 강한 아주 감정적인 사람에게는
이런 상황에서 감정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윤재에게 곤이가 다가온다.
다가오는 것조차 눈치를 못챌정도로 그렇게 둔한 윤재였지만, 곤이는 윤재에게 끊임없이 노크한다.
그리고 모든 걸 털어놓는다.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그리고 궁금한 게 무엇인지.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말이다.
어른들에게는 하지 않았던 이야기 말이다. 그렇게 곤이가 먼저 내민 손은 윤재가 다시금 곤이에게 손을 내밀도록 도와줬다.
곤이가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이 자기를 규정한 대로 살기로 마음을 먹고 위험한 선택을 했을 때 말이다.
그리고 곤이를 통해 윤재도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성장하게 된다. 그렇게 보통사람들처럼 무관심하면 안 된다고를 말이다. 다른 사람, 타인이 느끼는 불행에 대해 사람들은 어쩌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 있을까.
감정표현 불능증 소년이 보기에는 그렇다. 그러니 자신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공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늘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공감은 실상, 가식적인 공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히려 윤재처럼 아무런 편견 없이 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내 테두리 밖의 사람에게는 어쩌면 이다지도 차가울까.
지난해 이어령 교수가 김병종 화백과 신년 대담을 통해 우리 사회의 재앙으로부터 이겨낼 힘은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란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01/02/A4BHOC5WBFFN3MQ24TBRVJA6XA/
지금은 쓸데없이 정이 많고 참견하는 사람에 대해 '오지랖이 넓다'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런 사람들에게 대해 '오지랖 퍼(er)'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비아냥거림, 냉소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때로는 촌스러워도 그런 오지랖 퍼들이 그리울 때가 많이 있다.
그런 오지랖 퍼들이 사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고 투쟁해서 세상을 바꾸지 않았는가.
글이 너무 거창해졌다. 아몬드를 읽은 청소년들이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음.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공동체의 테두리가 조금 더 넓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적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아몬드> 소설 속 문장
P 12 (인트로)
그날 한 명이 다치고 여섯 명이 죽었다. 먼저 엄마와 할멈. 다음으로는 남자를 말리러 온 대학생. 그 후에는 구세군 행진의 선두에 섰던 50대 아저씨 둘과 경찰 한 명이었다. 그리고 끝으로는 그 남자 자신이었다. (중략)
나는 모든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게.
P 170.
(윤재와 곤이의 대화 중, 곤이가 왜 윤재한테 계속 찾아오는지 말하는 장면)
- 마지막엔, 마지막에는 뭐라고 했냐.
- 마지막엔 날 안아 주셨어. 꽉.
곤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곤 간신히 속삭이듯 내뱉었다.
- 따뜻했냐, 그 품이.
- 응. 많이.
솟아올라 굳어 있던 곤이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그 애의 얼굴이 쭈글쭈글해졌다. 그 얼굴은 천천히 아래로 향했고 이어서 무릎이 툭 꺾였다. 고개를 푹 숙인 몸이 들썩였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그 애는 울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곤이를 내려다보았다. 쓸데없이 키가 커진 느낌이었다.
P 171.
어딘가를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슬며시 힘을 뺄 때면 엄마는 눈을 흘기며 얼른 꽉 잡으라고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쪽 손은 할멈에게 쥐여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P 224-225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윤 교수는 곤이를 낳지 않는 쪽을 선택했을까? (중략) 그런 식으로 따지면 역시 곤이가 태어나지 않는 편이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 애가 아무런 고통도 상실도 느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은 의미를 잃는다. 목적만 남는다. 앙상하게.
새벽녘이 되도록 의식이 또렷했다. 곤이한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했다. 네 엄마 앞에서 아들인 척해서. 내게 다른 친구가 생긴 걸 말하지 않아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 너는 안 그랬을 거라고,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P 244
심 박사를 찾아간 어느 날이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폭격에 두 다리와 한쪽 귀를 잃은 소년이 울고 있다.... 화면을 보고 있는 심 박사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내 시선은 미소 띤 박사의 얼굴 뒤로 떠오른 소년에게 향해 있었다. 나 같은 천치도 안다. 그 아이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 (...)
하지만 묻지 않았다. 왜 웃고 있느냐고. 누군가는 저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등지고 어떻게 당신은 웃을 수 있느냐고.
비슷한 모습을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채널을 무심히 돌리던 엄마나 할멈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면 엄마와 할멈을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그날의 사람들은? 그들은 눈앞에서 그 일을 목도했다. 멀리 있는 불행이라는 핑계를 댈 수 없는 거리였다. 당시 성가대원 중 한 사람이 했던 인터뷰가 뇌리에 떠다녔다. 남자의 기세가 너무 격렬해,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P 247.
마지막으로 눈이 내리던 날. 그러니까 내 생일날. 피로 눈을 물들인 엄마가 쓰러져 있다. 할멈이 보인다. (중략)가. 가. 저리 비켜! 그런 말은 보통 싫다는 뜻이다. (중략)
피가 튄다. 할멈의 피다. 눈앞이 붉어진다. 할멈은 아팠을까. 지금의 나처럼. 그러면서도 그 아픔을 겪는 게 내가 아니고 자신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톡. 내 얼굴 위에 눈물 방울이 떨어진다. 뜨겁다. 델만큼. 그 순간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가 탁, 하고 터졌다. 이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아니, 밀려드는 게 아니라 밀려 나갔다. 몸속 어딘가에 존재하던 둑이 터졌다. (중략)
-느껴져.
내가 속삭였다. 그것의 이름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외로움인지 아픔인지, 아니면 두려움이었는지 환희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무언가를 느꼈을 뿐이다. (중략)
비로소 나는 인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