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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연주리 Jan 29. 2020

불쑥 솟은 흰머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 사랑하긴 힘들다

언제부터인가 거울을 보면 이빨에 낀 고춧가루보다 먼저 확인하는 게 생겼다. '불쑥 솟은 흰머리'다.

너무 거슬려서 매일 거울을 보면서 뽑을까말까, 염색을 할까말까 고민한다.


식사를 마치고 이를 닦으러 화장실에 갔다가 머리 제일 윗부분에 우뚜커니 자리잡은 흰머리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한숨지으며 내가 애초에 화장실에 이를 닦으러 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나온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손에 들린 칫솔을 보고서 '아차' 하고서는 다시 들어가서 이를 닦으면서도 거울 속 흰머리만 쳐다봤다. 몇년 뒤의 내 커리어 보다 당장에 더 거슬리는 이 흰머리는 해결하고 싶어도 해결이 나지 않는 골칫덩어리다.



고민 끝에 몇 놈을 뽑아도 이 흰머리 녀석은 곧바로 또 같은 자리에 나는데, 다른 머리카락은 나이가 들수록 얇아지고 힘도 없어지는 데 어찌된 일인지 이 흰머리만이 세월이 흐를수록 아주 튼튼하고 굻고 힘차게 자란다. 그래서 색깔도 색깔이지만 그 파워때문에 더 돋보인다. 그런 파워 덕분에 머리를 보면 흰머리만 안테나처럼 툭 튀어나와있다. 에라이 못 된 힘만 쎈 흰머리 같으니라고. 조용히 검은 머리카락 속에 섞여 있어도 나의 화를 돋우는 존재인데 감히 어딜 얼굴을 쳐 들고 나와서 혼자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지. 예끼 이놈!


오늘 회사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다음 역에 내리는 행운이 따라주어 자리에 앉아서 회사까지 가게 되었다.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앉아갈 수 있다니, 안보이던 흰머리가 또 보이더라도 화를 내지 않을 만큼 기분 좋은 일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모 눈에는 모만 보인다고 맞은 편에 앉아있는 아주머니의 흰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처럼 흰머리 몇가닥이 안테나가 되어서 아주 돋보이는 존재가 되어 힘차게 솟아있었다. 예전 텔레비전 뒤에 있는 안테나처럼 아주 높이 높이 절대 주눅들지 않는 기상으로!

그걸 보는데 왠지 모를 동질감과 연민이랄까 이 감정은 도대체 뭐지. 지하철에서까지 내가 흰머리 생각을 하다니... 휴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흰머리는 누르면 누를 수록 더 튀어나오는 용수철처럼, 뽑으면 며칠 뒤 더 강력한 파워를 장착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짜잔~ 내가 죽은 줄 알았지~~" 이런 느낌으로 말이다. 흰머리는 그야말로 불사조다. 죽이면 죽일수록 더 강하게 살아난다. 그래서 흰머리를 볼 때면 초등학교 시절 엄마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테니 나는 자기주장이 강한 고집쟁이 꼬마아이였을 것이다. 학기초에 담임선생님이 하루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연주 어머니. 따님은 눌러도 눌러도 눌러지지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좀 눌러보려고 했는데 아이가 개성이 정말 강하고 뚜렷하네요. 그런데 꽤 괜찮은 아이인 것 같습니다. 잘 키워보세요."

나의 흰머리도 날 닮아서 그런것일까. 왜 눌러도 눌러지지 않는 것인지. 누르면 좀 눌러지면 좋으련만. 나를 키울 때 담임선생님의 마음도, 엄마의 마음도 이랬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흰머리를 골똘히 보고 있으니 채윤이가 와서 묻는다.

"엄마 뭐해요?"
"응, 흰머리가 너무 많아서 뽑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더. 다 뽑으면 대머리 될 것 같고, 안뽑자니 너무 거슬려서 말이야. 엄마는 흰머리 때문에 걱정이야. 너무 싫어. 이 놈의 흰머리!"

이 예쁜 입이 너 이쁘대. 흰머리 너는 좋겠다.


그런데 아주 해맑고, 거짓은 한톨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바로 보여주는 순수한 채윤이의 눈망울이 나의 흰머리를 오래도록 쳐다보더니 말한다.

"엄마! 흰머리도 예뻐요."


딸기쨈처럼 빨갛고 촉촉하고 반짝거리는 입술이라 저리도 달콤한 말이 나오는걸까? 잼 같은 입에서 잼 같은 말이 나오니 쪽쪽 빨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채윤이의 입을 볼때마다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딸기잼 입술을 가진 채윤이가 주인인 나도 싫어하는 나의 흰머리를 예쁘다고 말해주다니. 마음이 이상했다.


그래, 초등학생 시절 담임 선생님이 날 끝까지 누르지 않고 더 사랑해 주신 것처럼, 나도 이제 흰머리를 누르려고만 하지말고, 그만큼 끈기있고 개성있는 튼튼한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잘 지내봐야지. 우리 딸 한테 예쁘다고 인정받은 특별한 머리인데.


그러고보니 생각을 달리해서 흰머리 녀석을 보니 아닌게 아니라 이녀석 상위 0.001 프로다. 아주 우수한 녀석이다. 머리카락 몇만가닥 중에서 고작 열몇개만 흰머리이니 정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하얀 머리 안에 든 녀석이다. 그러니까 이 흰머리는 머리카락들 사이엥서 지혼자 하얗다고 신났겠지? 머리카락들 사이에서는 우상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의 흰머리야 착각하지마라. 너는 조지클루니의 그런 흰머리 느낌이 아니란 말이야. 조지 클루니는 머리숱이 엄청 많잖아. 그래서 온통 머리가 하얀색으로 물들어져도 은발이라고 불릴만큼 근사하단 말이야. 그런데 머리카락 니가 아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채윤이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을 만큼 머리숱이 빈약하다. 어느정도로 빈약하냐면 가슴이 빈약한 것보다 머리숱이 빈약한게 훨씬 신경쓰일 정도야. 어느날 요술램프 속 지니가 내 눈앞에 나타나 '풍만한 가슴을 줄까, 풍성한 머리카락을 줄까, 주인님 말씀만 하시죠.' 라고 한다면 나는 고민이라는 과정없이 그냥 내뱉을 거야. "풍성한 머리카락" 이라고!  가슴이야 수술하거나 기능성 속옷을 입으면 되지만, 머리카락은 수술이나 돈으로 해결이 안되잖아. 그러니까 나는 머리숱이 적어서 흰머리까지 뽑을 수가 없는 그런 엄청나게 머리카락에 예민한 사람이라고. 이제 이해하겠지. 니가 내 딸의 사랑까지 받는 상위 0.0001%의 멋진 존재라고 해도 미안하지만 나는 흰머리 너에게만큼은 관대할 수가 없다.


그래도 기억해! 내딸이 유일하게 예쁘다고 말해준 머리카락이 너네 흰머리카락이야.

딸기잼처럼 빨갛고 촉촉한 채윤이의 입술이 너희를 예쁘다고 말하는 그 입술을 봤어야 하는데,

그 입술을 너희가 봤다면 내가 너희를 미워해도 채윤이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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