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샤인 연주리 Apr 24. 2020

5살 딸이 병원 같이 가줘야 하는 겁쟁이 어른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딸

내 얼굴에는 아주 큰 기미주근깨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매우 큰 얼룩이 있다. 어두 칙칙한게 아이들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같아서 집 앞에 분리수거만 하러 가도 컨실러로 눈 밑에 있는 큰 얼룩은 꼭 가리고 간다. 얼굴에 있는 큰 얼룩을 가리면 내 얼굴이 그나마 보기 나아보이지만 집에서 아이들과 있을 때에는 당연히 쌩얼로 지낸다. 그런데 며칠 전 꾸미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딸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서.


다른 사람이 나와 그렇게 20cm도 안되는 얼굴 간격을 가지고 있으면 매우 불편하고 불쾌할 텐데, 이 이쁜 녀석이 내 얼굴앞에 가까이 와있으니 왜이리 이뻐 보이는지. 뽀오얗고 보드라운 볼이 너무 이쁘고 부러워서 그저 웃으며 아이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는데, 딸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


"엄마 얼굴에 이 점이 없으면 더 예쁠 것 같아요."

"어? 이 눈 밑에 있는 이거? 이거 말하는 거야?"

"네! 그거 없으면 엄마 더 예쁠 것 같아요."


이건 우리 엄마가 나에게 늘 하던 멘트인데... 제발 눈밑에 점좀 빼라고. (엄마는 아예 이걸 점이라 칭한다. 하지만 엄마가 물려준 점이 절대 아니고 내가 하도 햇볕에 무방비 상태로 싸돌아 댕겨서 생긴거다.) 엄마가 그렇게 얼굴을 볼 때마다 말해도 새겨듣지 않는 나였는데, 무결점 하얀 피부를 가진 세상 누구보다 예쁜 딸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코로나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가 사람이 제일 없다는 오후 평일 시간을 골라서 피부과 예약을 했다. 그런데 생전 피부관리나 뷰티샵을 안다니다 보니 왠지 나도 모르게 부끄럽기도 하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피부과 직원들이 나를 보고 '저 여자는 나이 들어서 저 지경이 되도록 얼굴을 내버려둔 주제에 왜 온거래?' '저 여자는 돈도 없어 보이는데 피부에다가 뭘 하려는 거야?' '저 여자 지금까지 피부 방치했다가 온거 보니까 돈 좀 확 뜯어낼 수 있겠다. 비싼 상품 잘 구슬러서 소개해서 돈이나 빼먹자.' 라고 수근거리고 날 이용할 것 같은 이상한 상상이 머릿속에 꽈악 차버렸다. 예약 시간이 다 되었는데, 내 머릿속 이야기 때문에 도무지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혼자 집에서 왔다갔다 정신없게 산만하게 있던 내가 갑자기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 안되겠어. 채윤이랑 같이 다녀올게. 채윤이 보내는 거 허락해죠. 같이 가게 해죠!"

"뭐? 너 지금 가는 것도 못마땅한데 다섯살짜리 어린 애를 왜데려가. 혼자가!"

"용기가 안나. 평생 이런데 안가다가 가려니까 겁나. 나 겁쟁이 인거 알잖아. 채윤이랑 같이 가면 말동무도 있고, 어색하지 않게 상담도 받고, 용기내서 병원 문 열 수 있을 것 같아. 혼자가면 문 앞에서 돌아올 것 같아.응?"

"하하하하 딸이 니 보호잔거야?"


피부과 오가는 길이 호텔보다 더 예뻐서 다행이다. 다음에도 나랑 같이 병원에 가주겠지예


그렇다 말 그래도 딸은 나의 보호자가 되어서 나와 함께 피부과에 갔다. 

역시 채윤이 손을 잡고 병원을 가니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병원 가는 길이 너무 예쁘다고 신나있는 딸을 보며 나 역시 병원 가는 과정을 즐길 정도로 여유가 생겼고, 깨끗하고 커다란(내가 본 병원 문 중에서 가장 컸다. 왜 그렇게 크게 만들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병원 문을 여는 것도 전혀 망설여 지지 않았다. 혼자왔으면 병원 문 크기를 보고 분명 뒷걸음질쳐서 집으로 돌아왔을 거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서도 따님과 이야기하느라 피부과 직원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을 할 시간도 없었다. 


진료실에서도, 상담실에서도 두렵거나 어색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어린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렇듯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가 길어질라치면 지겨워서 몸을 베베꼬며 나의 정신을 쏙 빼놓으니까. 채윤이 덕분에 급하게 간략하게 진료 받고, 상담 받느라 그 어떤 것도 어색할 틈이 없었다. 물 흐르듯 모든 것이 매우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빨리 흘러갔다.


우리 엄마의 소원이 이루어진 날이다. 드디어 얼굴에 있는 큰 점을 조금이나마 흐리게 만들 수 있는 피부관리 10회권을 끊었으니!  딸 덕분에 피부과에도 갈 결심도 하고, 딸 덕분에 피부과에 관리 10회도 시작하고! 내가 엄마로서 딸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당연히 크겠지만, 딸과 사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아이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아이가 클 수록 내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점점 작아지는 것 같은데. 나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 엄마가 10년 넘게 얼굴 점빼라고 잔소리했는데 안듣더니 딸의 한마디에 병원행! 


인생은 그렇게 되풀이 되는 것인가 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깨칠 때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도 알게 되는 서른일곱. 

아직은 꼬마 어린이의 보호가 필요한 나는 엄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악쓰며 우는 아이 달래는 귓밥 파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