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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플리 May 22. 2019

프라하, 프라하

7th  of '33 journal


7시간 전 폴란드 크라쿠프를 출발한 야간버스가 동트는 프라하(Praha)로 들어서고 있다. 몸에 맞지 않는 유럽 버스 좌석에 뒤척이는 동안 척추는 마치 새로 조립될 것처럼 삐걱거리며 쑤셨다. 그러나 마침내 프라하의 상징인 주홍빛 지붕이 붉고 푸른 하늘 위로 반짝일 때, 나는 앞으로 20여 일, 매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피로를 수면제 삼아 푹 잔 덕분에 정신만은 맑게 시작하는 프라하와의 재회. 밝아지는 창밖을 보며 아마 할 수만 있었다면 이렇게 물었을 것. 아, 네가 이렇게 예뻤나?





몇 해 전 여름, 프라하에 잠시 들른 적이 있다. 지금보다 훨씬 앳된 시절, 누군가를 열띠게 사랑하던 때이기도 했다. 당시 홀로 떠난 배낭여행의 한 가운데, 권태를 느끼는 내게 프라하는 익히 들어온 명성만큼의 도시는 아니었다. 올드타운은 늘 관광객으로 붐볐고, 함께 보면 누구와든 사랑에 빠질지 모른다던 까를교(Charles Bridge) 야경조차 예쁘긴 했지만, 기대한 낭만은 없었다. 설상가상 16인실 도미토리에서는 밤새 도둑이 들어 크고 작은 소동이 일어났고, 내 아랫 침대 미국인은 배낭 전부를 탈탈 털리는 불상사까지. 그러나 그때도 이 도시가 아름다웠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붉은 지붕이 모여 앉은 전경은 하루 종일 노을이 지는 듯했고, 다듬어지지 않아 적당히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오히려 자유롭고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문제는 나의 지친 마음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년 후, 프라하를 다시 만났다. 한가득 무거운 짐과 홀가분한 마음, 조용한 설렘을 안고.


아직 차가운 새벽 공기만이 썰렁한 프라하 중앙역에 홀로 내린 나를 맞이했다. 모두 종착지인 플로렌스 역까지 가는 모양이었다. 반면, 우리 숙소는 중앙역에서 버스 한 번에 갈 수 있는 위치였다. 생각만 해도 아늑한 그 집에는 며칠 앞서 도착한 S가 기다리고 있다. 이제 길어야 30분이면 그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왠지 나날이 무거워지고 있는 것 같은 캐리어를 끌고 구글맵이 찍어준 정류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눈 뜨자마자 힘쓰기가 쉽지 않지만, 밤새 달려 여기까지 왔는데 이 정도쯤이야. 봄이라 그런지 도로를 파헤쳐 공사하는 곳이 많은 데다, 울퉁불퉁한 길 덕분에 팔에 욱신거림이 느껴질 무렵,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런데, 정류장 팻말이 없네. 정체 모를 체코어 안내장만 덩그러니 붙어 있다. 이게 만약 영화였다면 배경음악이 바뀌어야 할 장면이다. 주변엔 전부 길을 갈아엎었고, 새벽 6시. 그곳엔 나 이외에 누구 하나 있을 리가. 그래, 살짝 순조롭다 싶었지. 예쁜 악동 같은 이 도시는 역시 귀여운 환영식을 준비해뒀다. 번역기가 그 정류장은 현재 폐쇄했으니, 다음 정류장을 이용하라고 친절히 알려준다. 허허 웃고 다시 걷는다. 오르막은 덤이다.


S에게 끝없는 실소와 함께 이 실황을 중계하며 나는 1시간 뒤에야 숙소 근처에 내렸다. 그사이 유럽 생활에 완벽히 적응한 듯 트렌치코트를 팔랑이며 아침 빵을 사러 나온 S가 저 멀리 보인다. 아, 아는 사람! 아니 겨우 열흘 전에 만났던 이가 이렇게까지 반가울 수 있나. 며칠간 홀로 여행에 지친 마음이 빗장을 푼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캐리어를 던져버리고 달려가 안기고 싶었던 나와는 달리, 정작 그녀는 점점 가까워질수록 창피한 듯 박장대소할 뿐이다. 하긴, 그때 내 몰골은 그럴 만도 했다고 인정한다. 이른 아침, 마주 보며 웃음 터진 까만 머리의 두 여자를  동네 사람들이 힐끗힐끗 보며 지나간다. 한없이 평범하게 벚꽃 흐드러진 봄날,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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