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th of '33 journal
전날의 강행군을 뒤로하고 자코파네에서 할 일 없는 하루를 보낼 기회. 오후에는 크라쿠프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한다. 초반 여행지로 선택한 폴란드의 시간이 끝을 향하고 있다. 집을 나선 지도 6일째, 이 빠듯한 스케줄이 마무리되면 프라하에서의 여유가 기다리고 있겠지. 그러니 이날 역시 할 일 없이 보낼 수는 없었던 거구나. 몸과 마음은 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론가 향한다.
폴란드 사람들에게 휴양지인 자코파네의 4월은 아직 비수기. 아침 일찍 나가본 시가지는 조금 썰렁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간간이 나처럼 배낭 맨 여행자들만 보일 뿐. 여느 유럽의 명소들처럼 아기자기한 소품가게와 저걸 누가 다 살 지 걱정될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탕가게만 거리에 즐비하다. 해가 반짝 일어나고 이들도 막 가게 문을 열기 시작한다.
아담한 이 시골마을은 시내를 중심으로 관광단지, 주거단지, 산이 차례로 둘러싸고 있어서 과녁을 닮았다. 이는 언제 어디서든 눈을 들어 멀리 보면 설산을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멀어도 또렷하고 푸르른 그 산은 눈을 맞춰 한참 가만히 바라봐주곤 했다. 그렇게 걷고 서기를 반복하다, 세련된 현대식 건물에 카페, 레스토랑, 갤러리가 모여있어 들어가 봤다. 이른 시간인데도 제법 손님이 있는 걸 보니 잘 찾아온 듯싶다. 영어가 서툴지만 살가운 웨이트리스도 마음을 한결 편안히 해준다. 구석 창가 자리를 잡고 홍차와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시나몬 애플파이를 주문했다. 어김없이 펼쳐진 설산을 배경으로 노트북을 꺼내고, 잠시 노곤히 풀어져도 되는 시간.
사실, 이 여행이 생각보다 더 고단했던 이유는 밤마다 계속 업무를 봐야 했기 때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 후 직장에 매여있을 때보다 더 여행을 못 다니고 있던 내게 친구의 유럽행 제안은 너무도 솔깃했다. 이 생활도 이미 3년 차에 접어들었고, 마음 같아선 몇 번이고 짐을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프리랜서는 시간적으로 자유롭긴 해도 실질적으로는 휴가랄 게 없는 데다, 언제 작업이 들어올지, 또 안 들어올지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훌쩍 어디론가 떠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다 시간이 생기거나, 괜찮은 페이를 받았을 때도 작은 여유를 부리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질 때가 많았으니까.
온전히 마음에 충실하고, 느껴지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여행의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여행지에는 아무도 재단하지 않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는 그런 나를 만나러 그곳에 간다. 큰 맘먹고 작년부터 기다려 온 이 긴 여행의 시작을 다름 아닌 자코파네의 카페에 앉아 비로소 실감한다. 정말 여기 왔구나. 올 수없을 것 같았던, 넌 어디로도 떠날 수없을 거라고 나를 붙들었던 매듭이 풀어지고. 노랗게 비치는 햇살 아래 따뜻한 파이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문득 조금 행복해졌음을 느꼈다.
그날 오후는 자코파네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바우프카(Gubałówka) 전망대에 올라 이 도시와의 안녕을 고했다. 이후 크라쿠프까지 3시간 그리고, 다시 프라하행 야간 버스를 기다리면서 폴란드와 작별하는 아쉬움과 프라하를 다시 만날 기대감이 섞여 오묘한 밤이 내리고 있다. 이제 곧 체코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올해 봄이 일찍 온 한국에는 벚꽃이 벌써 지고 있다고 했다. 크라쿠프와 헤어지기 몇 시간 전, 우연히 공원 가득 눈처럼 새하얀 벚꽃이 흐드러진 풍경을 보았다.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던 자코파네의 설산과 이날 휘몰아친 크라쿠프의 화이트 블라썸. 그렇게 마음 속 언제든 불 밝힐 수 있는 전구 하나를 간직하고 프라하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