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th of '33 journal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자코파네(Zakopane)의 저녁 7시. 아침 일찍 크라쿠프를 나선 지 12시간 만에 하루 여정이 마무리된 참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3시간, 미니밴으로 0.5시간, 입구까지 도보로 2시간, 입구에서 다시 30분을 걸어 올라 호수에 닿는 미션. 이 날 과연 나는 '바다의 눈'을 봤을까?
드디어 자코파네에 가는 날. 며칠 전까지 추운 날씨에 눈비가 내리기도 했던 폴란드이지만, 다행히 지금은 날씨 운이 좋다. 대부분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에메랄드 빛 호수 사진 한 장에 반해 자코파네행을 결심했다. 모로스키에 오코(Morskie Oko), '바다의 눈'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이 호수는 그리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폴란드 속담에 '삶에 지칠 땐 자코파네가 있다.'는 말 까지 있다고 하니 이유는 더 필요치 않다.
정오, 자코파네의 만년설을 마주하고 순조로운 트레킹을 시작했다. 잘 닦은 도로와 비포장 등산로를 번갈아 오르는 길은 걸음이 빠른 내게도 3시간 가까이 걸렸다. 게다가, 폭설 후 얼었던 눈이 따뜻한 날씨에 녹기 시작했고, 가벼운 러닝화에 미끄러운 길을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지금 신발을 신은 건지 양말을 신은 건지 모르게 점점 시원해지는 발, 날이 따뜻하니 발이 시원해서 좋다고 위안을 삼아볼 뿐이다. 그렇게 오르기를 한참, 산장도 나오고 화장실도 나오고 사람들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걸 보니 호수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이 작은 언덕만 지나면 마침내 모로스키에 오코! 바다의 눈을 마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하다. 호수가, 내가 아는 그 풍경이 아니다. 그냥 새하얗다. 아직 덜 온건가? 아니, 여긴 분명 모로스키에 오코가 맞다. 맞는데, 올라온 길처럼 호수도 눈으로,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내내 눈길을 걸어오면서 왜 꿈에도 이 생각을 못했을까. 온통 하얗기만 한 사방을 둘러보니 여행하는 내게 여간해선 없을 짜증이 다 날 지경이었다. 다 젖은 발과 다리, 더 무거워진 것 같은 배낭까지 허무함을 더한다. 바다의 눈 보러 왔는데, 진짜 눈 봤네.
허탈함에 캐빈에 들어가 계획에 없던 토마토 수프까지 시켜서 앉았다. 그야말로 온통 하얀 창 밖에 멍을 때리면서 수프를 떠먹는데, 실성이라도 한 걸까.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해는 쨍쨍해서 눈이 부시고 그 아래 타트라(Tatra) 산이 한우 같은 마블링을 뽐내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고 흰 눈의 벌판. 고요하게 얼어 빛을 쬐는 호수의 표정이 한없이 평온하다. 비록 기대한 풍경은 아니지만, 폴란드 사람들도 힘들게 여긴다는 이 코스를 꼬박 걸어 여기 왔고, 지금 나는 보고 있다.
물론, 용감한 폴란드인들은 아이와 함께 오기도 했다. 유모차를 밀고, 대여섯 살 어린이들은 앞세워 걷게 하고, 심지어 백일 전후돼 보이는 갓난아기를 아기띠에 맨 부부도 있다. 밖으로 나와 호수 위를 걸어보려고 내려갔는데, 바로 그 가족이 서로 번갈아 사진을 찍고 있기에 같이 찍어준다고 했다. 셋이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며 반갑게 카메라를 건네는 남편과 아기를 안은 아내. 뷰 파인더로 본 그들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가족, 행복의 순간. 아마 아기는 훗날 이 순간을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사진을 보면서 이날 볼에 닿은 빛과 공기를 어렴풋이 떠올리겠지.
그리고 나는 하산했다. 조금 남은 아쉬움은 내려오는 두 시간, 그 길이 너무 아름다워 모두 떨쳐내 버렸다. 이런 길을 올라왔던가. 힘들 땐 안중에 없던 풍경이, 앞만 보고 갈 때는 몰랐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삶에서도 이렇게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볼 날이 오길. 그때 마주할 풍경도 내 상상 속 바다의 눈만큼 멋졌으면 한다.
하늘이 점점 물들고, 젖었던 운동화도 조금씩 말라가고 호수는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