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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플리 May 08. 2019

나와 폴란드 2

4th of '33 journal





피로는 이성을 무디게, 예민하게 한다.

모든 것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진절머리 난다고 느껴질 때, 바로 그때 나는 폴란드에 왔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여행. 삶도 마찬가지이다.


소담하고 멋스러운 이 나라는 마치 동화 속 같은 풍경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 좋은 첫인상을 펼쳐 보이지는 않았다. 대체로 그간 경험해 온 유럽인들의 친절을 이곳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터미널, 버스 기사, 호텔 리셉션, 식당 웨이터.... 크게 친절할 필요는 없으나 왜 하나같이 필요 이상으로 퉁명스럽고, 경계심이 느껴지는지. 오늘따라 내가 예민한 거라고, 말이 잘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크라쿠프(Kraków) 이틀 째 여정에 나섰다.



시차 적응을 고려하지 않고 초반부 스케줄을 빡빡하게 짜 놓은 덕분에 며칠째 몇 시간도 채 못 자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시비엥침에 다녀온 후, 아니 한국에서 비행기를 탄 시점으로부터 4일 만에 처음으로 여유로운 날이 왔다. 온전히 크라쿠프를 자유롭게 둘러보는 일정이다. 내가 짠 스케줄에 밀려 휴식을 기다리는 신세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일단 길 위에 있으면 욕심이 한없이 커져버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도보로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는 규모라 계획도, 부담도 없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숙소가 유대인 지구인 '카지미에슈(Kazimierz) 안에 있어서 몇 발자국 뗄 때마다 유대교 회당(Synagogue)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곳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자, 당시 유대인들의 생활 터전이 그대로 보존된 곳이다. 그렇게 걷다 보면 여느 도시가 그렇듯 강을 건너고, 그럼 마치 대문을 지나듯 마법처럼 구시가지가 펼쳐진다. 크라쿠프의 상징 바벨(Wawel)성이 껴안고 있는 듯한 이 아담한 시내는 기념품점, 예쁜 레스토랑과 가게들이 모여 있어서 마치 세트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커피를 사려던 차에 마침 눈에 띈 맥도날드에서는 상냥한 점원들을 만나 긴장이 한껏 풀어졌다. 다행스러운 시작이다.


바벨성 앞에 다다르자, 여행자들이 다 여기 있었구나 싶게 사람이 많다. 비스와(Wisla)강과 주변 전망을 보면서  게으름도 피워보고, 다시 카지미에슈 쪽으로 넘어가 사람이 미어터지는 작은 식당에서 폴란드식 토마토 수프와 샐러드, 돼지고기 꼬치요리로 식사를 했다.



 


이후엔 폴란드 그릇을 파는 가게에 들렀다. 한국에서보다 월등히 저렴하다는 폴란드 그릇은  손으로 하나하나 그린 파란 물감 패턴이 특징이다. 패턴이 정교하고 특이할수록 값도 올라가는 데, 답지 않게 욕심이 나서 지인들 선물을 좀 샀다. 여행 내내 들고 다닐 순 없으니 택배로 부칠 요량으로 우체국을 찾았는데 아,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왜 구글 번역기를 쓰지 못했을까 싶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무슨 소용. 제대로 당황한 내게 다행히 구세주 같은 한 폴란드 여자아이가 도움을 주었다. 다니는 동안 상냥함이 간절했던 내게 감사를 넘어 감동을 준 그녀는 커피 한 잔 사겠다고 해도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바샤. 네 이름과 예쁘고 큰 눈을 잊지 못할 거야.


바샤와는 아쉽게, 택배와는 홀가분하게 작별하고 나니 어느덧 해가 떨어지고 있다. 이제 크라쿠프에서의 마지막 일정인 일몰을 보러 갈 차례.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크라쿠스 마운드(Krakus mound)에 갈 예정이다. 크라쿠프를 세운 전설 속의 왕 크라쿠스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곳. 크라쿠프라는 이름도 '크라쿠스'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도시의 기원을 향해 30분 버스를 달리고, 언덕을 걸어 오른다. 해 질 녘인 데다, 지대가 높아질수록 바람도 거세진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크라쿠스 마운드는 정말이지 신라 고분과 똑 닮아서 순간 경주를 떠올리게 했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환상적인 크라쿠프의 전망이 맞이해주는 거대한 전설의 고분. 비록 너무 춥고 바람이 세서 오래 서있을 수는 없지만, 붉게 아름다운 그 풍경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조금 아래로 내려와 보니 담요로 꽁꽁 싸맨 커플들이 옹기종기 석양을 즐기고 있다. 비록 꼭대기보다는 아니어도 추운 일몰 직전, 나는 누군가가 없으니 살포시 다리를 모아 안아야지.

오늘의 마지막 빛을 발산하는 태양과 함께 나도 가장 붉게 타오르는 시간. 온몸으로 배웅한다. 이 여행의 첫 일몰 속에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간 폴란드와의 만남이 머리를 스쳐간다. 이제 어떤 날이 될 지 또 모르지만, 같은 해가 뜰 것을 위안삼고 여행자의 마음으로 기원한다. 부디 내일에도 안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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