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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플리 Apr 19. 2019

나와 폴란드 1

3rd of '33 journal



헬싱키에서 두 시간, 비행기가 폴란드 국경으로 들어왔다.

중남부의 크라쿠프(Kraków)가 오늘의 목적지이다.

본격적인 동유럽 여정 시작. 다행히 핀란드 사우나와 바닷물의 시너지가 피로를 유예해 준 듯싶다.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기차에 역방향으로 앉아 끌려가고 있으려니 창가에 해가 비쳐 들어오고 한없이 편안해진다. 따뜻한 날씨란 이렇게 행복한 것이로구나. 이날 크라쿠프의 낮 기온은 영상 20도를 웃돌았다. 중앙역에 내리자마자 헬싱키의 찬 공기를 머금은 겨울옷을 벗어던지고 돌덩이 같은 캐리어, 배낭까지 보관소에 맡겨버렸다.


여러모로 가벼워진 내가 이제 향할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무거워져야 할 곳. 폴란드에서의 첫 일정 오시비엥침(Oświęcim)이다. 흔히 독일식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라 부르지만, 이는 바른 명칭이 아니다. 시내에서 왕복 4시간, 둘러보는 데에도 최소 4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넉넉히 하루를 잡고 보는 게 좋다. 입장 시간이 엄격히 정해져 있어서 대부분은 가이드 투어를 예약해야 하지만, 개인 입장이 허용되는 시간을 잘 체크하면 혼자 여유롭게 둘러볼 수도 있다. 운 좋게도 이날 오후부터 개인 입장이 가능해 한국어 가이드북을 일행 삼아 투어를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오시비엥침의 분위기는 언뜻 역사 속 처참함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평화롭게 느껴졌다. 빈틈없이 지어진 정갈한 건물들 사이로 가득한 봄의 햇살. 분명 당시에도 이런 포근한 날이 있었겠지. 차츰 전시관 속에 산더미같이 쌓인 신발, 가방, 수감자들로부터 잘라낸 머리칼을 살펴보면서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져야 했을 많은 이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건물 밖에선 상상할 수없이 축축한 감옥의 공기를 통해 비로소 그날의 어둠이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오로지 타인을 억압하는 목적으로 지어진 시설. 살인으로 한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어리석음은 비뚤어진 인간의 한계와 동시에 끝 모를 잔인함을 보여준다. 오시비엥침에서 셔틀버스로 10분 거리에는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가 있다. 많은 이들이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장면으로 기억할 곳. 겨우 5년 지속된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갔고, 살아남은 이들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광활한 시설 위로 더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하늘이 결국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죽음 직전 그들도 보았을 하늘. 어릴 적 읽은 <안네의 일기>를 떠올려보면 유대인들이 오로지 절망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통과 공포였을 것이지만, 결국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았음을 지금 세상은 알고 있다.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악의. 삶을 가리지 못하는 불행. 그리고 행복을 앗아가지 못하는 어두운 감정. 우리는 그 불안과 차가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을 안다.

감각과 감정은 잠깐이고, 진실은 영원하다.

밟고 지나온 길에 언젠가 돌아볼 남은 발자국을 위하여. 우리의 걸음이 감내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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