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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May 18. 2021

무엇이 여성을 우울하게 만드는가

'욕구들', 캐럴라인 냅, 사전서평단 리뷰

<욕구들>, 사전서평단 가제본

이민아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한국 여성이 더 우울하다'는 연구 결과를 공개했다가 때 아닌 악플에 시달렸다. 논리적인 비판도 있었지만, '70-80년도 아니고 오늘날 한국 여성이 힘들다는 건 헛소리다', '여성이 정신질환에 더 취약하다는 것은 자칫 여성비하가 될 수 있다'는 반응들도 있었다. 이민아 교수는 추가적인 매체 인터뷰를 통해 '한국 여성이 더 우울한 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탓'이라며 반박했다. 여성의 우울이 선천적인 호르몬이나 개인의 일탈,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 따위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본 것이다.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은 이민아 교수의 이러한 주장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며, 냅이 원고를 쓰던 2002년경에도 이미 만연해있던 아주 오래된 사회 문제임을 들춰낸다.


스스로 거식증 환자이자 알코올 중독자이기도 했던 캐럴라인 냅은 자신의 경험과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여성의 거식증, 폭식증, 쇼핑 중독, 섹스 중독 등이 과연 어디서 기인하는지 끈질기게 추적한다. 여성의 극심한 중독, 여성을 중독으로 이끄는 자제할 수 없는 욕구, 끊임없이 음식과 물건과 섹스를 갈망하게 하는 마음속 허기, 우울과 불안은 왜 생겨나는 걸까?


냅의 글쓰기는 치밀하고 치열하다. 냅의 글은 번뜩이는 이성과 냉철한 분석, 끝없는 신중함과 거침없는 솔직함으로 이루어져있다. 냅은 간편한 논리와 손쉬운 문장으로 착지하는 대신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신의 글에서 허점을 찾아내 고백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여성이 우울한 이유가 '유아기에 애정 결핍을 겪었던 경험이 그의 평생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티비 속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탓이다'라며 한 문장으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냅은 그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 앞에서 단호하게 펜끝을 돌려 글을 쓴다. 음식은, 중독은, 애정과 문화는 여성의 우울을 만들어낸 수많은 이유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그보다 더 거대하고 흐릿한 무언가가 여성의 삶에 도사리고 있다고.


나는 이 감정이 음식이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칼로리 섭취량과 신체 사이즈에 관한 불안은 나에게나 수많은 다른 여성에게나 여성의 자존감과 힘과 정체성과 관련된 훨씬 더 거대한 감정의 태피스트리에서 그저 몇 가닥의 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고. (69쪽)


그 거대한 감정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내는 힘이, 여성에게 실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주고 어떤 패턴으로 태피스트리를 짜내려가라며 권유하는 힘이 바로 여성이 사는 사회에서 온다. 이민아 교수의 연구에 비웃음처럼 따라붙는 '70-80년도도 아니고 오늘날 한국 여성이 힘들다는 건 헛소리다'라는 말이 바로 그 사회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전에 비해 세상이 많이 달라진 건 모두가 안다. 여성은 이제 대부분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결혼을 할 수도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고, 자신이 일해서 번 돈으로 원하는 물건과 음식을 마음껏 사들일 수도 있다. 아무도 그것을 위법으로 처벌하지 않는다. 동시에 세상은 이전부터 했던 메시지들을 고장난 테이프처럼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여성은 학교 단톡방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외모로 등급이 매겨지고, 여성은 결혼해 출산휴가를 쓸 것이기 때문에 뽑지 않겠다는 말을 면접에서 듣고, 결혼을 했는데 애를 낳지 않다니 애국심이 없다며 초면인 사람에게 혼쭐이 나고, 그런데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으면 TV에 나올 수 없다며 수만 명이 청원을 넣고, 아이를 낳아 식당에 데리고 가면 거부당하고, 비싼 물건을 들고 다니면 남자 돈으로 샀으리란 비난을 대뜸 듣는다. 이것또한 아무도 위법으로 처벌하지 않는다. 여성은 상반되는 메시지 속에서 길을 잃는다.


이제 나는 먹는다. 이 말 자체는 승리의 진술이지만, 음식과의 더 평화로운 관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빙빙 둘러가는 기나긴 길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좋겠지만) 동행자들로 가득한 길이었다. (31쪽)


냅은 여성의 불안이 이러한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힘의 불균형, 광범위한 선택의 자유를 뒷받침하는 힘의 부재, 여성의 삶에 잔재되어있는 거대한 위협에서 생겨난다고 보았다. 1959년에 태어난 냅이 당대 여성의 삶을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겪어낸 끝에, 2002년에 완성한 원고가 2021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냅을 비롯해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동행자들'의 존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책을 읽는 동안 만큼은 외로움이 조금 줄어들었다.


냅의 또 다른 책 《명랑한 은둔자》이 여러 편의 에세이를 통해 냅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었다면, 《욕구들》은 냅의 삶과 냅의 감정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는 책이었다. 《욕구들》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리며 냅의 다른 책들을 장바구니 속에 쏟아넣었다. 냅의 글을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롭게 느낀다. 이처럼 글을 쓰는 사람을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가제본 서평단으로 활동하며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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